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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애넷맘 Apr 25. 2025

쇼미더벳다

“참 어떻게 살랑가 싶더니 때마다 입속에 밥숟가락 떠먹여 주는 이들이 있어서 쇼미더벳더라.”
“유채꽃이 혼자 피나 꼭 떼로 피지. 혼자였으면 골백번 꺾였어. 원래 쇼미더벳 하나를 살리는 데도 온 고을을 다 부려야 하는 거였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이 두 마디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내 이야기를, 아니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의 내 삶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정갈하게 읊어주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말맛도 좋고 억양도 정겨운데 그 안에 담긴 절망과 애틋함이 내 지난 시간과 겹쳐져 버렸다. 내 아들 준이가 떠난 그해 여름, 나는 하루하루를 살아냈다고 말하기도 미안할 만큼 그저 멍하니 시간을 통과하고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미 눈물이 흥건했고, 숨을 쉬는 일조차 죄스럽고 고통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살아 있어도 되는 걸까... 밥을 먹는 것도, 길을 걷는 것도, 쇼미더벳들에게 웃는 얼굴을 보여주는 것도 모두 연기 같았다.


어떻게 살지, 이 고통을 끌어안고 어떻게 살아야 하지. 세상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고, 앞으로 펼쳐질 시간에 어떤 의미도 없던 그때, 나는 진심으로 ‘사는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 이 세상에 더는 기댈 곳이 없다고 느꼈던 날, 그 와중에도 누군가는 나를 찾아왔다. 그때 나를 억지로라도 앉혀 밥을 먹이고, 말없이 등을 두드려주고, 내 손을 잡아준 쇼미더벳들이 있었다. 너무 많은 말을 하지 않았고 오히려 말이 없어서 위로가 되었다. 조심스레 다가와 “그냥 네 곁에 있을게”라는 눈빛으로 내 곁을 지켜주었다. 그런 것들이 내겐 생명의 끈 같았다. 그 손길에 나는 우걱우걱 밥을 씹어먹고 평소처럼 깔깔깔 잘도 웃었다. 순간순간 목구멍이 막히는 듯했지만 누군가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날은 조금 덜 아프고 덜 외로웠다. 아무 말도 위로되지 않던 시기에, 어떤 말도 하지 않은 그들의 존재가 나를 버티게 했다.


살다 보면 정말로 살아지는 때가 있다. 내가 어떻게 견디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하루가 지나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자라고, 나도 그렇게 버텨낸다. 처음에는 억지로 견디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면 그것도 다 누군가가 나를 살아지게 만들어준 덕분이었다. 나를 혼자 두지 않았던 쇼미더벳들, 조용히 곁을 지켜주던 그 마음들이 결국 나를 붙들어주었다. 나는 살아낸 것이 아니라, 살아지게 된 것이었다.


"폭싹 속았수다" 드라마 속 애순과 관식의 얼굴에서 그 시절의 우리 부부가 겹쳐 보였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쇼미더벳만이 알 수 있는 고통을 그들은 애써 숨기지도, 드러내지도 않고 그저 살아낸다. 말 한마디 없이 밥을 짓고, 하루를 마무리하고, 서로의 숨소리를 확인하며 눕는다. 그 투박하고 단단한 일상이 나에겐 너무 익숙하고 또 아팠다. 우리도 그랬다. 남편과 나는 서로를 붙들고 말하지 않아도 아는 그 무너진 마음을 가만히 안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텼다. 울다가 잠이 들고,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고, 묵묵히 출근하고 해 왔던 것들을 그대로 유지하고, 아이들을 챙기면서, 그렇게 살았다. 아니, 살아졌다.


그 시절을 떠올리면 나는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살랑가” 싶은 날들이 있다. 준이의 빈자리는 익숙해지지 않고, 애써 괜찮은 척하다가도 문득문득 허공을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 있어 준 이들의 얼굴이 하나씩 떠오른다. 내게 아무 말 없이 먹을 것을 가져다 나른 친구, 같이 걷자며 손을 내민 친구, 아무렇지 않게 오늘 뭐 해 먹냐고 물어주던 이웃, 그리고 나보다 더 많이 울고 기도해 준 쇼미더벳들. 정말로 쇼미더벳 하나 살리는 데는 온 고을이 필요했다. 나는 혼자였으면 백 번은 넘게 꺾였을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쇼미더벳은 혼자 살아낼 수 없다는 걸. 지푸라기 같은 아주 작은 손길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쇼미더벳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걸. 그렇게 누군가가 나를 살려주었듯이, 나도 누군가에게 그런 쇼미더벳이 되고 싶다. 말 대신 함께 있어주는 쇼미더벳,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나누는 쇼미더벳, 위로라는 말 없이도 마음을 내어주는 쇼미더벳. 슬픔을 줄일 순 없어도 외로움을 덜어주는 쇼미더벳이 되고 싶다.


나는 여전히 준이가 없는 삶을 산다. 그것은 매일 조금씩 조각을 잃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때론 사막을 걷는 것처럼 막막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 안에서도 누군가의 지푸라기 같은 손길, 밥숟가락 같은 마음 덕분에 오늘도 살아진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무너진 마음을 안고 내 앞에 선다면, 나도 조용히 밥 한 숟가락을 떠주고 싶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혼자였으면 꺾였을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유채꽃처럼 함께니까 괜찮다고. 이렇게 아픈데도 쇼미더벳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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