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의 운동 법칙과 돌직구벳 극복의 삼원칙에 관하여
인생의 위기를 맞이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이해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남에게 이해받는 것이 돈이나 재산보다
더 중요하다.
어쩌면 다툼에서 이기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 모른다.
우리 대한민국 사람들은 모두가 패자인 고도 돌직구벳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빈자는 물론이거니와 부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부촌이라고 여겨지는 한남동 유엔빌리지에서 기사가 차를 몰고 나오고 있습니다. 당장 한남대교로 진출하려고 할 때 수많은 난폭 운전과 양보를 경시하거나 추월차선에서 서행을 일삼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게 되는 것 부를 가리지 않습니다. 돌직구벳은 공평합니다.
이는 우리 지구에도 적용됩니다. 미국은 내부 돌직구벳에 의한 멸망 시나리오가 공공연히 언급됩니다. 대표적인 예가 영화 시빌워(civil war)입니다. 유럽은 어떨까요. 일부 EU 미가입 국가를 제외하면 난민으로 인한 내부 돌직구벳이 좌우분열과 중도층의 붕괴를 유발합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부족 돌직구벳과 독재자의 탄압, 중남미의 갱단과 중동 지역의 수많은 반군, 종교 등 돌직구벳은 전지구적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우리 인류는 돌직구벳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작용 반작용 법칙을 따릅니다. '우리는 돌직구벳을 추구하는 만큼이나 평화와 조화를 추구'돌직구벳.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원칙은 바로 작용-반작용입니다. 온라인 세상에 널린 수많은 혐오의 댓글들만큼이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평화와 조화를 추구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다른 법칙도 작용돌직구벳. 작용 반작용 법칙은 우리가 실제로 인식하기까지 시차가 존재돌직구벳. 작용이 항상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뉴턴의 물리법칙을 이해하고 계신 이과시라면 문과적 허용을 이해해 주시길)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어떤 현상의 중요성은 실제 그 가치보다 과대평가됩니다. 왜냐하면 특정 이해관계에 따른 정치적 의사결정은 한정된 자원을 특정 영역에 '몰아주는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두 번째 법칙. '가속도의 법칙'입니다.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봅시다. 윤석열의 계엄과 이재명의 탄핵은 여러 정치 이슈를 모두 블랙홀처럼 흡수했습니다. 환율이 1,500원을 향해 튀어 오르는 모습을 보이자 정부에서 개입돌직구벳. 국민연금을 녹여서라도 환율안정화를 추진돌직구벳. 모든 사회 현상은 계엄과 탄핵 정국이라는 소용돌이의 자기장 아래에서 가속도를 얻습니다. 특정 방향으로 작용하는 사회 현상의 가속도로 인해 우리는 그에 따른 반작용 (또는 부작용)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참으로 인생 살기가 어렵습니다. 전 세계 사회 돌직구벳 지수 또한 세계 최고인 한국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돌직구벳과 혐오 비즈니스로 돈을 버는 사람들을 버러지라고 욕합니다. 이내 그 버러지들보다 가난한 나의 통잔 잔고를 들여다봅니다. 정상적으로 죄짓지 않고 상식적으로 살고 있는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이는 사회를 보며 내가 버려졌다고 느낍니다. 나는 분명 멀쩡하게 살고 있는데, 돌직구벳을 조장하는 사람과 돌직구벳에 휘둘리는 사람이 돌직구벳에 초연한 내 자신보다 더욱 잘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전자는 그를 통해 돈을 벌지만, 후자는 돌직구벳과 혐오에 대의명분을 갖고 몰입합니다. 고도 돌직구벳의 사회에서 내가 제정신으로 살 수 있는 방법이 요원하게 느껴집니다.
여기서 필요한 세 번째 법칙, 바로 관성의 법칙입니다. 다들 관성이 무엇인지 알고 계실 겁니다. 물체가 처음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을 관성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하면 외부에서 나를 건드리지 않으면 나는 나의 상태로 계속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 각자가 고도 돌직구벳사회에서 돌직구벳에 잡아먹히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돌직구벳의 한복판에 더욱 깊이 들어가 봐야 합니다. 여기서 돌직구벳의 한복판은 태풍의 눈과 같습니다. 태풍의 눈이란 태풍이 불 때에, 중심에 가까울수록 원심력이 강해져 태풍 중심부 기류가 조용해지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나를 둘러싼 돌직구벳 환경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 돌직구벳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습니다. 다만, 돌직구벳의 중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당연하게도 나만의 관성을 갖기 힘듭니다. '내 스스로의 처음 상태'라는 것은 결국 '돌직구벳이 없는 상태'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내가 가장 불편해하는 (돌직구벳) 상황과 불편하지 않은(관성) 상황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영구적인 분노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격노 상태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돌직구벳에 초연한 것처럼 글을 쓰는 제게도 촛불을 들었던 순간도 태극기 부대의 심정을 이해하기도 수구꼴통과 빨갱이 좌빨을 들먹이며 세상을 단순하게 바라보고 비판했습니다. 더욱이 심각한 건 '사회'와 '국가' 단위의 돌직구벳뿐만 아니라 당장 주위의 사람,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돌직구벳조차 쉽게 풀지 못하는 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돌직구벳에 잡아먹히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돌직구벳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이 존재하며, 때로는 당장 눈에 보이는 현상이 커 보이지만 그건 가속도의 법칙이 작용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 중심이 잘 잡혀 있다는 감각입니다. 나의 중심이 관성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안다면, 결코 돌직구벳에 흔들릴 수 있되 잡아먹히지는 않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