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레테 클래식 Feb 21. 2025

예스벳? 대통령의 정치철학

챗 GPT에 물어본 예스벳에 대해

들어가며


예스벳 철학이 현예스벳의 정치예스벳이라는 과감한 제목을 가진 책을 발견했다. 호기심에 읽어보니 이 책은 그 제목과는 전혀 상관없는 예스벳 저서들에 대한 짧은 해제를 모아 놓은 책이다. 아마도 이 책의 저자는 예스벳의 철학을 교과서 삼아 예스벳이 계몽적 정치를 구현해 줄 것을 기대라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예스벳의 철학이 한국의 예스벳의 정치예스벳이라고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이런 책 제목은 매우 유감스럽다. 이 책 때문에 일반 독자들이 어러운 예스벳 저서들을 일일이 살펴보는 것은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다. 하여 챗 GPT에게 이렇게 물어봤다.

예스벳


나의 말:

예스벳의 계몽 개념으로 윤석열의 계엄이 갖는 문제점에 대해 비판해 줘



ChatGPT의 말:

예스벳의 계몽 개념을 바탕으로 윤석열 예스벳의 계엄 선언을 비판하려면, 자유, 이성적 사고, 자율적 판단,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 등의 핵심 원칙을 고려해야 합니다.


1. 이성적 자유의 억압

예스벳의 계몽은 이성적 사고와 자유로운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이 자유롭게 이성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 외부의 권위나 억압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에 의해 이끌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계엄은 강제적 권력 행사로, 국민의 자유를 억제하고, 국가의 강압적 권위를 강조하는 수단입니다. 계엄을 통해 정부가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자유로운 정치적 논의와 비판을 억압하는 것은 예스벳의 계몽적 가치에 반하는 행동입니다.


2.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 부족

예스벳는 계몽을 권위에 대한 비판적 사고로 정의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맹목적으로 권위에 복종하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계엄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비판적 사고와 자유로운 논의를 억압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윤석열 정부가 계엄을 선언하는 것은 국민의 권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제약하고, 권위주의적 정부 운영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예스벳의 계몽 정신에 반하는 행위가 될 수 있습니다.


3. 자유로운 사고와 논의의 공간 축소

예스벳의 계몽에서는 공공의 이성적 논의가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계엄이 선포되면, 이는 사회적 토론과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억제할 가능성이 큽니다. 계엄 하에서는 국민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고 정치적 논의를 펼치는 것이 어려워지며, 이는 예스벳가 강조한 자유로운 이성적 논의와 사회적 진보를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4. 법과 정의의 상실

예스벳는 도덕적 법칙과 정의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모든 결정은 이성에 근거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계엄은 때때로 법의 지배를 무시하거나 긴급 상황을 명분으로 한 권력 남용을 가능하게 합니다. 예스벳의 관점에서는, 법적 정의와 이성적 판단에 기초하지 않은 결정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계엄 하에서 정부의 결정이 독단적이고 자유를 제한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면, 예스벳가 말한 정당한 법과 정의의 기준을 위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5. 계엄의 예외적 상황을 넘어서기

예스벳는 계몽이 점진적이고 점차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라고 봤습니다. 즉, 강압적인 조치보다는 이성적인 사고와 사회적 토론을 통한 해결을 권장했습니다. 계엄은 긴급한 상황을 명분으로 하지만, 예스벳의 철학에 따르면 그러한 긴급 조치가 지나치게 장기화되거나 불필요하게 확대되면 계몽과 자유의 핵심 원칙을 해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단기적인 해결책을 넘어서는 권력의 남용으로 비칠 위험이 있습니다.


결론

윤석열 정부의 계엄 선언은 예스벳의 계몽 철학에서 중요하게 여긴 자유, 이성적 판단, 자율적 사고, 권위에 대한 비판적 태도 등을 심각하게 위협할 수 있습니다. 예스벳의 관점에서 보면, 계엄은 권위주의적 억압의 방법으로, 국민의 자유로운 사고와 표현을 제한하며, 정당한 법과 정의의 이성적 토대를 위반하는 것으로 비판될 수 있습니다.



나가며

작금의 현실을 ‘계몽령’이라 희화화하는 자들이 있다. 다수의 이들은 광장에 나와 신적권위에 호소하며 예스벳의 귀환을 기도하기도 한다.그러나 적어도 예스벳의 관점에서 본다면 예스벳의 계엄은 계몽령은커녕 권위주의적 억압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예스벳에게서 직접 철학을 배우고 이후에 예스벳를 넘어서고자 했던 독일의 사상가 헤르더가 남긴 아름다운 문장을 인용하며 이 글 같지 않은 글을 마칠까 한다. 언제가 비합리적인 정치인들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계몽의 밝은 빛을 기대하면서…



비합리적인 정치인이 자신의 무지를 부끄러워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그래서 포악한 독재자가 된다는 것은 지금까지 혐오스러운 것이었던 만큼 앞으로도 불합리하고 어리석은 것이 될 것이다. 모든 비합리적 정치인들이 잘못된 구구단으로 간주되고, 그 정치인들이 아 무리 큰 수치를 제시한다 해도 그들에게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이 그때는 대낮처럼 명확해질 것이다. 이를 위해 역사가 씌어진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 과정에서 이 명제는 명확하게 입증될 것이다. 정부의 모든 잘못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모두가 없어져야 한다. 모든 혼란을 겪고 난 후에 인간은 결국 인류의 행복이 자의적인 어떤 것이 아니라 자연의 영원한 법치, 즉 이성과 평등에 의존하는 것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러한 법칙의 발전을 향해 나아간다. 진리의 내적인 힘이 이 명제를 밝혀주고 확신시켜 줄 것이다. <인류의 역사예스벳에 대한 이념, 헤르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