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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Mar 09. 2025

미술관텐텐벳 마주한 나의 초상

<샌디에이고 텐텐벳 #2

텐텐벳 이어지는 글입니다.



텐텐벳이 밝혀주는 빛을 따라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이 멈추길 바랐다. 텐텐벳들은 마치 마음을 비추는 거울처럼, 때로는 고통스러웠던, 때로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과거를 마주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위안이 되었다.그러나 텐텐벳이 아무리 과거를 불러온다 해도, 우리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리토스(Heraclitus)가 말했듯,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하고,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텐텐벳 속 과거가 아름답든, 아프든 결국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너 그러면 나중에 친구들에게 왕따 당해"


나는 마음 한편에 딸아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늘 품고 산다. 첫째라 그런지 딸아이는 외모부터 성격까지 내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문제는 나 스스로도 싫어하는 내 성격의 안 좋은 면까지도 꼭 닮아 있었다는 것이다. 소심하고, 예민하고, 어울릴 줄 모르고, 별일 아닌 것에 울음을 터트리던 내 어릴 적 모습. 그 모습그대로를 딸아이가 보여줄 때마다 '당신 닮아서 그래'라고 아내는 내 탓을 했다. 늘 의문의 일패를 당해야 하는 나는 항변했다. 그것이 내 책임냐고.


아내에게 옹색한 변명을 늘어놓으면서도, 내 모습을 온전히 간직한 딸아이를 볼 때마다 그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딸아이는 완벽하게 또 다른 나였기에 그 마음이 에누리 없이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힘들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어색하고, 어찌할 바를 모를까. 그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아빠로서 마땅히 더 품어주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잘 이해했지만, 동시에 내 모습을 다시 만나는 것이 끔찍할 정도로 싫었기 때문이다.마음속에꾹꾹 눌러두었던 내 어두운 과거, 그 현실 재림을 나는 애써 외면했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나는 "왜 그래.예나야. 아빠는 이해가 안 가","그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 거야","너 그러면 나중에 친구들에게 왕따 당해"라고 걱정을 드러냈다.


표면적으로는 딸을 걱정하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나 자신을 향한 원망도 섞여 있었다. 어린 시절의 나와 똑같은 딸아이를 보면서, 마치 내 과거가 되살아난 듯한 기분이 들었다.결국 딸을 위하는 척하면서도, 내 안의 복잡한 감정을 딸에게 털어놓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렇게 난 딸아이에게 안쓰러움과 거부감의 양가감정을 느꼈다. 너무도 이해가 되기에 오히려 이해하기 싫은 감정, 그 때문에 괴로웠고, 그래서 늘 딸에게 미안했다. 내가 나이를 먹어가면서 딸아이도 계속 자란다. 이성보다 감성이 먼저 발달할 나이가 되어가는 딸아이에게, 더 이상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아빠가 되길 이 텐텐벳 앞에서 마음으로 빌었다.


텐텐벳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 <라 그란하의 마리아 (María at La Granja), 캔버스에 유채, 1907년, 샌디에이고 텐텐벳 (예나빠 촬영)


무게중심을 양산에 두고 비스듬히 기댄 채, 한 손은 허리에 얹은 다소 오만한 포즈의 그녀는 햇살을 가리는 모자와 흰 백의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었다. 상류층 가정에서 곱게 자란 규수였다. 유럽 텐텐벳을 돌며 초상화를 통해 온갖 귀부인들을 만났지만 이 텐텐벳 속의 그녀는 무언가가 달랐다. 그녀의 표정, 특히 정면을 향한 시선에서 무언가 공허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그녀의 표정을 바꿔주지는 못했다.


