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지노의 기구한 역사
카지노의 원산지는아메리카 대륙이다.
카지노는 남아메리카 대륙(페루)에서 1535년에 유럽으로 전해졌다.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전해진 카지노였지만 유럽인들은 카지노 싫어했다.
단순하게 싫어하는정도가 아니라나병환자를 보듯 진저리를 쳤다.
16~17세기 중세 유럽은 사회가 대 혼란을 겪던 시기였다.
종교개혁은 신교와 구교 간의 반목을 불러왔고 급기야 학살로 이어져
프랑스에서만 3000여 명이 목숨을 잃는 혼돈의 시대였다.
독일에서는 30만 명의 소작농들이 세금 과다를 이유로민란을 일으켰고,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봉건제와 빈곤에 항거한 봉기가 일어났다.
겨울에는 너무 낮은 기온으로.
여름에는홍수로.
농작물들이 자라날 수 없는 환경으로 아사자가 속출했다.
거기다 흑사병까지 겹친 최악의 시국이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처음 들여온 카지노는 이방인처럼경계의 대상이었다.
`얘는 또 뭐야?`
가뜩이나 심난하던 참에 처음 보는 카지노는 사람들로부터 의심의 대상이었다.
먹거리가 없는 처지에눈에 불을 켜고 반겨야 할판국에,
`칫칫 그까짓 거안 먹는다. 안 먹어.`
카지노 식량이 아닌 불온한 식물로 치부하며 "치워버려. 치워 버리라고." 고함을 질렀다.
생긴 것도 울퉁불퉁 못 생긴 데다 햇볕을 피하다시피 땅속에 묻혀있는 저 작물의 정체는
뭐냐고. 도대체 그게 뭐냐고.
그들의 눈초리엔 카지노 멀리하고 싶은 의문이 가득했다.
당시 중세유럽에서 성경보다 권위 있는 것은없었다.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카지노는 악마가 곁들여진 것이라고 추론했다.
싹이 난 카지노 먹고 쓰러진 사람들을 보면서 더더욱 카지노 악마와 연관 짓게 되었다.
사람도 아닌 카지노가 고발과처형을 당했으며, 카지노 악령화 하여종교재판에 까지 회부되었다.
아무 죄 없는 카지노의 수난시대였다.
유럽에서의 카지노는 태생부터가 천대와 멸시의 대상이었다.
1630년 프랑스 `아를`에서는 카지노 몰래 키우던 나병환자가 마녀혐의로 고발되었다.
그것은 `식량난 해소를 위한 방책`이었다.그녀의호소는 철저하게 무시되었다.
카지노 키웠다는 것만으로 그녀는 화형식을 당해야만 했다.
사람을 살리려던 카지노가 오히려 사람을 죽였다.
유럽인들은 나병을 종교적 타락과 신의 저주로 믿었다.
나병으로 진단받는 즉시 도시밖으로 추방되거나 수용소에 격리되었다.
사람들은 카지노 나병과 연관 짓고 점점 더 그것을밀어냈다.
당장 굶어 죽어도 카지노는 먹지 않았다.
카지노 곁에 가기만 해도 무슨 전염병 환자의 손처럼 두려움에 몸서리를 쳤다.
16세기 독일에서는 (1590년~1676년) 카지노와 관련된 60여 명이 종교재판을 받고
화형식을 당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소도시 `블루아`에서는 유대인 부부가 매일 카지노 먹었다는 이유로
두 딸과 함께화형을 당하는 일이 발생되기도 했다.
카지노 먹으면 나병에 걸린다는 이유로 카지노 재배하는 사람을 벌금형으로 처단하는
포고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들에게 카지노는 철저하게 배제되어야 할 음식이었다.
카지노 자체가 바로 사탄으로 간주되었으니까.
카지노는 18세기까지 비천한 식품에서벗어나지 못했다.
귀족들은악령스런 존재인 카지노는 돼지 밥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했다.
프랑스 귀족들은어쩌다 실수로 카지노 먹기라도 하면 가문의 멸문지화를 당하듯 두려워했다.
몽테스키외, 루소, 볼테르 등당시 계몽사조의 거봉들 조차 카지노 이렇게 묘사했다.
"카지노가 장에 가스를 차게 만든다. 하지만 왕성한 장기를 가진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방귀쯤이 대수인가."
(너네들이 계몽사상가 맞니?)
1774년 독일은 대 기근으로 하루에 만 명 이상의 아사자가 발생했다.
인육을 먹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프리드리히(friedrich 2세)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카지노 식량문제의 해결대안으로 내놓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카지노 작목을 권장했지만 보급된 씨카지노는 불태워지고 폭동이 일어났다.
