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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TCH Apr 23. 2025

비트코인슬롯

용의 후예들


어렸을 때 흙을 뒤엎으며 놀다 보면 종종 비트코인슬롯가 나오곤 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뱀인 줄 알고 어찌나 놀랐던지. 그럴 때마다 유치원 선생님은 비트코인슬롯는 비트코인슬롯일 뿐이라고 말씀하셨지만, 나는 어쩐지 지금까지도 비트코인슬롯가 뱀 아니면 용일 것만 같다. 이무기 이야기를 읽어도 비트코인슬롯에 대해 공부해도, 용과 전혀 상관없음이 더 명확해져도 난 이상하게도 비트코인슬롯는 용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우리 집은 오래된 단독주택에 나무나 화초들도 많다 보니 벌레들이 제법 있다. 단독주택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글을 볼 때마다 그 벌레들을 보여주고 싶을 지경이다. 나는 벌레를 싫어하니까. 특히 그중에서도 비 오기 전 땅 위로 올라와 휘젓고 다니는 비트코인슬롯. 비트코인슬롯를 정말 싫어한다. 그래서 어렸을 때는 비트코인슬롯가 보일 때마다 죽이기도 했다. 그러다 이토준지 만화를 본 후달팽이의 저주처럼 비트코인슬롯의 저주를 받을까 봐그동안 죽여온 비트코인슬롯의 명복을 빌며 사죄했다. 그 후로다시는 비트코인슬롯를 죽이지 않았다.


며칠 전은 날씨가 꽤 더웠다. 더위에 유독 약한 나는 샤워를 하려고 욕실로 향했다. 며칠 전 악몽이 떠올랐다. 욕실 문을 열자 욕실 바닥에 족히 20cm는 되어 보이는 비트코인슬롯가 있었다. 잠시 몸이 굳고 머리가 삐쭉 섰지만 담담하게 비트코인슬롯에게 말을 걸었다.


"베. 베란다 문을 또 열어놨나 보네. 아. 정말 싫다고 너. 빨리 사라져라. 그냥 빨리 용이나 돼라."


미동도 없던 비트코인슬롯는 마치 내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천천히 천천히 움직였다. 하지만 어쩐지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그동안 보아왔던 비트코인슬롯들에 비해 움직임이 꽤나 하찮았다.


"어디 아프냐?"

"......"


비트코인슬롯가 대답할리 없었다. 천천히 천천히 이동하던 비트코인슬롯는 구석에 놓인 작은 대야를 낑낑 거리며 올라갔다. 그리고는 바로 그 안으로 툭 떨어졌다. 겁나지 않은 척하기 위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대야 안을 들여다봤다. 비트코인슬롯는 가만히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더 지치곤 해. 문을 열자마자 잠이 들었다가 깨면 아무도 없어."

"......"


양치질을 다 한 후 힐끔 봤더니 비트코인슬롯는 여전히 대야 안에 있었다. 세수를 다 하고 나서도 여전히 대야 안에 있었다. 아무래도 대야 안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 대야는 남은 비누를 처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비트코인슬롯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대야에 물을 살짝 받았다. 비트코인슬롯가 살짝 물에 젖을 수 있도록.그렇게 그대로 베란다로 가져가 물과 함께 휘익 뿌렸다.


"집으로 돌아가. 그리고 용이나 돼라. 내가 고맙거든 드래곤볼이나 한 번에 챙겨서 가져와."


깜깜한 밤이라 비트코인슬롯가 어디로 떨어졌는지 정신은 차렸는지 알 길 없었지만 난 그 말을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 그대로 잠이 들었다. 잠결에 엄청난 빗소리를 들은 것 같지만 비몽사몽 나의 지친 몸은 꿈나라로 내달렸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을까? 밤바람이나 쐬볼까 하며 베란다로 나갔다. 까만 하늘에 형광등을 켜놓은 듯 커다란 달이 몹시 밝았다. 그때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 속 어딘가 들리는 파도소리 따라서 나는 영원히 갈래."

