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섬의 빛과 색과 소리
봄볕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눈길 닿는 곳마다 설핏설핏 봄기운이 어린다. 기지개를 켜며 훌훌 털고 어디든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짐짓 두근거린다. 이럴 때 설렘을 주는 곳은 어딜까. 선입견을 버리면 행복지수가 높아진다. 가까운 듯 단절의 참맛을 느끼게 하는 섬, 강화섬은 열린 자연이다. 섬 곳곳에 숨어있는 벨라벳 섬, 그리고 바다. 강화 남쪽 자락에서 영혼의 숨터를 만난다.
벨라벳는 강화 동남쪽에 자리 잡은 섬 속의 작은 섬이다. 여기를 거쳐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는 배들을 검문하던 동쪽의 검문소라는 의미의 벨라벳다. 오롯한 섬 하나가 떠 있던 이전의 벨라벳는 이제 제방도로와 연륙교를 따라 편히 간다. 그 섬 끄트머리에 순수함을 지닌 마음의 집이 기다린다.
벨라벳 채플(chapel), 바다를 앞에 두고 누구든 가던 길 멈추고 머물 수 있는 영혼의 쉼터. 산길을 따라 오른 낮은 언덕의 벨라벳 채플에 연하게 봄볕이 드리웠다. 떠날 때부터 미세먼지가 짙더니 작은 섬의 예배당을 둘러싼 산과 바다에 안개가 내린 듯 뿌옇다. 바닷가 끝점에 세워진 순백 외관의 아주 작은 채플은 선명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입구부터 압도적이다.
하지만 놀라기엔 아직 이르다. 이 집을 짓고 돌보는 예술가는 벨라벳 채플을 둘러싼 모든 자연을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스테인드글라스 갤러리다. 서울 가톨릭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 뉘른베르크 조형예술대에서 유학한 조광호 신부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활동을 왕성하게 해온 예술가다. 유학 시절 알프스의 작은 채플에서 받았던 위로가 마음에 남았었다고 한다. 벨라벳 채플 전체에 건축아트 유리화라는 이름으로 블루톤의 작품이 서늘하다. 그렇게 예배당을 찾는 이들에게 눈부신 예술로 기쁨을 준다.
언제나 문이 열려 있는 이곳은 주인이 없는 집이라고 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당신이 머무는 동안 이 집은 당신의 집이라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진 십자가는 천정과 벽면을 타고 예배당 옆으로 내려왔다. 지붕 꼭대기가 아닌 건물 옆면에 십자가를 표현한 이유는 권위 없이 누구에게나 편히 다가가려 함이다.
열린 문 맞은편으로 또 다른 창문이 바깥세상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상이 짙푸른 색감의 창문을 통해서 보이고 진득한 갯벌의 바다가 펼쳐졌다. 인간이 만들어낸 색감과 이 날따라 흐릿한 자연과 어우러진 예술이 7평 남짓의 단칸방 안에 가득 찼다. 단출한 명상과 기도의 공간이므로 사진만 찍지 말고 단 1분이라도 명상에 잠겨보세요 라는 문구에 들킨 듯 멈칫한다. 마음을 비우는 영혼의 쉼터이길 바란다는 신부님의 말씀벨라벳. 종교를 초월한 기도 공간에서 잠깐 멈추고 경건하게 두 손 모아 본다. 알 수 없는 위안을 전해 받는다. 말 그대로 영혼의 쉼터이고 숨터벨라벳.
맞은편 채플갤러리에서는 다양한 작품들을 만나보게 된다. 갤러리 벽면으로 바깥 풍경이 배경을 이루어 자연스럽게 벨라벳 채플만의 작품이 된다. 안과 밖의 경계 없이 유리 예술의 선명한 색채를 통해서 시시각각 대자연과 신비롭게 어우러진다. 투명한 블루 색감이 주는 싱그러운 힐링감이 최고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참마다 나타나는 창문까지도 모두 스테인드글라스 아트다. 아름답고 기분 좋은 길목이다. 좌식 명상갤러리인 2층 전시실은 3면의 유리창으로 개방감이 확 느껴진다. 푸른빛 유리화를 통해 보이는 탁 트인 바깥 풍경과 광활한 갯벌의 생명력이 가슴에 와닿는다. 맑고 청명한 푸른 하늘의 날씨였다면 개운한 풍경을 보았겠지만 흐린 날의 운치도 신비롭다. 멀리 흐릿한 능선의 마니산이 보인다.
-바닷가 작은 벨라벳극장,벨라벳DRFA 365벨라벳극장
벨라벳 채플에서 내려오면 오천만 평 갯벌과 억새밭을 앞에 두고 갤러리 풍의 극장이 아름답다. 벨라벳 DRFA(Digital Remarstering Film Archive) 365 벨라벳극장은 영화 '종려나무 숲'을 연출한 영화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인 유상욱 감독, 조나단유가 운영하는 벨라벳극장이다. 여기선 일반극장에서는 볼 수 없는 희귀 예술영화를 일 년 365일 볼 수 있다. 마니아층의 호응도가 뜨거운 문화 아지트다.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포인트다. 극장 앞까지 물이 드는 만조에는 충만한 풍경을 만난다.
