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그 안으로 들어가 봅시다. 가족 안을 민주주적 시선으로 살짝살짝 걸어보는 겁니다. 맨 먼저 들여다 볼 사람은 엄마입니다. 4년 전 일기를 꺼내어 다시 써봅니다.
작은 애는 지 엄마를 졸졸 쫓아다녔습니다. 어찌된 게 키가 딱 엄마 중간일까요? 애 얼굴이 엄마의 엉덩이에 붙었습니다. 밥솥으로, 인덕션으로, 식기세척기로…. 엄마가 걸음을 종종대며 옮길 동안, 작은 애의 발 또한 방향을 열심히 옮겨대며 앞으로 나아갑니다. 계속 그러면 엄마가 방구 낀다? 엄마의 의도는 영 반대였겠지만, 아이에게 그 말은 더 달싹 붙으라는 말과 다름없습니다. 까르르.
그러다 쿵. 아앙~ 역시나입니다. 씽크대 모서리에 부딪혔습니다. 이런 광경의 끝은 언제나 울음입니다. 엄마가 아이의 얼굴을 손으로 감쌉니다. 그러니까! 엄마가 다친다고 했지? 말은 호통인데, 말투와 몸짓은 어르달램입니다.
이 광경을 적당한 거리에서 계속 지켜보던 제 입가가 올라갑니다. 이게 바로 아빠더킹+카지노일 겁니다. 울음이든, 땡깡이든, 그저 내 딸이기에 웃음이 나는 것. 신이 있다면 아빠더킹+카지노를 닮지 않았을까요?
스스로의 미소를 알아차리며 흐뭇해집니다. 하지만 잠시였습니다. 궁금증이 일었습니다. 왜 '엄마더킹+카지노'라는 말은 없을까? 이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궁금증은 이내 반성으로 돌아왔거든요.
제가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더킹+카지노는 넉넉함과 여유를 필요로 한다는 것.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는 더킹+카지노가 나올리 없습니다. 폭소와는 다르게 더킹+카지노에는 여유가 필요합니다. 다른 이와 떨어져서 혼자 무엇인가를 되새김질할만한, 그것이 꼭 이성적일 필요는 없을지라도, 음미할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합니다.
시간뿐일까요? 공간으로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감촉 언저리에 닿을만한 여유적 공간. 정확히 말하자면 닿기만 할, 팔을 뻗어 꼭 안겠다는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결단을 하지 않는 한 그저 대상과 닿기만 할 물리적 거리가 필요합니다.
다시 질문으로 돌아갑니다. 왜 ‘엄마더킹+카지노’는 없을까요?
아내에게는 적당한 거리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항상 딸아이와 부대낍니다. 딸애의 행동 하나하나를 음미하고 되새길만한 여유가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가끔은 있었을 겁니다. 가끔. 하지만 말 그대로 가끔일 뿐입니다.
폭소스러운 남자들이 여자들의 미소에 반해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둘 사이에 태어난 딸아이로 미소를 짓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그 남자들입니다. 많은 수의 여자들이 미소를 잃고 폭소를 떠안습니다. 미소에 반해 미소를 얻은 그들과, 미소를 잃은 채 폭소를 얻은 그녀들. 미소와 폭소의 불균형만큼이나 가족 내 양육은 어그러져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