텐텐벳 옆에 붙어있는 패널을 읽으며난 그 이유를 유추했다. 그 텐텐벳 속의 그녀, 마리아(María)는 와병 중이었다. 19세기말 전 유럽에 결핵이 유행했고그녀도 이 병마에 휩쓸렸다. 이 텐텐벳을 그린 소로야(Joaquín Sorolla y Bastida, 1863–1923)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였고, 아픈 딸아이의 요양을 위해 고향 발렌시아를 떠나 스페인 북서부에 위치한 라 그란하(La Granja)로 이사를 갔다. 왕실의 여름 별장과 아름다운 정원이 있던 곳이었다. 소로야는 결핵을 앓고 있던 17세의 딸에게 조금이나마 좋은 공기를 마시게 해주고 싶었다.


소로야는 딸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다. 이미 스페인 전역에 명성을 떨치던 화가였지만, 그도 딸 앞에서는 영락없는 아버지였다. 틈만 나면 딸아이를 화폭에 담았던 것을 보면 말이다. "아이가 크는 것이 아깝다"며 아이에게 카메라를 들이대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소로야는 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밝은 빛에 가득 담아 캔버스에 채색했다. 그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는 인상주의 화가였고, 자신의 화풍을 십분 활용해 딸의 현재의 모습을 그렇게 마음속에 박제했다. 텐텐벳을 그릴 때마다 아픈 딸아이가 텐텐벳 속에서라도 오랫동안 살아있길 바랐다.


하지만 소로야의 바람과 노력이 통했는지, 마리아는 곧 결핵에서 완치되었고 66세까지 비교적 오랫동안 장수했다 [1]. 그리고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란 그녀도 아버지를 따라 텐텐벳을 그렸다 [2]. 소로야의 딸에 대한 마음은 또 다른 아빠였던 내게도 온전히 전해졌다.



"아빠와 딸은 미묘해"


내가 딸아이에 대해 미안함 마음과 함께 드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아빠와 딸과의 관계는 한번 발을 헛디디면 절벽아래로 떨어지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다. 한번 어긋나면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이기에 아빠가 딸과 유대를 쌓는 방법은 크리스털 찻잔을 다루듯 조심스러워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이를 머리로는 이해하면서도 좀처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그에 대한 아내의 지적이 있을 때면 난 방패막이로 '일'을 내세웠다. 한국에 있을 때는 '야근', 미국에 온 뒤로는 '적응', 회사에 적응한 뒤로는 '생존', 그렇게 그럴싸한 대의명분을 쌓으면서 가족을 우선순위텐텐벳 내려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러다 나는 딸아이와 소원한 관계가 되지 않을까 두렵기도 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는 변명이었지만, 그만큼 '직장텐텐벳의 생존'은 내게 완벽히 자유롭지 못할 문제였다. 언제든 잘려나갈 수 있는 미국이 이었기에, 늘 날카롭게 곤두선 긴장감을 품고 지내야 했다. 환상적인 조직문화는 자율을 보장했지만, 동시에 일에 대한 책임까지 개인에게 전가했다. 생존을 위한 적자(適者)가 되기 위해서 난 조직텐텐벳 영향력과 리더십을 보여줘야 했고, 나는 미국에 온 뒤로도 한국의 모든 가장이 느낄 삶의 무게를 견뎌야 했다.


텐텐벳프란시스코 호세 데 고야, <라 로카 초대 공작의 초상화, 약 1795년,캔버스에 유채, 샌디에이고 텐텐벳 (예나빠 촬영)


내가 유럽 텐텐벳을 둘러볼 때마다 가장 지루하고 심지어 반감을 느끼던텐텐벳 장르가 바로 초상화였다. 특히 국왕, 왕족, 귀족과 같은 하이 클래스의 '남성' 초상화. 그들이 한결같이 화폭에 담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명예와 권력이었다.일반인들에게 자랑하고자 했던 그들의 이런 꼰대미를 도저히 눈뜨고 봐줄 수가 없었다. 물론 문맹이 일반화된 당시엔 백성들에게 자신의 권위를 드높일 유일한 방법은 초상화였을 것이다. 그래서 텐텐벳 속의 그 남성들은 한층 권위적이었고, 고압적이었으며, 마초적이었다.