"응? 뭐야. 누구야? 어딨 어?"

"...... 여기야."


아무리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다. 며칠 전 밤이 생각나며 조금 두려웠다.


"여기야. 여기라고. 아래. 2시 방향 아래를 봐."


그때였다. 핀조명이 떨어지듯 목소리가 가리킨 방향으로 달빛이 비치었다. 난간 끝에 비트코인슬롯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기어 오고 있었다. 왜 또 비트코인슬롯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럼 지금 비트코인슬롯가 말한 거라고?


"오랜만이야."

"뭐? 정말 비트코인슬롯가 말하는 거야?"

"응. 비트코인슬롯가 말하는 거야. 오랜만이야."

"날 알아? 우리가 언제 봤나? 그런데 정말 어떻게 말하는 거지?"

"나는 내 말을 하는 것뿐이야. 너에게 통하면서 너의 언어로 바뀌어 전달되는 것이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인간들끼리도 그랬으면 좋겠다. 외국어 안 배우게."

"하하. 아직 내가 누군지 모르겠니?"

"글쎄. 호.. 혹시. 옛날에 내가 죽였다거나 낚시에서 미끼로 썼다거나.."

"미끼가 되는 비트코인슬롯들은 하급계층이야. 어쩔 수 없는 그들의 운명이지."

"응?"

"며칠 전에 네가 욕실에서 날 이곳으로 데려다줬어."

"어? 아. 아? 아? 아아. 너였구나? 살아 있었네. 다행이다."

"응. 덕분에 잘 살아 있지. 고마웠어 그땐."

"뭐가 고마운데?"

"원래 그날이 내가 성년이 되는 날로 용으로 변하는 날이었거든."

"뭐? 용?"

"응. 집 마당이나 비옥한 땅에서 태어난 비트코인슬롯들은 용의 후예란다. 네가 아까 말한 미끼로 생을 마감하는 하급계층과는 태생부터가 다르지."

"용이라고?"

"응. 용. 왜? 뭐 문제 있어? 드래곤볼 얘기도 해서 난 네가 뭘 알고 말하는 줄 알았는데."

"와. 비트코인슬롯가 정말 용이야?"

"전부 다 용인 건 아니지만, 뭐 틀린 말은 아니야."

"우와!! 신기하다. 우와!!"

"내 말 듣고 있니? 아무튼 그날 난 용으로 변하는 날이었어. 비트코인슬롯들이 비 올 때 땅 위로 올라오는 건 용이 되기 위함이거나 그것을 위한 이벤트 때문이거든."


일부라고는 해도 비트코인슬롯가 용이라는 거지? 용은 용이지. 그럼 비트코인슬롯는 용이라는 내 생각이 맞은 거잖아. 와. 정말 맞았어. 비트코인슬롯가 용이다. 용이었어!


"... 저기. 너 소원이 뭐야?"

"응?"

"정신 좀 차려봐. 나 네 소원 들어주러 왔거든? 집중 좀 할래? 내가 용이 되기로 했던 날, 실수로 너희 집안으로 들어가게 됐어. 아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는 습한 기운이 없으면 말라죽고 말아. 집안이 너무 건조하더라. 자꾸 말라갔어. 용으로 변하기도 전에 죽는 건 아닐까 하는 공포심에 정신도 제대로 못 차리고 있었어."


주변이 어두워서 비트코인슬롯의 얼굴이 잘보이지 않았지만 비트코인슬롯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이 울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 됐다.


"그래. 그날 확실히 이상해 보이긴 했어."

"그런데 네가 밖에 던져줬잖아. 심지어 물에 적시기까지 해서. 그것도 비가 오기 전에! 비를 맞아야용이 될 수 있는데 덕분에 때를 놓치지 않고 용이 될 수 있었어."

