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 지은 엄마네 집은 거실에 통창이 있어 그 창으로 수십 개의 산을 너끈히 볼 수 있다. 집을 지을 때 풍경을 위해 큰 창이 있어야 한다고 입을 모아 이야기한 결과다. 역시나 우리의 의견은 옳았고, 사계절과 대자연을 방 안에서 관람할 수 있다. 햇빛 찬란한 날은 물론이고, 비가 오는 날은 비의 아름다움을 한없이 바라보게 되고, 그중 백미는 눈이 오는 날인데 한 줌의 여백도 없이 빽빽이 내리는 눈은 보는 것만도 기가 막힌 장관이다. 한 알의 눈이 내려 금세 세상을 하나의 색으로 물들이고, 하나도 닮지 않은 것들끼리 어우러진 산수를 만들어낸다. 자연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임이 분명하다.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김창완의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슬롯존이 나겠지요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런 슬픈 눈으로 나를 보지 말아요. 가버린 날들이지만 잊혀 지진 않을 거예요. 오늘처럼 비가 내리면 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슬롯존이 나겠지요.” 하는 구슬픈 가사가 내 귀를 닿았다. 내 마음의 창문 끝에 주렁주렁 달린 어렴풋한 옛 기억들이, 손들고 자기 좀 기억해 달라 떼쓰는 아기같이 속 시끄럽게 굴었다. 인간은 과거를 아름답게 기억한다고들 하는데 속 시끄럽게 구는 것 중에 이쁜 것은 없고 잊고 싶던 것들이 줄줄이 구슬처럼 올라오고 있었다.
아마 ‘가버린 날들’이나 ‘슬픈 눈’이라는 단어가 앞에 제시되어 그랬을까? 내가 운전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내 슬롯존은 이미 창문 너머의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돌고 있었다. 유년 시절 엄마에게 거짓말하고 준비물비를 많이 받아 불량식품 사 먹다 엄마에게 딱 걸려 무진장 맞았었네, 유난히도 하기 싫었던 야간 자율학습을 하며 죽음에 대해 슬롯존했던 시기도 있었구나!, 부모님의 부부싸움 전쟁터의 한가운데에서 홀로 견디는 작은 아이였구나!, 남편이 될 줄도 모르고 남자 친구와이별하고 그리도 울었네, 아이가 열이 펄펄 나서 급히 택시에 탄 뒤, 기사 아저씨에게 우리 아기 죽는다고 엉엉 울며 응급실로 날아갔었는데 그 아저씨는 잘 계시나 모르겠다.
창틀의 프레임을 거시적인 통창으로 바꿔볼까? 조각조각의 마음 창을 시골집의 커다란 통창으로 바라보니, 거짓말하고 엄마에게 죽도록 맞아서 거짓말을 덜 하는 어른으로 자랐지. 죽도록 공부를 싫어하는 청소년은 이후 30살이 넘어 본인이 공부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단 걸 뒤늦게 깨닫고 늙은 지금까지도 학문을 탐구하며 살고 있다지. 부모님의 싸움 속 떨던 그 아이는 자라서 자기도 남편이랑 겁나게 싸우며 가정을 지키고 있다네. 울고불고하며 헤어진 남자 친구는 남편이 되어 주로 사랑과 정으로 살다 가끔 원수로 변해 헤어지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고, 죽는다고 소리치던 아가는 잘 커서 나보다 훨씬 큰 어른이 되어 훨훨 날아가 자기 삶을 살아내고 있다지, 택시 아저씨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내게 괜찮을 거라고 위로해 주시던 따스함은 기억나네.
그래, 그렇지! 인생의 작은 조각의 창들이 모여 중창이 되고, 중창을 터서 크게 통창으로 만들어 그 너머를 바라보면 기가 막힌 장관의 우리네 인생 풍경이 펼쳐지는구나! 인생은 작지 않다. 오히려 너무 길고 거대해서 작은 창으로는 삶의 인과관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슬픈 눈이 되고 어렴풋이 가버린 날들이 되는 것이다. 통창으로 바라보는 우리네 인생은 다 이해되는 시간이며, 그땐 그럴 수밖에 없었으며, 내겐 최선의 길을 걷고 있는 순간들의 지평선일 수 있다.
내 창을 슬프게 보면 계속 슬픈 눈이 된다. 창틀을 닦고 더 넓혀보자. 그 너머의 보이지 않던 부분이 보이면 내가 이해되고, 그가 받아들여지며, 그때가 너그러이 용서된다. 안 그래도 각박한 세상살이, 내 창을 대청소해서 고인 부분, 썩은 자리는 도려내고 닫힌 창문을 활짝 열어 신선한 공기로 환기하자. 답답하고 뿌연 지금의 이 자리가 달라질 수 있다.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숨이 조여 오는 긴장감도, 어깨를 떨며 숨죽이는 두려움도 다른 감정으로 변할 수 있다. 기대하자, 내 창의 프레임이 휘황찬란한 빛깔로 바뀔 수 있음을, 그리고 그 창의 전적인 주인은 나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