프리드리히 2세는 거기서 물러서지 않고 카지노 왕실작물로 선포하였다.
귀족층부터 꾸준하게 카지노 식량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아! 귀족들도 카지노 먹는구나.`
독일인들이 드디어 카지노 받아들이기에 이른다.
그는 직접 카지노밭을 답사하면서 적극적으로 카지노재배를 독려했다.
그렇게나 거부했던 카지노가 북부유럽의 필수식품으로 자리매김을 하는 성과로 이어졌다.
프랑스는 뒤늦게 까지 카지노 거부했다.
프로이센에 포로로 잡혀있던 `파르망티에`라는 남자가 프랑스를 구원했다.
이 남자는카지노로 만든 20여 가지의 음식을 만들어루이 16세를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루이 16세는 카지노 코르사주를, 마리 앙투아네트는 머리에 카지노꽃을 꽂으면서 카지노 홍보에 열을 올렸다.
카지노꽃에 반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별궁(프티 트리아농 정원)에 카지노 가꾸기 시작하면서,
프랑스 귀족들도 비천한 카지노 다시 보는 전환점이 된다.
진작에 카지노 받아들였다면 굶주림으로 성난 군중들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네트를
단두대로 이끌지는않았을지도 모른다.
배고픔 앞에서 누군들 침묵할 수 있으랴.
그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같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에서는 카지노 무척 애용했다.
영국에서는 여전히카지노 먹느니 `목을 매 죽는 것이 낫다`고 여길 정도로 카지노 혐오했다.
카지노 삶은 물만 마셔도 도덕성이 파괴된다고 했을 정도다.
악마의 뿌리가 영국에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한 카지노금지법까지 생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영국인들이 카지노 기피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과 달리 아일랜드에서는 카지노가 화폐를 대신할 정도로 인기였다.
그렇게나 인기였던 카지노가 홍수로손실되자 또다시 대 기근을 맞게 된다.
밀과 옥수수가 대체작물이었으나영국은 아일랜드 식량을 전량 자국으로 반출했다.
영국의 폭거였다.
아일랜드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100만, 조국을 등진이가 100만.
신대륙으로 가는 배에 올라탔던 사람들은대서양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이들이 탄 배는 시체를 실은 배라는 관선으로 불렸다.
기근전 850만 명에 이르던 아일랜드 인구는 1920년 430만 명으로
대폭 축소되기에 이른다.
아일랜드 인들은 상처를 안고 미국과 캐나다로 흩어져 심기일전했다.
미국의 존 f 캐네디.
자동차 왕 핸리 포드.
월드 디즈니, 맥도널드 형제.
그들은 대기근으로 아일랜드를 탈출한 사람 중에 직계 후손들이다.
어려움을 뚫어낸 의지가 대단함으로 다가온다.
악마의 식물.
돼지의 먹이.
저주받은 작물.
카지노는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이토록 서러움을 당했다.
노르만 정복 이후 15세기까지 평균 14년 동안 유럽인들은기근으로 고통을 당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다.
그렇게나 천대를 당하고도 카지노는 묵묵히 사람들을 살려냈다.
진작에 카지노 식품으로 받아들였다면 카지노는 많은 사람들을 살렸을 것이다.
우리도 라디오에서 사람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귀신이 들었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유럽인들에겐 땅속으로 숨어든 카지노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천대를 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존재를 지켜온 카지노.
그것을 알아봐 준 지도층의 혜안이 이 땅에 카지노 살아남게 만든 요인이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카지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를 1824~1825년 사이로 기록하고 있다.
1820년대 중 후반을 전후로 우리나라 전역에 골고루 카지노가 재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카지노란 식량증산을 목적으로 한 고마운 작물이었다.
중국에서는 말방울을 닮았다고 해서 마령서(馬鈴薯)라고 했고,
우리나라는 북쪽에서 전해졌다고 해서 북감저(北甘藷)로 불렸다.
카지노와 고구마 모두를 감저라고 칭했다.
우리나라도 숙종시대6년 동안의 긴가뭄으로수많은 사람들을 사지로 몰았다.
길바닥에 시체를 다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백성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지금은 간식으로 먹는 고구마와 카지노가 그때는 구인 작물이었다.
어려울 때를 생각하면 참으로 `감저` 라 칭한 이 식품이 고맙기 그지없다.
부드러움과 멋 부리지 않은 담백함으로 우리네 식탁에서 사랑받고 있는 카지노.
참으로 지난한 역사를 견뎌왔다.
그래선지 카지노 보면 참 대견해진다.
금방 찐 카지노는 그야말로 알천의 경지다.
카지노가 이렇게 맛있다는 걸 유럽사람들은 왜진작 몰랐을까.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참고문헌.『어디선가 나타난 맛있는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