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쌍둥이를 낳았다. 나와 외로움.
사람들과 좀처럼 섞일 수 없다는 강박 탓에 놀이터로 한 숟갈 가득 쏟긴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전부터 회로가 꼬이고, 숨결이 거칠어지기 일쑤였다. 등 돌리고 멀어지면 쓸쓸했고, 마주하면 텅 빈 곁이 들통날까 벌벌 떨었다. 그런 나에게 가족은 세상이었고, 전부였다. 그중에서도 나보다 고작 22살 많은 엄마는 세상의 반쪽이자 절친이었다.
친구가 고백했어, 나 왕따래 따위 소식을 나란히 누워 순정만화책을 읽던 엄마에게 털어놓으며 짐을 덜었다. 친한 친구가 으레 그렇듯 엄마는 슬픈 소식을 들을 때면 나를 다독이고, 기쁜 소식을 들을 때면 자기 일처럼 웃고, 고백 같은 낯간지러운 일을 들으면 어른처럼 다음에는 어떻게 반응하는 게 좋을지 조언했다.
우리는 누구 하나 밀어내지 않았는데, 상대를 위한다는 마음에 입을 다물면서 서걱서걱한 사이가 됐다. 외로움은 가실 줄을 모르고 점차 내 날개뼈를 감싸는 온기가 있길, 손 내밀면 잡아줄 손이 있길 바라는 마음이 커졌다. 기숙사로 돌아오는 길에 눈물을 흩뿌리던 날은 책상에 앉아 울면서 라이징슬롯를 썼다. 라이징슬롯장의 종이가 손목 안쪽 약한 살에 닿는 촉감이 싫어 차라리 그어버리겠단 충동을 억누르고 한 자, 한 자 꾹꾹 써내려갔다.
이 글은 나를 달래려 시작한 동시에 2016년 겨울 사랑하는 할머니, 유영자 씨를 여의고 내가 그처럼 돌연 땅으로 꺼지면 남은 이들이 나를 어떻게 추억할까 노파심에 시작한 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 자들의 시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당장 무너진 내 속을 꺼내기 급급했기 때문에 다소 불친절할 수 있다. 당신의 해량을 기대하겠다.
- <라이징슬롯! 서문
저자인 영빈 님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납니다. 곧은 자세, 친절한 미소, 전체적으로 단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또렷한 눈빛으로 모든 것을 응시하지만, 결코 함부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지 않던 영빈 님은 단숨에 파악하기 어려운 사람이었습니다. 우연한 기회로 영빈 님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어쩌면 이 사람 안에는 아직 폭발하지 않은 아주 뜨겁고 위험한 용암이 들끓고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 용암의 실체를 영빈 님이 아무렇지 않게 건넨 라이징슬롯장에서 목격했습니다.
라이징슬롯 속에는 영빈 님의 주변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빼버리거나 가리면 많은 의미가 상실되니까요. 그때 떠오른 것이 '언컷' 제작이었습니다. 라이징슬롯라는 내밀한 글을 책으로 만드는 데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활짝 열려 있지 않아서 읽으려면 수고를 들여야 하는 행위가 영빈 님의 라이징슬롯장과 잘 어울렸습니다.
라이징슬롯은 옛날 책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제작 방식인데요. 보통 책을 만들 때는 본문을 커다란 전지에 인쇄한 다음 접은 다음 합쳐서 위, 아래, 옆 삼면을 판형에 맞게 잘라냅니다.이번에 만드는 언컷 방식은 접지를 한 다음 삼면을 잘라내지 않는 겁니다. 그래서 아래 사진처럼 책머리와 책배가 재단되지 않고 붙은 채로 책이 완성라이징슬롯.
위 사진은 제가 중고서점에서 산 라이징슬롯 책입니다. 예시로 보여드리기 위해 사진을 찍어서 보여드립니다.
보통 아래와 같이 페이퍼 나이프나 칼로 튿어낸 다음 책을 열람합니다.