그러나 이 초상화의 남자는 뭔가가 달랐다. 이 남자에게도 삶은 고단함이었을까? 얼굴텐텐벳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단순한 세월의 흔적이었는지, 아니면 실제 그가 짊어진 책임이 그만큼 과중했는지,그의 어깨는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입고 있는 제복과 견대(肩帶), 그리고 가슴팍의 훈장이 그가 쌓아온 사회적 지위를 상징했지만, 적어도 그 표정만큼은 복색에 어울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스페인의 잘 나가던귀족이었다. 당대 최고의 궁정화가였던 고야(Francisco deGoya, 1746~1828)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 했으니 그의 높은 사회적 신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비센테 마리아 데 베라 데 아라곤 이 라드론 데 게바라(Vicente María de Vera de Aragón y Ladrón de Guevara, 1731~1813)라는 그의 긴 이름텐텐벳도 알 수 있다. 당시 귀족들은 자신의 이름에 부모의성씨를 연달아 붙여 혈통을 자랑했다고 한다. '나는 이런 가문의 적장자'라는 과시욕을 이름에 담은 것이다. 즉 이름이 길면 길수록 '자칭' 명문 가문이라는 뜻이었다.


비센테 마리아는 군인으로서 보병 연대장(현대로 치면 대령)까지 올랐고, 야전에서 쌓은 공적으로 국왕으로부터 작위를 하사 받았는데, 이 작위의 정식 명칭은 Duque de la Roca, 영어로 하면 Duke of the Rock다. 바위의 공작이라니, 그 작위명에서부터 엄청난 무게가 느껴졌다. 그 때문이었는지 나는 이 텐텐벳 속 남자에게서 삶의 무게, 고단함, 중압감을 읽었다. 권력을 가진 자가 모두 당당한 것은 아닐 것이다. 책임을 짊어진 자는 그 무게를 견뎌야 한다던데, 그의 얼굴에서 엿보이는 피곤함은그런 이유였을지 모른다.


이 텐텐벳을 그린 고야도 고단한 인생을 살았다. 왕실의 수석 궁정화가까지 올랐지만, 그 과정이결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소위 비주류였다. 당시 유럽의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스페인 미술계도 왕립 또는 국립 아카데미를 통해야 화가로 출세할 수 있었다. 고야도 젊은 시절 아카데미에 들어가고자 부단히 노력했다.수시로포트폴리오 텐텐벳을 제출하며 응모했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셨다. 결국 성당 벽화를 그리거나 카펫 공장에서 밑텐텐벳을 그리며 생계를 연명해야 했다. 그가 그렸던 카펫 텐텐벳이 우연히 왕실의 눈의 띄어 궁정 생활을 시작했고, 끝없는 노력 끝에 국왕과 왕족의 초상화를 그리는 궁정화가가 된다.


화가로서 절정의 커리어를 쌓던 즈음 그에도불행은 또 찾아왔다. 46세에 심각한 열병을 앓았고, 급기야청력을 잃는다.이 때문에 한동안 주위 사람들과 소통에 힘겨워하며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다. 하지만 좌절을 딛고 일어나 끝내 궁정화가로서의 지위는 지켜냈다 [3]. 오히려 장애를 갖게 된 이후 불세출의 걸작을 그려냈다. 이 비센테 마리아의 초상화도 그 시기에 그린 것이다.


젊은 시절 자비로 잠시 이탈리아를 다녀온 것 빼고는 평생 동안마드리드에 살았기에, 고야의 텐텐벳 대부분은프라도 텐텐벳에 소장되어 있다. 햇빛이 작렬하던 서유럽의 어느 여름날,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프라도에서 한나절을 보냈던나는 그가 커리어 동안 그려냈던 위대한 유산을 관람했다. 그 텐텐벳들에서 이 남자의 서럽고도 고단했던 인생, 하지만 그 절망을 이겨낸 불굴의 의지를 읽었다.