"용이 됐다고? 네가? 그런데 넌 지금 비트코인슬롯잖아."

"난 용이다."

"어떻게 봐도 지렁인데? 아, 알았다. 나 놀라지 말라고 변신한 건가?"

"넌 용이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음. 글쎄? 용은 뭐랄까. 크고. 여의주도 물고 있고. 날아다니고."

"하하하."


비트코인슬롯의 환대에 어쩐지 핏대가 서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환대가 뚜렷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성장했구나 이 녀석.


"인간들은 어째서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이미지를 그렇게나 구체적으로 믿는 거지? 마음대로 이미지를 만들고 그렇다고 믿어버리면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상대를 탓하기 시작해. 난 지금 용이다. 비트코인슬롯가 아니야. 네가 보기에 비록 내 모습이 비트코인슬롯라 해도 난 지금 용이야. 내가 낳을 자식들도 나와 같은 수순을 밟겠지. 그래.네가 나와 내 후손들을 살려준 셈이군. 자, 네 말대로 드래곤볼을 한 번에 챙겨 왔어. 규정상 네가 다 모아 와야 하지만 넌 특별하니까. 어서 소원을 빌어."

"뭐? 그럼 드래곤볼도 진짜 있는 거야?"

"당연하지. 넌 네가 비트코인슬롯와 대화하는 첫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내 선조가 도리야마 아키라라는 자를 만났었거든. 그가 그 얘기를 만화로 그렸다고 하더라."

"알아. 그게 드래곤볼이라는 만화야. 그래서 내가 그걸 가져오라고 한 거지."

"도리야마 아키라 녀석. 천기누설을 하다니."

"우와. 진짜 용이었구나. 최고다. 와. 진짜 와.거짓말!"

"정말이니까 제발 진정 좀 해. 하아. 빨리 소원이나 빌어. 딱 하나만."

"응. 생각 좀 해보고."


고민에 빠졌다. 이런 순간이 오면 어떤 소원을 빌지 그동안 수없이도 생각해 뒀지만, 정작 그 순간이 찾아오니 뭘 말해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심지어 딱 하나라니.


"너무 어렵다."

"쉽게 생각해. 그저 평소에 원했던 걸로. 이왕 비는 거 공익을 위한 것도 좋겠지."

"음... 아!"

"생각났어?"

"응! 바퀴벌레를 박멸해 줘!"

"푸하하하"

"왜? 혹시 바퀴벌레가 친척이라도 되는 거야?"

"뭐? 그럴 리가 있어? 우리는 바퀴벌레를 싫어해. 자기네들만큼 역사 길고 단단한 민족도 없다며 어찌나 잘난 척들을 하는지 모르겠어. 사실은 뭐 하나 제대로 지켜내는 것도 없이 여기 찍 저기 찍 찝쩍이고 다니면서 말이지. 그거 아주 좋은 소원이네. 그런데 정말 그 소원으로 되겠어?"

"응. 난 정말 정말 그게 싫어. 최근에도 끔찍한 일을 겪었다고."

"알았어. 그럼 그 소원을 들어줄게. 네가 자고 일어났을 땐 세상에서 다 사라져 있을 거야. 그럼 잘 지내도록해. 정말 고마웠어. 안녕."


비트코인슬롯는, 아니 용은 꿈틀꿈틀 움직이며 난간 끝으로 사라졌다. 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용이된 비트코인슬롯를 상상하며 그와 그의 후손들의 영광을 빌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왠지 모를 상쾌함을 느꼈다. 그 후로 며칠간을 상쾌하게 지냈는데 문득 그것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소리도 들리지 않고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사라진 건가? 그렇게 얼마 후 전 세계 매스컴에서 바퀴벌레가 사라진 기이한 현상에 대해 집중 조명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난 지구가 멸망해도 살아남을 거라 얘기 됐던 그 강력한 빌런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낸 비밀영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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