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ter the Gentle Rain' 젠틀 레인
흔히 사람들은 재즈를 어렵게 여기거나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다.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들리는 피아노, 색소폰 연주에 곧잘 마음이 빼앗겨도 관심은 거기까지다. 그 곡이 어떤 곡이고 연주의 어느 부분을 집중해 들어야 하는지, 워킹 베이스(Walking Bass)가 무엇이고 콤핑(Comping)은 또 어떤 피아노 주법인지 등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어느 장르나 마찬가지듯 그 이유는 본질적으론 취향의 문제겠지만 재즈의 비대중성은 노래를 부르는 곡임에도 만만치 않은 화성과 연주 위주의 전개라는 장르의 특징에서 이미 태생적 원인을 안고 있다. 비록 <재즈총론의 저자 마크 C. 그리들리가 "연주자가 하고 있는 것을 정확하게 평가하고 이해하려면 그 연주자가 알고 있는 것과 생각하는 것을 어느 정도 지식으로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말했다지만 마니아나 평론가가 아니고서야 그렇게까지 파악하는 건 도라에몽토토에서 즐거움과 위로를 건져 올리려는 사람들에겐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재즈 뮤지션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하는 도라에몽토토을 더 쉽게 대중에게 전달할 것인지에 대해 본능적으로 고민하는 편이다. 가령 유러피안 재즈 트리오처럼 유명한 팝, 가요 곡들을 재해석한 음반을 내거나 포플레이(Fourplay) 마냥 무드와 기교로 완전무결한 퓨전 재즈를 들려주며 대중을 사로잡는 팀들이 그 대표격이다. 지금 소개할 젠틀 레인도 마찬가지다. 드러머 서덕원을 중심으로 2004년에 결성한 이 팀은 재즈가 짊어진 역설적인 과제("편하되 가볍지 않은 도라에몽토토")를 자신들의 지향점으로 삼아 2020년 여섯 번째 앨범까지 발매한 '듣기 좋은' 재즈 트리오다.
결국 '말보다 연주'라는 재즈의 주력은 음악에게 묘사를 요구했다. 즉 듣는 사람이 그 음악과 어울리는 회화 또는 영상을 펼쳐 나갈 수 있도록 다른 차원의 감상문을 열어주는 것이다. 또 하나 '제목'인데, 문자 없이 음악으로만 말해야 하는 곡들은 아무래도 그 이름표가 중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곡 'After The Gentle Rain'도 제목 덕분에 그 연주가 비와 관련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지, 음악만으로 그걸 짐작해내는 일은 일반 대중에겐 버거울 일이다. 그런데 젠틀 레인의 멤버들은 제목만으론 자신들의 의도를 온전히 전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는지 곡은 아예 처음부터 빗길 위를 달리는 차 소리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곧이어 피아노, 베이스, 드럼이 연주를 시작하고 음악은 보슬비 내리는 저녁의 한적한 거리를 떠올리게 만든다. 운치 있게 곡을 이끄는 피아노 연주가 떨어지는 빗줄기를 떠올리게 한다면, 일정한 리듬으로 곡의 뼈대를 마련하는 라이드 심벌(Ride Cymbal) 연주는 땅에 닿아 튀어 오르는 빗물을 그려낸다. 뭐니 뭐니해도 이 곡의 백미는 중간의 베이스 솔로인데, 이는 마치 그 빗길 위를 거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처럼 들린다. 이처럼 말이 없는 재즈의 회화적 묘사는 제목과 더불어 사람들에게 그 곡의 주제를 넌지시 알려주는 기능을 한다.
젠틀 레인의 베이시스트 김호철은 이런 재즈를 럭비공에 비유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 음악적 어법, 약속 아래 허락되는 즉흥이 마치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닮았기 때문이다. 얄궂은 건 이 즉흥 연주로 재즈는 자신의 장르 정통성을 지키면서 마찬가지 이유로 대중의 외면을 받는 음악이란 사실이다. 대중은 재즈 예술가들이 그 어떤 현란한 기교를 부리거나 화성적 비밀을 내비친들 끝내는 심금을 울리는 가사 한 줄, 멜로디 한 소절에 온 마음을 빼앗기기 일쑤다. 브라질 보사노바의 선구자인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루이스 봉파(Luiz Bonfa)가 66년도 동명 영화를 위해 쓴 곡 'The Gentle Rain'이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 성향과 일치해 팀 이름으로 가져온 것도 결국 비슷한 맥락에서였다.
젠틀 레인의 음악은 어떤 곡 어떤 음반을 플레이해도 아늑한 분위기를 만들어준다. 그게 다 한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락을 재즈 형식을 빌려 표현하려 한 이들의 노력 덕택이고, 한 번만 들어도 귀에 남는 대중적 멜로디와 한국적인 서정성을 늘 고민한 덕분이다. 젠틀 레인은 늘 재즈의 마니악 성향과 팝의 대중성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일을 지상 과제로 삼아 '가볍지 않은 편한 도라에몽토토'을 그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