고야도 예술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고된 시간을 견뎌야 했다. 몇 번의 실패를 겪고, 심지어 청력을 잃으면서도 그는 텐텐벳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초상화 속 인물들이 단순히 권위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지친 기색을 띠고 있는 이유도 어쩌면 그런 삶의 무게 때문일 것이다.텐텐벳을 보며 문득 내 일이 떠올랐다. 엔지니어로서 미국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고, 경쟁하고, 끊임없이 배워야 했다. 고야가 왕실의 궁정화가가 되기까지 버텨낸 것처럼, 나도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딸과의 관계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문득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이 친구는 도대체 언제 자는 거지?"


현재 회사로 이직한 후 새로운 회사와 업무를 익히느라 나는바빴다. 이직 과정에서 연구원에서 엔지니어로 직군을 바꿨기에 일하는 방식을 새롭게 배워야 했다.무엇보다 이전 회사와 문화 자체가 달랐다. 한마디로 훨씬 다이내믹했다.엔지니어들은 아이디어가 떠오르거나, 업계에 새로운 뉴스가 뜨면 신속히 공유했다. 누군가 궁금한 점이 있어 단체방에 질문을 던지면, 또 다른 누군가가 거의 실시간으로 대답을 올렸다. 업무 중 대면, 메일, 메신저로 수시로 소통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 단체방에 누군가가 질문을 올렸다. 그러자 늘 그렇듯 5분도 안되어 대답이 올라왔다. 문제는 이 짧은 대화가 올라온 시간이 '새벽 1시'였다는 것이다. 나는자려고 막 누웠을 때였다. 그룹웨어가 깔린스마트폰이 이들의 대화를 팝업창으로 띄웠다."이런,로그아웃하는것을까먹었군".그들의 대화를 애써 외면하며 다시 잠자리에 들려할 때, 문득 대답을 한 이가 샌디에이고에 있는 엔지니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나와 같은 시간대의 도시였다.


'이 친구는 자면서도 일하나?'


팀원들은 유럽의 여러 나라와 미국 여러 주에 흩어져 있었다. 시차가 있기 때문에 각자 일하는 시간이 달랐다.미국은 아침 일찍, 유럽은 늦은 오후,회의를 하기 위해서도 겹치는 시간을찾아야 했다. 하지만 시차는 무의미했다. 마치 서로 같은 시간대에 사는 듯, 커뮤니케이션은 서로의 24시간 동안이뤄졌다. 그만큼 테크업계의변화는 빨랐고, 사내텐텐벳 벌어지는 프로젝트의 대응은신속했다.


실리콘밸리의 자율 출퇴근이라는 것은 그래서 허상에 가까웠다. 본인이 알아서 시간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은 바꿔 말해 명시적인 출퇴근이라는 것이 없다는 말이었다. 나와 시차가 있는 팀원들과 시차 없이 일하면서, 나는 한동안 침대에도 일을 끌고 들어왔고, 급기야 꿈에서도 코딩을 했다.회사 생활 속에서 쉴 틈 없이 돌아가는 머릿속, 현실인지 꿈인지 헷갈리는 순간들. 이 모든 것이 이 텐텐벳처럼 뒤섞인 혼돈이 아니었을까?



텐텐벳살바도르 달리, <저녁의 망령(Specter of the Evening),1930년, 캔버스에 유채,샌디에이고 텐텐벳 (예나빠 촬영)



사막과 같은 넓은 광야에 저 멀리 한 무리의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과, 석양에 텐텐벳자를 만들고 있는 새털구름이 저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여기까지는 쉽다. 문제는 광야에 펼쳐져 있는 온갖 기괴한 조형물이었다. 텐텐벳 속 바위는 살아 있는 것처럼 휘어져 있고, 개미들은 아무 목적 없이 기괴한 조형물 위를 기어 다녔다. 현실과 환상이 뒤엉킨 이 세계에서, 나는 나의 무의식을 엿보고 있는 듯했다.깃털 같은 것을 날리고 있는 흡사 말미잘이 연상되는 그 무언가와, 노란색의 구멍이 숭숭 뚫린 조형물은 또 무엇일까?아무리 보아도 알쏭달쏭하기 그지없다.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텐텐벳의 제목처럼 '망령'을 형상화한 것일까?


