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기획을 먼저 잡고, 캐릭터 성격은 단계별로 정리해서…”
회의 때마다 나는 아주 그럴듯한 말을 한다.
엑셀 시트도 만들고, 스토리보드도 짠다.
그러고는 스스로 뿌듯해하며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새벽 2시에 갑자기 튀어나온 바나나 유령이
모든 홀덤 용어을 박살 내버린다.
바나나 유령은 왜 나왔는지 모른다.
분명 아이가 바나나 껍질을 던지는 장면을 생각하다가
“그 껍질이 원혼처럼 살아나면 어떨까?”
라는 이상한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그 순간부터 기획안은 안중에도 없었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상상은 홀덤 용어을 존중하지 않는다.
오히려 홀덤 용어을 뛰어넘는 순간,
상상은 진짜 자기 색을 드러낸다.
그림책이든 이야기든
홀덤 용어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하면
어딘가 각이 져 버린다.
너무 반듯해서 재미가 없고,
너무 잘 짜여서 숨 쉴 틈이 없다.
그런데 상상은 홀덤 용어을 싫어한다.
대신 틈새를 좋아한다.
그 틈에 슬그머니 기어들어와
깔깔 웃으며 좌판을 펼친다.
가끔은 “그림책은 어떻게 기획하세요?”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한다.
“기획이요? 음… 상상하다 보면 되더라고요.”
물론 편집자는 깜짝 놀란다.
하지만 진심이다.
홀덤 용어은 나침반이고,
상상은 바람이다.
둘 다 필요하지만,
그림책이 진짜 날아가는 순간은
홀덤 용어이 아니라 상상이 바람을 탈 때다.
상상은 엉뚱하고,
방향을 예측할 수 없고,
가끔은 말도 안 되지만,
그게 매력이다.
아이들이 그린 괴물 그림을 보면
다리가 셋이거나 눈이 열두 개다.
우리는 그걸 ‘이상하다’고 말하지만,
아이들은 아무 문제도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홀덤 용어 없이도 괴물을 완성할 수 있는 능력자들이니까.
나는 그런 아이들의 상상력을 빌리려고
홀덤 용어을 세우다가도,
문득 홀덤 용어을 잊는다.
그리고 그게 잘 굴러간다.
상상은 원래
홀덤 용어을 비웃으면서도
세상에서 제일 멋진 결과를 가져오는 존재니까.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획안은 잠시 덮어두고,
바나나 유령에게 말을 걸어본다.
“야, 너 어디서 왔니?”
그리고 또 하나의 상상이 굴러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