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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팬의 바카라 룰
피터팬 이야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속에서 가장 낯설고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던 장면이 있다. 피터가 잃어버린 자신의 그림자를, 웬디가 바늘과 실로 정성스럽게 꿰매주는 장면.
"바카라 룰는 왜 떨어질까?" "바카라 룰를 두고 떠났던 피터는 왜 다시 그것을 찾으러 돌아왔을까?"
"그리고, 꿰맨다고 정말 다시 온전해질 수 있을까?"그 물음은 어린 나에겐 이해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른 어느 날, 그 장면이 조용히 내 안에 말을 걸기 시작했다.
우리는 자라면서 '진짜 나'와 '보이는 나' 사이의 거리감을 자주 느낀다.심리학자 융은 이 두 얼굴 사이에 '페르소나(persona)'라는 가면이 있다고 했다. 사회 속에서 적절히 기능하고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누구나 하나쯤의 가면을 쓴다. 엄마로서의 나, 직장인으로서의 나, 친구로서의 나. 때로는 그 가면이 너무 익숙해져서, 진짜 나를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살아간다. 피터팬에게 그림자는 어쩌면 그의 '진짜 자아'였을지도 모른다. 상처받고, 어둡고, 감춰두고 싶은 모습. 어쩌면 그림자는 그가 외면해 온 어린 시절의 슬픔과 불안을 상징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림자를 꿰매는 행위는 결국 '진짜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닐까. 페르소나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지만, 그림자를 꿰매지 않고는 결코 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 누군가의 딸로, 엄마로, 사장으로, 글을 쓰는 사람으로살아가고 있는 나 역시, 가끔은 조용히 내 그림자와 마주 앉는다. 어두운 과거의 기억, 실수했던 순간, 숨기고 싶었던 감정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퍼즐 조각임을 인정하면서.
사실 나는 항상 잘해야만 한다고 믿었다. 누구에게도 민폐가 되지 말아야 하고, 늘 친절하고 이해심 많은 사람이어야 한다고. 그건 내가 선택한 태도였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지치게 만든 신념이기도 했다. 나는 어릴 적넉넉하지 못한 집안 사정, 게다가 가부장적인 분위기 속에서 장녀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기대, 할머니의 바람. 그 무게는 어릴 적 내 어깨엔 조금 벅찼다. 철이 들기보단, 철이 들어야만 했다. 어른들의 얼굴색을 먼저 살피고, 동생을 챙기고, 내 감정보다는 상황을 우선시했다. 스스로 성숙해져야만 했던 어린 시절.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아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그때 내 안에 생긴 바카라 룰는 ‘나는 늘 괜찮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울고 싶어도 “괜찮아요”라고 말했고, 마음이 부서져도 “다 이해해요”라고 웃으며 넘겼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어른스럽다’, ‘참 대견하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는 점점 ‘진짜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요즘 들어 조금씩 그런 생각을 한다. 혹시 내가 너무 오랫동안 그림자를 외면해 온 건 아닐까. 내 안에 어두운 마음이 있다는 걸 숨기려다, 결국은 스스로를 더 외롭게 만든 건 아닐까? 그래서 이제는 내 그림자에게 조용히 말을 건다. "그래, 너도 나였구나." "넌 사라져야 할 존재가 아니라, 내가 품어야 할 내 일부였구나." 그림자를 꿰매는 일은 어쩌면 평생에 걸친 작업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실밥 하나하나를 꿰매며, 나는 진짜 나에게 조금씩 다가간다. 어릴 적 그 조용하고 눈치 빠른 아이도, 지금의 나도, 모두 나임을 받아들이는 일임을.
엄마가 되고 나서, 늘 생각하게 된다. 우리 아이들은 그저 아이답게, 천진난만하게 자라났으면 좋겠다고.
조금 서툴러도 괜찮고, 조금 실수해도 괜찮다고.나는 안다.철이 일찍 든다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사람은 누구나 마음속에 바카라 룰를 품고 살아간다.마주하고 싶지 않지만,그건 부끄러운 것도, 숨겨야 할 것도 아니다.그림자는 나의 상처이기도 하지만,동시에 바카라 룰 감수성과 공감의 뿌리이기도 하니까.
그래서 나는 조용히 기도한다. 내 아이들의 바카라 룰가 검은색 하나로 뒤덮이지 않기를.바카라 룰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그것마저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길.조금은 파랗고, 노랗고, 분홍빛도 섞인—
그저 다채로운 색으로 이루어진 바카라 룰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