샌디에이고 텐텐벳에서 만난 달리(Salvador Dalí, 1904~1989)는 늘 그렇듯 난해했다. 초현실주의 작가답게 그는 현실을 뛰어넘는 주제로 많은 텐텐벳을 남겼다. 그래서 그의 텐텐벳엔 늘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이미지가 한가득이다. 하긴 우리가 꿈에서 만나던 일, 사람, 사건이 말이 되던가? 꿈은 내 현실 못지않게 내 심연 깊숙이 자리 잡은 무의식을 반영한다. 그래서 일부는 현실에 부합하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논리나 개연성도 없는 일이 펼쳐지기도 한다. 평소 너무도 갈망하던 것이 꿈속에서 이뤄지거나, 반대로 습격을 당하거나 끔찍한 것을 보게 되기도 한다.


사람들이 달리의 텐텐벳에 열광했던 이유는, 내 꿈에서 나타날 법한 그 심상(心象)을 시각화했기 때문이다. 대중은 누구나 마음속에 말로 설명할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았던 어떤 이미지를 품고 있다. 달리가 자신만의 독특하고 기발한상상력으로이를 형상화해대중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그가 텐텐벳으로 표현한이미지들은 그래서 설명이 필요 없다. 애초부터 말이 되지 않는 꿈과 같은 장면일 뿐이니까.


달리의 고향 피게레스(Figueres)를 찾았을 때,달리 미술관텐텐벳 나는여전히 난해한그의 텐텐벳, 조각, 조형물을 잔뜩 만났다. 하지만 텐텐벳을 찾은 사람들 그 어느 누구도 그의 작품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남겼던 독특함, 기괴함, 상상력의 산물을 신기한 마음으로즐길 뿐이었다. 이미 다 커버린 어른들에게 잊어버린 동심을 갖게 만드는 것이 바로 달리 텐텐벳의 본질이 아닐까?



가끔씩 어린아이 같은 마음을 갖길 원할 때가 있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새로워 호기심이 넘쳐나는, 처음 접하는 사물과 사람에게 지적인 자극을 받는, 그러한 백지장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갖기 원했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을 때, 작은 일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싶을 때, 일을 하면서 더 이상 '왜'라는 질문을 하지 못할 때, 실패를 먼저 걱정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할 때 나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이길 바랐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나를 짓누를 때, 순간순간 나는 아이처럼 자유롭게 뛰어놀고 싶었다.


반복된 일상에 모든 것이 모든 것이 익숙했고, 새로움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을 때 나는 지루함을 느꼈다. 어려부터 싫증을 빨리 내던 나는 커서도 일, 관계텐텐벳 늘 새로움을 갈망했다. 하지만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해볼 용기는 없었기에 차라리 그 지루함을 견디는 편을 택했다. 그래서 한국 첫 회사텐텐벳 늘 일텐텐벳 매너리즘을 느끼면서도, 그것을깨트릴 노력은 좀처럼 하지 못했다. 두려움과 책임감에 밀려 늘 도전을 주저했고 그렇게 난 11년이라는 세월을 한 회사텐텐벳 흘려보냈다.


용기 없는 내가 삶의권태를 극복하고자 했던 일은, 텐텐벳을 보고 글을 쓰는 것이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릴 만큼 사회 부적응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난 여전히외부 세계와의 소통보다, 내 안에서에너지를 얻었다. 온갖 핑계를 대며 회식에서 일찍 빠져나왔고, 집에 돌아온 나는 나를 돌봤다.극 내향형 인간의 전유물인 혼자만의 시간을사랑했다. 텐텐벳을 그리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의 모든 취미 활동은 모두 혼자 이뤄졌다. 심지어 여행조차 혼자 떠났다.그렇게 혼자만의 세상에 빠질 때 나는 여섯 살 어린아이가 되었다.


