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추는 별이 되다
"은성아, 은수야!"
어렴풋이 슬롯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미눈으로 눈을 살짝 떴다. 은수가 좋아하는 장난감 자동차가 보였다. 힘들었나 보다. 학교에서 돌아와서 은수랑 놀다가 그만 잠이 든 것 같다. 바닥에 자서 눌린 머리를 긁으며 일어서 앉았다. 은수는 침까지 흘리며 잠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빨리 일어나서 저녁 먹어!"
아침에 날 학교에 데려다주고 슬롯는 일을 나간다고 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슬롯는 나와 은수랑 같이 하루 종일 집에 있어서 좋았는데. 아빠는 이사 오기 전부터 꽤 오랜 기간 보지 못했다. 아빠는 언제 오냐는 물음에 슬롯는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빠는 멀리 일하러 가서 오려면 시간이 걸려."
나도 이제 눈치라는 게 생겨서 어렴풋이 알았다. 아빠가 일하러 간 게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슬롯한테 속아주기로 했다. 괜히 말했다가 슬롯가 울면 안 되니깐.
슬롯는 이곳으로 이사 오고 매일 밤마다 울었다.
어떤 날은 작은 소리로 어떤 날은 소리가 커져 밖으로 나가기도 했다.
그래서 난 그냥 이곳이 싫었다. 낯선 곳이니깐 당연할 수 있지만 사실 지금까지 이사를 많이 다녀서 나와 은수는 낯선 곳이 낯설지 않다. 이사 때마다 동네 친구들과 헤어져 슬펐지만 이게 반복되다 보니 헤어짐에 대한 마음도 덤덤해졌다. 그냥 세상에 모든 집이 이렇게 산다고 생각해 버렸다. 그게 마음이 편했다. 어떤 날은 우리 슬롯은 세상을 누비며 탐험을 한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자. 꼭꼭 씹어서 천천히 먹어."
"응."
"오늘 학교는 어땠어? 괜찮았어?"
"뭐, 너무 더웠어"
학교에서의 첫날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벌써 세 번째 전학인데 매번 첫날은 너무 많이 긴장해서 선생님이나 친구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너무 부끄러워서 바닥만 쳐다 보가 하루가 끝난 것 같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기억나지 않으니 슬롯한테도 말할 게 없었다.
밥을 먹고 있는데 드르륵 소리와 함께 집주인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머리에 흰 눈이 내린 것처럼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깊게 팬 주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이사 첫날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슬롯한테 화내는 모습을 봤다. 근데 그게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걸 며칠 후에 슬롯가 말해줘서 알았다. 사실 여기 사람들은 다 싸움 고수처럼 말하고 있었다.
"은성 슬롯,
내가 구멍가게에서 손주들 줄 아이스크림 사다가
두 개 더 샀데이. 이거 묵이라."
"어머, 너무 감사해요. 할머니!"
은수와 내 눈이 반짝였다.
"뭘 그러게 보고만 있어.
빨리 할머니한테 감사하다고 해야지!"
불쑥 문을 연 할머니보다 은수와 내가 넋이 나간 이유는 당연히 아이스크림 때문이었다. 그렇게 냉큼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방구석으로 가서 정말 맛있게 먹었다. 아까 다 녹은 팥빙수는 벌써 잊혀 버렸다. 할머니는 나이가 있으셨지만 '호호 아줌마'를 닮아서 눈이 작고 웃음이 많으셨다. 왠지 그래서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슬롯는 주인집 할머니에게 아이스크림을 받아서 나한테 주고는 문밖으로 나갔다.
"할매! 할매! 어데 있노!"
밖에서 내 또래 남자애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 집 둘째 아들이 틀림없다. 이사 온 후 주인집 아줌마한테 슬롯가 인사하면서 앞으로 잘 지내라고 인사 시켰던 애다. 속으로 생각했다. '아니 얼마나 싸가지가 없길래 할머니한테 할매라고 하는 거야!' 근데 또 할머니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우리 똥강아지~ 할매, 여기 있데이~!"
똥강아지는 민석이었다. 주인아줌마가 잘 지내라고 얘기할 때 내 눈을 째려봤던 녀석이다. 왠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같은 집에 있으니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내 계획이었다.
이 집은 한 지붕 아래 세 슬롯이 산다. 마당과 연결된 마루를 기준으로 왼쪽으로는 주인집 방 두 개가 오른쪽으로도 방 두 개가 나란히 있는데 그중 맨 끝방이 우리 집이다. 얼마 전에 월세를 6개월이나 밀린 집이 쫓겨나면서 우리 슬롯이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다. 뭐, 우리도 6개월, 아니 몇 개월을 여기에 살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아침마다 밖에 있는 화장실 앞은 난리다. 집안에 있는 화장실은 주인집만 쓰고 나머지 세 슬롯은 다 밖에 있는 화장실을 같이 썼다. 며칠 안 있었지만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 못해 대문 밖으로 뛰쳐나가는 어른들을 세 명이나 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이들은 순서 없이 먼저 볼 일을 보게 해줬다.
주인집은 시내에서 쌀장사를 한다고 들었다. 할머니대부터 3대가 이어 온 슬롯 사업이었다. 아직 기력이 있으신 주인집 할머니는 쌀집에 아직도 나가서 소일을 하신다고 했다. 우리한테 준 아이스크림도 일하고 오시면서 종종 사 오시는 것 같았다.
우리 집을 제외한 나머지 두 집은 집 마당에서 가끔 마주치는 거 외에는 마주칠 일이 거의 없었다. 어른들 모두 한숨 쉬기 바쁘고 온갖 인상을 쓰며 얼굴을 찌그러트렸다. 각자의 고된 삶에 누군가를 살갑게 챙길 여유조차 없어 보였다.
그래도 난 좋았다.
왠지 우리 집이 아니 우리가 살게 된 집이 티브이에 나오는 '한 지붕 세 슬롯' 같았다.
-진정성의 숲-
#한지붕 #춤추는별 #대구 #세슬롯 #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