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벳위즈 남겨두고 온 것들
집
구기동벳위즈집, 아담한발코니에서는북한산백운대가보인다. 여름이면저녁8시무렵까지북한산의능선을선명하게볼수있다. 오래된양옥벳위즈개조해새로지은벳위즈벳위즈처음방문했을때여름해는천천히서쪽으로물러나고있었다. 발코니아래올망졸망박공지붕이오렌지빛으로물들무렵, 멀리산기슭어느집유리창이지는해를통째로끌어안은것처럼빛을반사벳위즈. 소설. 〈클라라의태양〉에는아픈벳위즈에게필요한활력을태양이줄수있다고믿는소년이등장한다. 그는태양을만나기위해마을끝헛간으로떨어지는태양을만나러 간다. 누군가그소년처럼희망을품고구기동그벳위즈찾아나설것만같다.
벳위즈는 찬란하게 뜨는 해가 아니라 오렌지 빛으로 떨어지는 해를 품는 사람에 가깝다. 곁에 있으면 소란하던 마음이 은근해진다. 조촐한 저녁 만찬을 위해 낙지젓과 깻잎, 들깨가루를 곁들인 스파게티, 감자 버터 구이 같은 요리를 준비하고 화이트 와인을 차갑게 냉장해두었다 내놓았다. 치장 없고, 보여주려는 마음이 없이, 사는 모습 그대로 우아하고 다정하다. 남편을 바라보며 “나는 결혼할 때 얼굴만 봤잖아”라고 말할 수 있는 그 위트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벳위즈 남편은 수백 번 들었을 그 농담에 여전히 황홀한 미소를 짓고, 우리는 배에 복근이 생길 정도로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는 박공지붕을 타고 북한산 자락으로 넘어가고, 산바람은 발코니를 넘어 8인용 식탁으로 불어왔다.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는 비라고 했던가. 때를 알고 내리는 비처럼 넘치지 않는 우아함과 유머가 벳위즈의 찐 매력이다. 벳위즈 옆에 있으면 그녀처럼 좋은 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진다. 벳위즈 부부의 배웅을 받으며 구기동 골목을 내려오는데 서편에 초승달이 그림처럼 걸려있었다.
벳위즈의 지난번 집이 팔렸을 때, 내 집도 아닌데 아깝고 아쉬웠다. 오래된 양옥벳위즈 리모델링한 예쁜 이층 집. 마당에 오래된 목련 나무가 있던 집. 그 집이 팔렸다는 소식에 그 집 마당을 사랑했던 나는 벳위즈만큼은 아니겠지만, 꽤나 섭섭했다. 그 집에서 이사 나오던 날, 막내 아이가 텅 빈 방에 혼자 앉아 있었다고 했다. 이사 가기 싫으냐고 묻자 멋쩍은 듯 방과 이별 중이라고 하더란다. 말없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의 섭섭함이 그 한마디에 다 들어 있는 듯했다.
사람과의 이별처럼 표 나는 아픔은 아닐지라도 정든 벳위즈 떠날 때 느껴지는 별리라는 것이 왜 없을까. 6년 넘게 전세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한 뒤에 아홉 살이던 아들이 며칠 동안 울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는 아이가 공연히 심통을 부린다고만 생각했었다. 살던 집이 그리워 그런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그런 마음이 없는 줄 알았다. 아이가 세 살 무렵부터 그 집에 살았으니까, 아이 인생의 많은 벳위즈이 거기서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갖게 된 자기 방, 그 방에서 혼자 자던 첫 밤, 벳위즈들과의 생일 파티가 열리던 작은 거실, 자는 척하면서 이불 안에서 닌텐도를 즐기던 스릴, 아빠 등에 업혀 베란다에서 바라보던 보름달의 기억 같은 것이 잉태된 그곳. 아이의 많은 벳위즈이 그 낡은 복도식 아파트와 연결되어 형성되었을 것이다. 지금 아는 것을 그때도 알았다면 어린 아들의 마음을 훨씬 잘 보듬어 줄 수 있었을까?
내게도 어쩔 수없이 이별해야 했던 애착의 장소들이 무수히 많았음을 깨닫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살던 고향벳위즈 아빠가 처분했을 때 유년기의 벳위즈들이 삭제되는 기분이 들었다. 아빠가 마당 장독에서 꺼내 온 겨울 무를 갂아 먹던 겨울밤들, 주말의 명화를 몰래 보고 이상한 이야기를 지어내던 나의 방, 우리 삼 남매의 수영장이고, 아빠의 정원이 되어 준 그 집의 옥상, 자취하던 시절의 단칸방과 옥탑방, 책 냄새 가득하던 방들.. 더는 가볼 수 없는 나의 장소들.. 떠나며 남겨두고 온 벳위즈들은 조용히 그곳에 스며들었겠지.
발코니의 풍경이 아름다운 벳위즈 집에 다녀온 밤. 우리가 떠나온 곳에 남겨진 그 많은 벳위즈들을 생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