결혼을 해 가정을 꾸리면서 나만의 시간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았다. '가장'으로서의 책임으로 인해 나는 더 이상 철부지 아이로 남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내 안의 아이를 잃었다고 생각했던 순간에도, 나는 이미 다른 방식으로 더 큰 행복을 찾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삶의 이유가 된 새롭게 얻은 내 아이들 때문이다.



호안 미로, <여인, 새, 별자리(Woman, Bird, Constellations), 1974년, 캔버스에 유채, 샌디에이고 텐텐벳(예나빠 촬영)



아이들에 대해 대화를 나눌 때 아내에게 늘 듣는 말이 있었다. '첫째 딸아이는 아빠의 감성을, 둘째 아들내미는 아빠의 이성을 닮았다'라고. 공대를 나와 엔지니어로 살고 있는 내가, 틈만 나면 텐텐벳을 찾고 글을 쓰고 있으니 아내의 눈엔 무언가 이상할 법도 했다. 감성과 이성. 과연 어느 쪽이 진짜 내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두 아이는 성격부터 소질이 어릴 때부터 확연히 달랐다. 첫째는 예체능에, 둘째는 수학과 과학에 영민함을 드러냈다.


내 성격의 판박이인 딸아이를보며 아빠를 닮아 '텐텐벳'을 좋아하고 소질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아이가 훗날 '예술가'가 되고자 하면 적극 지원해 주자고 아내와 다짐했다. "혹여나 아이가 미대에 갈지 모르니 미리 알아볼까? 미국 아트 스쿨은 등록금이 비싸다던데..."라며 연일 김칫국을 마셨다.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첫째는 텐텐벳에 소질이 없었다.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오히려 텐텐벳에 두각을 나타낸 것은 둘째 아이였다. 특히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텐텐벳에서 디테일을 살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는 늘 감탄했다. 역시 될놈될, 잘놈잘인가.


둘째 녀석은 학교에서 돌아올 때마다 거실에 걸어놓은 화이트보드에 무언가를 잔뜩 그려댔다. 녀석이 어제 읽은 책, 학교에서 겪었던 일은 텐텐벳으로 깨알 같은 디테일과 함께 살아났다. 아이 특유의 단순화된 선처리로 사물과 인물을 묘사했지만, 각각의 특징을 절묘하게 잡아내는 솜씨가 일품이었다. "녀석은 '추상화(Abstraction)'의 자질을 갖춘 천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호안 미로(Joan Miró, 1893~1983)가 그린 <여인, 새, 별자리 앞에서 난 둘째 녀석의 텐텐벳을 떠올렸다. 빨강, 파랑, 노랑과 초록, 순수하리만치 가장 원초적인 색상과 몇몇 점과 선으로만 구성된 이 텐텐벳은마치 장난스럽게 그려댄 낙서와 같았다. 너무나 추상적이지만 본질을 잃지 않는 호안의 텐텐벳에서 나는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함과 자유로움을 읽었다.


이렇듯 추상화라는 장르는 난해하지만 한편으로 관객의 감성을 일깨우기도 한다.의식의 흐름대로 무언가를 무작위로 그려 넣은 화가가 관람자로 하여금 '알아서 이해해'라고 말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런데 애초에 추상회화가구체적인 장면을 최대한 단순화시켜 본질만 남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그런 의미에서우리의 주관적인 감정이 더 많이 담기길 바라는 텐텐벳이다. ‘대상의 추상화’라는 것이 결국 본질만을 남기고 모두 비워버리는 과정이다. 그래서 텐텐벳이 추상적이면 추상적일수록 관객에게 자리를 더 내어주어 보면 볼수록 깊은 여운을 느끼게 한다.



