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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사모 Feb 25. 2025

풀빠따, 다음에 올 땐 3.

1987년 1월에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고문을 당하다 숨졌다. 아.. 이제는 군이 아니라 님, 열사로 호칭을 바꿔야 할 만큼 지난한 세월이 흘렀음을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천주교 사제단들에 의해 고문의 은폐가 밝혀지면서 진실규명을 위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가던 그해 4월에 나는 결혼을 했다.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었고, 시국도 어수선한 때라 풀빠따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아니,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고, 시국이 어수선하지 않았더라도 아마 남편은 안 갔을 것이다. 그 후로 지금까지 풀빠따를 일곱 여덟 번쯤 다녀온 것 같다. 딸들이 초등학교 때 함께 여름휴가를 다녀왔고, 친구와 단둘이 불현듯 일상탈출에 의기투합하여 다녀온 때도 있었고, 백담사 근처 계곡으로 교회수련회를 갔다가 단체로 풀빠따를 들러오기도 했다. 그리고 반쯤은 이번처럼 혼자 갔었다. 가출의 결과도 번번이 같았다. 단 하룻밤의 내 일상탈출은 남편에게 큰 자극과 위협이 되지 않았고,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할 때부터는 전화기에 갈등의 원인과 해명에 대한 장문의 글이 올라왔었다. 이번에 전화기를 두고 나갔다 온 이유다. 풀빠따는 늘 언제나 그대로였다. 외롭고 서럽고 억울할 때 달려갈 수 있는 친정 집 같은. 오래전 돌아가신 친정 부모님이 이유도 묻지 않고 그저 말없이 등 쓰다듬어주시던……


신기하게도 풀빠따에서 하룻밤 자고 나면 시끄럽던 속이 제자리를 찾았다. 오롯이 남편을 향했던 비난과 억울한 마음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객관적으로 나를 들여다보는 피정의 시간이 되곤 했다. 풀빠따에서 겨우 하룻밤을 보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버스가 미끄러지듯 정류장을 빠져나올 때 나직한 목소리로 외쳤다. “풀빠따야! 다음에 올 땐, 환상의 멤버들을 모집해서 다 같이 올게. 기다리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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