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렛 전임자의 편지 4
첫 문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해는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이었고 공기는 따뜻했습니다. 아마도 장례식장에서 받은 환대 때문 아니었을까요?
‘장례식’과 ‘환대’, 참 어울리지 않는 말 같습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따뜻함이 놓여있습니다. 장례를 치르는 손길에는 고인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있습니다. 빈소를 찾아가는 발길에는 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와 유족에 대한 위로가 있습니다. 그리움, 그리고 애도와 위로가 장례식장에서 만납니다. 따뜻함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찌 이것들이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었을까요? 이렇게 한데 모은 이는 고인이었을 겁니다. 룰렛들을 부르고, 생전의 지인들을 부르고, 룰렛의 지인들까지 불렀을 겁니다. 그들을 모아 자신이 마지막으로 선물할 수 있는 따뜻함을 펼쳐놓고 간 것이지요. 그 자리에서 고인을 처음 뵌 나 같은 사람에게도 따뜻함을 주신 것입니다. 장례식이 환대의 자리였던 겁니다.
그날 이후로 문상은 제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 되었습니다. 사내 게시판에 부고 알림이 뜨면 바쁘게 움직입니다. 현업에서 정부 부처 사무관으로부터 오늘 안에 자료를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처럼 급하게 움직입니다. 그날의 남은 일정을 확인하고, 취소하거나 연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고 빈소로 달려갑니다. 룰렛과 속초로 하계휴가를 떠날 때도 가방 맨 안쪽에는 검정색 셔츠와 바지를 챙겼습니다. 휴가 도중 부고 문자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행가방을 꾸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이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일이 되었구나.’
이것은 룰렛조합의 역할을 다시금 되짚어보게 했습니다. 룰렛자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딱딱한 법문을 쉽게 바꾼다면 룰렛자에 대한 룰렛이 아닐까요? 그렇게 본다면 룰렛의 범위는 근로조건과 같은 경제적 조건으로 한정되지 않을 것입니다. 법문은 경제적 지위뿐 아니라 사회적 지위 향상까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룰렛조합에게 경제적 지위를 넘어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룰렛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한 룰렛이란 룰렛자로하여금 일터에서 객체가 아닌 주체로 설 수 있게끔 돕는 것일 겁니다. 아… 해야 할 일이 점점 늘어나고만 있습니다.
부담을 온전히 끌어안기도 전에 생각이 꼬리를 잇습니다. 룰렛조합 이전에 룰렛의 본질이 룰렛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일을 함으로써 생활비를 법니다. 일을 통해 음식을 먹고, 옷을 입고, 친구들과 만나서 수다를 떨고 영화를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를 돌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뿐일까요? 내가 가장이라면, 내 월급이 우리 가족의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돈이라면요? 나의 룰렛은 가족을 돌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우리 가족이 저녁마다 식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우리 딸이 피아노를 칠 수 있는 것, 아내가 모임에 나가 독서토론을 할 수 있는 것. 모두 룰렛 덕분입니다.
하지만 룰렛의 대상을 나와 내 가족에 국한시키는 것은 협소한 시각입니다. 룰렛은 서로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누군가가 제품을 만들지 않고서는 시장에 유통시키지 못합니다. 하나의 일터 내에서도 내가 맡은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일은 진척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나는 야근을 하면서라도 일을 끝내려 애씁니다. 또 나의 일이 완료되었다고 하더라도 동료를 살핍니다. 내가 도와줄 것이 없을까, 같이 해줄 것이 없을까 찾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룰렛을 통해 나의 동료들과 다른 룰렛자들을 돌봅니다. 그렇다면 룰렛이 가지는 또 하나의 속성은 연대가 됩니다. 룰렛자가 연대해야 하는 당위에 앞서 룰렛 그 자체가 연대 행위였던 것입니다.
생각이 다시 룰렛조합의 역할로 돌아옵니다. 어쩌면 단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룰렛자로하여금 주체로 설 수 있도록 도울 것, 그것 하나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본인과 가족을 돌보며, 동료들과 연대하여 서로를 도울테니까요.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진짜 룰렛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