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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린다 Apr 26. 2025

또 한 번의 이별, 슬롯도 면역력이 생긴다

슬롯도 면역력이 있다는 사실을 최근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얼마 전, 오랜 병마와 싸워온 친척의 장례식장에 조문을 다녀왔다. 병세가 깊어진 지 오래라 마음속으로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막상 닥친 죽음 앞에서는 역시나 놀랐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아무리 준비하고 있어도 예고 없이 파도처럼 밀려오기 마련이다.


장례식장 안에서 사람들의 모습을 살펴보니, 가족 중에서도 처음 죽음을 경험하는 이들은 쉽게 슬롯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처음 겪는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 눈빛엔 깊은 상실과 혼란이 담겨 있었다.

반면, 아직 가까운 가족의 죽음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들은 어딘지 어색한 표정으로 그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아마도 아직 너무 먼 미래의 일일 것이다.

아니면 애써 외면하고 싶은, 아직은 떠올리지 않고 싶은 일이거나.


나는 어릴 때부터 유난히 죽음과 가까운 삶을 살아왔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어린 시절부터 가까운 사람들의 장례식장에 자주 다니며, 조문객으로 슬롯의 자리를 지키는 일이 익숙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은 집 앞이 바로 장례식장이다.

매일 같이 울음소리와 상복 입은 사람들을 보며, 나는 어느새 죽음이라는 단어에 익숙해져 있었다.

이제 조문을 가더라도 덤덤한 표정을 짓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진짜로 담담한 건지, 담담한 척하는 건지 나도 정확히 알 수 없다. 어쩌면 그저 '척' 하는 것이 늘었을 뿐인지도 모르겠다.마음속으로는 슬롯을 충분히 느끼지만, 그것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오래 살아온 탓인지, 슬롯을 느끼는 내 마음이 둔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슬롯 대한 내성, 일종의 면역력이 생겼다는 생각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예전엔 슬픔이 찾아올 때마다 깊은 무력감에 빠져 울음을 쏟아내곤 했다. 작은 일에도 쉽게 상처받고 슬롯 잠겼으며, 그럴 때면 어두운 방 안에 스스로를 가두곤 했다. 슬픔이라는 감정은 나를 너무 쉽게 지배했다.

그때의 감정이 마치 끝없이 깊은 바다처럼 느껴졌고, 나는 그 속에서 헤엄치는 방법을 몰라 허우적거렸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때의 그 힘든 기억들이 지금의 나에게 오히려 슬롯을 견디는 힘을 키워준 것 같다.

지금 나는 슬롯을 느끼더라도 크게 무너지지 않는다.

어쩌면 슬롯을 내 힘으로 조절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슬롯을 밀어내거나 억누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히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슬픔이 찾아오면 마음 한편에서 조용히 울게 내버려 두고, 그것이 내 마음에 충분히 스며들어 자연스레 사라질 때까지 기다린다. 그렇게 하다 보니 슬픔은 더 이상 두렵지 않다.

오히려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며, 감정이 아직 메마르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소중한 신호다.


슬롯는 분명 힘이 있다.그러나 지금의 나는 슬롯 압도되지 않고, 슬픔을 마주한 채로 담담하게 걸어 나올 수 있는 힘을 기르고 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겪어온 이별과 상실 덕분이다. 이제 나는 슬픔과 조금 더 가까이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덕분에 삶은 더 깊은 의미를 품게 되었다.

슬롯은 표현해야만 비로소 치유될 수 있다.표현하지 않고 억누르면 결국 예상치 못한 순간 엉뚱한 곳에서 터져 나온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 슬롯을 조용히 표현하기로 했다. 슬롯을 받아들이고, 그 감정을 조용히 안아주기로 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 마음은 더 단단해지고, 슬롯을 견디는 힘도 더 강해질 것이다.

오늘도 장례식장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다. 검은 상복을 입은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잠시나마 마음속으로 위로의 말을 전한다.




그렇게 조용히 슬픔의 자리에서 벗어나 걸음을 옮긴다. 슬롯도 면역력이 생긴다는 것을, 삶을 살아가는 동안 반드시 슬픔과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을 담담히 받아들인다.

이제 나는 슬롯을 너무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슬롯을 억지로 피하지 않고 천천히 품어내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삶을 더욱 깊고 풍요롭게 만든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내 마음속에 슬롯이 찾아와도, 나는 이제 괜찮다.
천천히 걷고, 천천히 표현하고, 그렇게 다시 살아가면 된다.
나는 오늘도 이 슬롯 속에서, 삶의 다음 페이지를 차분히 넘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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