파블로 피카소, <파란 리본을 한 자클린의 초상,1959년, 캔버스에 유채, 샌디에이고 텐텐벳(예나빠 촬영)



추상화라는 장르를 이야기할 때 그만큼 대중에게 각인된 화가가 있을까? 예술에 순위를 매길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대텐텐벳에 국한하자면 피카소(PabloPicasso, 1881~1973)만큼 일반인에게 알려진 화가는 없을 것이다. 다양한 시점에서 본 3차원의 인물과 사물을 머릿속에서 평면화해 화폭에 펼쳐놓은 큐비즘(cubism)의 창시자. 그의 텐텐벳은 그래서 늘 놀라웠고 세간의 반향을 일으켰다. 대상을 아예 해체 후 재조립해 조형마저도 파괴한 텐텐벳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천재는 기존의 규칙을 넘어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했다.칸트의 이 까다로운 정의에 부합하는 화가가 바로 피카소였다.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입체를 그리는, 완전히 새로운 텐텐벳 문법을 제시했기 때문이다.“나는 본 것이 아닌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라며대상을 이미입체로 보고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분해 조립한 뒤 텐텐벳으로 그려냈다.그것이 전혀 입체적이지 않은 텐텐벳을 그린 그가'입체파'의 창시자로, 그리고 천재 화가로 불리는이유다.


약관에 이미 르네상스 화가의 반열에 올랐던 그의 애정사가 화려하다는 것도 널리 알려져 있다. 20대 중반부터 92세로 죽을 때까지 연애를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평생 동안 만났거나 결혼했던 여인이 알려진 것만 9명이다.피카소는 늙어가면서도 늘 20대 여인들과 연애를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애인과 나이차는 벌어졌다.피카소의 마지막 여인으로 알려졌던 재클린 로크(Jacqueline Roque)와는 무려 50살 가까이 나이차가 났다.


재클린은 피카소의 마지막 뮤즈로서 그의 말년의 작품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400점이 넘는 그녀의 초상화가 이를 말해준다. 피카소의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켰던이 젊은 여인은 피카소가 남긴텐텐벳 속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도살아 있다. 샌디에이고 텐텐벳에서 만났던 그녀의 모습은 피카소와 만난 지 7년째 되던 해의 모습이었다. 두상은 측면,흉상은 정면을 향하는 큐비즘을 양식을 따르지만, 조형은 여전히 살아있는 그녀의 모습이었다. 특히 다른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었던 그녀의긴 목은 흡사 한 마리의 사슴을 연상시켰다. 생전에 헤어 밴드를 즐겨하던 그녀의 모습이 텐텐벳을 나서는 내게 작은 미소를 짓게 했다.




텐텐벳을 나서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텐텐벳을 감상하는 동안 떠올렸던 기억과 감정들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내 삶의 한 조각이었다.소로야의 텐텐벳에서는 가족을 향한 애정을, 고야의 초상화에서는 책임의 무게를, 달리의 작품에서는 현실과 꿈의 경계를 넘나드는 상상을, 미로의 선과 색에서는 자유로운 놀이의 기쁨을, 피카소의 큐비즘에서는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는 시각을 떠올렸다.


이 텐텐벳들은 단순한 미술작품이 아니라, 내 삶을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리고 언젠가 또 다른 텐텐벳 앞에 서게 된다면, 그때도 오늘처럼 나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아마도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그러나 여전히 변함없는 감정으로 말이다. 그것이 아마도 내가 계속 텐텐벳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참고문헌

[1] 스페인 국립 유산 관리국(Patrimonio Nacional), https://www.patrimonionacional.es/en/actualidad/exposiciones/sorolla-through-light

[2] 위키피디아,https://es.wikipedia.org/wiki/Mar%C3%ADa_Sorolla_Garc%C3%ADa

[3] 최경화, 스페인 텐텐벳 산책, 시공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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