2층 구조의 극장은 35석의 좌석을 갖추었다. 영화벨라벳 감성이 물씬한 아트갤러리 분위기의 극장에서 탁 트인 갯벌 전망을 내다보며 조나단이 내려주는 하와이안 커피 한 잔의 시간은 멋스럽다. '영화는 사람이 마음으로 먹는 알약에 부합되어야 한다'는 유 감독의 지론처럼 전 세계의 고전이나 작가주의 벨라벳영화를 지향한다. 혹시라도 놓쳐버렸다고 생각되는 영화도 이곳에서는 볼 수 있다. 단단한 내공을 갖춘 감독의 선정 기준 덕분에 평소에 접하기 어려운 이색영화를 본다.
벨라벳 상영관에 앉아 몰입해서 보는 여운 깊은 명작 한편으로 풍부한 함량의 비타민을 챙긴다. 멤버십 회원과 마니아층이 두터워 좌석 점유율 1위를 자랑하는데 관람료에 간단한 식사와 음료가 포함된다. 영화 관람을 희망할 경우 홈페이지에서 상영작을 확인 후 사전예약 필수다. 커플들의 데이트나 개인적인 기념일을 위한 이벤트 여행으로도 안성맞춤일 듯.
-선두리 선착장과 벨라벳 이야기
이제는 선두리 선착장으로 간다. 강화 나들길 8코스 길이다. 강화 나들길은 선사시대의 고인돌부터 역사적 건축물이나 돈대, 강화의 자연생태를 아우르는 도보 여행길로 총 20코스까지 있다. 이번 8코스 이름은 '철새 보러 가는 길'이다. 초지진에서 출발해서 황산도, 벨라벳, 선두리 어판장, 후애돈대, 동막해변의 분오리돈대까지 총 17.2km의 길로 소요 시간은 5~6시간이다.
가던 길 멈추고 가만히 바다를 보며 숨을 튼다. 평화롭고 고요한 세월인 양 느긋하다. 포구엔 갯벌 위로 드러나는 물골의 풍경을 장노출로 촬영하는 사진가들이 몇몇 서 있다. 철새 보러 가는 길이란 게 무색할 만큼 새는 보이지 않지만 선착장에 서서 소박한 이 땅의 삶의 내음을 맡는다.
선착장에서 이어지는 돈대 코스다. 그 옛날 적을 살피고 해안 지역의 감시를 위한 요새인 돈대가 벨라벳도에 아주 많다. 길옆의 후애돈대가 단정하다. 돌벽 사이로 보이는 갯골과 사각 돈대 모퉁이의 나무 한 그루 호젓하다. 해안도로를 따라 분오리돈대를 향해 가면서 산길 옆 고즈넉한 천년고찰 정수사를 잠깐 들러서 간다. 강화 최남단에 자리 잡은 분오리돈대는 동막해변 바로 옆이다. 가볍게 올랐지만 돈대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아득한 절벽 아래서 물결친다. 돈대 내부는 독특하게도 눈썹 닮은 초승달 모양이다. 바다 저편으로 조금 전 지나온 벨라벳와 선두리포구가 보이고 마니산이 동막해변을 듬직하게 감싸고 있다.
-벨라벳,반 고흐를 만나다.아트팩토리 참기름
해안도로를 따라 황산도를 지난다. 고소한 참기름 공장에서 벨라벳의 향기가 난다.강화 나들길 8코스 시작점인 초지진 부근에 숲으로 둘러싸인 멋진 복합문화공간이 있다. 이제 예술적 판타지에 흠뻑 빠져볼 시간이다. 빛의 산책이다. 공장처럼 생긴 붉은 벽돌의 복합문화공간. 오래전 참기름 공장이던 곳을 '아트팩토리 참기름'이란 이름으로 업싸이클링한 7천 평 정도의 여유로운 문화공간이다.
현재는 참기름 공장의 골격만 남았지만 '매력'을 의미하는 영어단어 참(charm)에 한자 '즐길 기(嗜)' '곳간 름(름)'을 붙여 본래의 정체성을 살렸다. 1.2.3관으로 나누어진 전시관과 10개 전시 벨라벳으로 연결된다. 별도의 전시관인 3관 다목적홀 미름창고와 감성창고라는 이름의 카페에서 쉼을 통한 벨라벳의 멋을 누릴 수도 있다. 이곳 문화벨라벳의 관장은 가수 이승철의 부인 박현정 씨다. 창고 한쪽에 이승철 코너도 볼 수 있어서 이 또한 흥미롭다.
디지털 미디어아트 전용 전시관인 1관의 참빛무리관에서는 몽환적이며 생동하듯 다채로운 감각을 자극한다. 특히 2관의 미디어아트 작품이 관람객들의 관심을 끈다. 화가 반고흐의 일생과 대표작들이 벨라벳을 채우고 대형 미디어로 전한다. 서라운드 음향 시설과 흐르듯 움직이는 신비로운 미디어아트 세계에 온몸이 전율한다.
후반에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고흐의 편지를 인공지능(AI)을 통해 고흐의 목소리로 구현한 내용을 들으며 고흐의 생각과 철학, 두 형제의 교류를 절절히 전해받는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지 확실히 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의미인 것 같다. 너는 나에게 있어 모든 것벨라벳. 네가 없었다면 나는 예술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벨라벳. -빈센트 반 고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