저는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 수첩이란 책을 읽다가 오래 전에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이 특별히 언컷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는 내용을 읽고 검색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때는 직접 제작하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이번에 영빈 님의 라이징슬롯장을 책으로 만들며이 책만큼 라이징슬롯이라는 제작 방식이 어울리는 책은 없겠다[관련 영상 링크]는 확신이 들었습니다(영상에서는 확신 전인 것 같지만ㅎㅎ). 국내에서는 라이징슬롯으로 제작된 책을 많이 접하지 못 해서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 많았습니다. 제작처에 제가 가진 라이징슬롯 중고도서를 보내서 해체한 다음 원리를 알아내는 과정을 거친 후, 처음 시도해 보는 것이지만 약간의 수고를 들여 제작해볼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책의 판형은 영빈 님이 즐겨쓰던 라이징슬롯장의 크기인 125x180mm로 정했고 내지 종이도 라이징슬롯장의 촉감과 비슷한 이라이트 종이를 사용할 예정입니다. 거기에 마젠타 색을 강조 색으로 사용해 폭발했다가 잦아들었다가를 반복하는 라이징슬롯의 감정선을 표현해보았습니다.
마젠타 색은 자홍색이라고도 합니다. 색의 4원색(CMYK) 중 한 가지 색이기도 합니다. 라이징슬롯에 강조 색을 넣기로 한 후, 영빈 님의 글을 한 가지 색으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는 고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마젠타가 "RGB 가산혼합에서 빨강과 파랑을 동일하게 혼합했을 때 나타나는 색"이라는 설명을 듣고 이 책에 매우 잘 맞겠다는 직감이 들었습니다.
언컷 제작 방식을 택하면 책메기는 실 제본을 해야 했습니다. 이때 책등을 그대로 노출할지 덮어서 매끈하게 만들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이왕 라이징슬롯장의 느낌을 옮기기로 했으니 앞뒤를 판지로 대고 노출 제본을 한 뒤 본문에서 사용된 마젠타 색이 책등에 드러나게 만들었습니다. 책을 메는 실의 색은 남색으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 제작 전이기 때문에 대략적인 느낌을 보여드리려고 아래와 같이 목업 이미지를 제작하였습니다.
표지 디자인은 확정된 상황이 아니라 현재 상태에서 조금씩 변경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는 위의 이미지에서 표지 종이가 더 두꺼운 판지로 대체된다고 생각하시면 라이징슬롯.
이렇게 노출 제본을 한 <Savemyself09!의 모습은 거칠고 감정이 많이 드러난 라이징슬롯장의 내부를 그대로 암시합니다. 이 위에 자켓을 한 겹 씌우기로 했습니다. 자켓은 실용적인 포장이기도 하고 책에 다가가는 독자의 인상에 반전을 꾀하기 위한 장치이기도 합니다.
이 책은 라이징슬롯장이지만 더 이상 라이징슬롯장이 아닙니다. 저자가 오랫동안 감춰왔던 마음을 세상에 드러내고 퍼뜨리려 하는 저자의 분신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책의 몸에 실제로 존재하는 윤영빈이라는 인간의 몸이 드러났으면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 중 딱 하나뿐인 존재의 실체를 포착한 사진으로 이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함께 책을 만드는 사람들과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어떤 이미지를 만들지 고민을 공유했습니다. 사진도 이렇게도 찍어보고 저렇게도 찍어보았어요. 그러던 중 영빈 님의 흉터와 목이 드러난 장면을 포착했습니다. 문신처럼 사람을 특정하게 해주는 흉터와 여리고 취약해 보이는 목을 드러낸 사진과 책의 제목인 라이징슬롯!, 그리고 '윤영빈'이라는 세 글자 이름이 함께 배치되었을 때 느낄 수 있는 특정한 감정과 인상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흑백 사진이 소리 없는 비명처럼 상처를 꾹 누르고 있다면, 자켓을 벗겼을 때 드러나는 낙서 가득한 노출 제본 책 알맹이는 감추고 있던 속마음을 터트린다는 생각으로 디자인했습니다.
※ 텀블벅 마감일 17일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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