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존감을 지키며 가장 우아하게 설득해야 가능한 종합예술_건축
크랩스는 선택받기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창조자다. 회화는 작가가 그림을 그린 후,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소비되기를 기다린다. 음악, 영화, 문학도 모두 창작이 먼저고 선택은 그다음이다. 하지만 건축은 반대다. 크랩스는 먼저 누군가의 선택을 받아야만 창작을 시작할 수 있다. 즉, 설계는 창작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설득에서 출발한다.
어떤 예술가와도 다른 출발점 때문에 크랩스는 예외적 창조자이며 불완전한 창조자이다. 타인의 판단에 의존해야 하는 유일한 존재. 이 점에서 크랩스는 창조자이면서 동시에 설득자이며, 철학자이면서 연기자다. 그리고 영업사원이다. 그래서 고상한 척하며 우아한 척하는 엘리트 벨트를 맨 위장술을 가져야 한다. 이 중 하나를 포기하는 순간 그 크랩스는 폄하되기도 하고, 최고의 철학자가 되기도 하고, 예술가가 되기도 한다.
건축은 결코 혼자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늘 누군가의 땅, 자본, 목적을 기반으로 구체화되며, 그 어떤 예술보다도 사회적 조건에 깊이 얽힌다. 이 사회적 얽힘의 최전선에 있는 존재가 바로 ‘크랩스’다. 그들은 경제와 정치, 관습과 제도, 언론과 여론, 예산과 기호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조정하고 설계한다. 바로 이 점에서 크랩스는 누구보다 창조적이지만, 누구보다 구조적으로 ‘을(乙)’일 수밖에 없다. 그 어떤 창조 분야도 이처럼 발주자의 허락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예산이 끊기면 멈추고, 발주자가 방향을 바꾸면 철학도 수정된다. 이 현실에서 크랩스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설득’이다. 고상한 설득, 절실한 설득, 때로는 굴욕적인 설득.
더구나 실현의 과정 또한 험난하다. 제도와 규제가 방향을 흔들고, 만들고 실천할 최전선의 시공사들과 건설하는 이들이 '설득'되지 않으면 결과는 참담하고 그런 참담함은 온전히 크랩스에게 돌아와 그를 평가하는 결과로 남아버린다. 어느 과정 하나 순탄한 것이 없는 셈이다.
“크랩스는 항상 오디션을 기다리는 배우와 같습니다. 건축주는 우리의 심사위원이고, 우리는 끊임없이 연기합니다. 내가 어떤 크랩스인지, 어떤 색깔을 가졌는지를 말하고, 또 거기에 맞춰 나 자신을 조금씩 변형합니다.” 이 말은 크랩스의 현실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설계란 설득의 결과이며, 설득은 관계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나 권력의 비대칭 구조 위에 놓인다. ‘을’의 위치에서 말과 도면, 태도와 이미지로 상대를 감동시키지 못하면,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은 크랩스들을 다중적 역할 수행자로 만든다. 발주자의 성향에 따라 예술가가 되기도 하고, 실용주의적 전문가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고객 중심 서비스직’처럼 자신을 낮추기도 한다. 에르빈 고프만(Erving Goffman)의 ‘자아의 연극적 표현’ 개념은 이 상황을 잘 설명한다. 그는 우리가 사회적 삶을 살아갈 때마다 무대 위 배우처럼 역할을 수행하며 ‘신뢰받을 수 있는 정체성’을 형성한다고 말했다. 크랩스는 그 무대에서 시시각각 역할을 바꾼다. 이 역할 수행은 전략이자 생존의 방식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게 만든다. 이 공간은 나의 언어로 설계된 것인가? 아니면 발주자의 욕망을 해석하고 맞춰진 결과물인가?
라캉(Jacques Lacan)의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듯, 크랩스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존재다. 발주자의 선택은 단지 프로젝트 수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설계 언어, 철학, 존재가치가 ‘인정’ 받았다는 표식이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결국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되며, 이 인정이 부족할 때 크랩스는 불안해진다.특히 젊은 크랩스일수록 자신의 철학과 시장 사이에서 어떤 균형점을 잡아야 할지를 끊임없이 고민한다. 이 불안은 때때로 창조력을 자극하지만, 많은 경우 자기 검열과 자기 타협으로 귀결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을 것 같아서…”라는 말은 수많은 크랩스의 입에서 반복되는 슬로건이 되었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은 결국 자기 확신의 근거가 되며, 이 인정이 부족할 때 크랩스는 불안해진다.
현대 크랩스는 단지 도면을 넘기는 설계자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매스미디어의 장에서 홍보하고, 전시회를 기획하며, 출판과 강연을 통해 ‘자기 이미지’를 구축한다. 그것은 단순한 자기표현이 아니라, ‘선택받기 위한 전략’이다. 설계를 위한 설득은 이미 대중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SNS는 디지털 시대 크랩스의 첫 번째 포트폴리오가 되었고, 전시는 ‘미래 프로젝트를 위한 투자’로 간주된다. 오늘날 건축 설득의 범위가 얼마나 확장되었고, 설득은 이제 물리적 도면을 넘어서, 담론, 이미지, 인상, 철학, 감성, 태도까지를 아우른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동시에 크랩스로 하여금 지치게 만든다. 계속해서 ‘을’의 입장에서 스스로를 조정해야 하고,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상과 현실 사이를 줄타기해야 한다.
“크랩스는 자주 선택받지 못합니다. 선택받으려면, 나를 많이 지워야 하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고백은 크랩스라는 존재가 ‘선택받는 창조자’라는 역설적 조건 속에서 얼마나 심리적으로 고립되고 분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자신을 지우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고, 자신을 지우면 창작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이 딜레마는 단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실천의 조건이다.
숙명적 딜레마 _ 크랩스는 자신을 지우지 않으면 선택받을 수 없고, 자신을 지우면 창작자로서 존재할 수 없다.
크랩스의 현실은 시스템 자체가 구조화한 위계의 반복이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공공건축물조차 ‘최저가 낙찰제’, ‘경험 중심 배점’ 등으로 인해 젊은 크랩스들이 기회를 갖기 어렵다. 심사 시스템조차 발주자의 성향에 따라 좌우되는 경우가 많고, ‘실적’이 신진 크랩스의 진입을 구조적으로 막는다. 결국 설득은 평등한 경쟁이 아닌, 권력에 따른 입장 차이에서 시작된다. 이 구조 속에서 크랩스는 철학이나 미학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얻는 방법부터 먼저 배워야 한다. 설계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하다는 현실은 많은 크랩스에게 좌절을 안긴다.
크랩스의 설득은 단지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
크랩스는 설득을 멈출 수 없다. 그것은 단지 생존의 기술이 아니라,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이기 때문이다. 선택을 받아야만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창조 분야에서, 크랩스는 자기 목소리를 잃지 않기 위해 애쓴다. 누군가는 고상한 방식으로, 누군가는 치열한 전략으로, 또 누군가는 그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기 설계 언어를 간직한다. 그들의 모든 제안서, 모델, 도면, 발표는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선택받기 위한 자기 선언이자, 윤리적 실천의 한 형태다.
" 크랩스는 태생적으로 을이다. 이 ‘을’의 조건을 인정하는 순간, 크랩스는 더 이상 무력한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그 구조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의 언어를 지킬 것인가, 어떤 철학으로 발주자와 협상할 것인가, 어떤 공간을 설득해 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품은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반복하며, 크랩스는 단지 ‘선택받는 자’가 아니라 ‘공존의 공간’을 상상하는 자가 된다. 결국 진정한 설득이란, 타인을 압도하거나 현혹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 존재할 수 있는 세계를 제안하는 일이다.
크랩스는 을의 자리에서 철학을 지닌다. 그 철학이야말로 수많은 선택과 거절 사이에서 자신을 잃지 않게 해주는, 고요하지만 단단한 중심이다. 선택받는 존재이기에 불안하지만, 선택을 통해 타인과 세계를 연결할 수 있기에 그 불안은 의미로 전환된다.
그리고 바로 그 험하고 거친 파도 속에서도 스스로의 가치와 의미를 확보하고 완성된 하나의 순간의 결정체로 건축을 완성시키는 순간, 크랩스는 비로소 창조자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