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부. 정보사이다토토부 신설, PCS 표준 경합
1995년 6월, 서울 광화문에서 삼성동 코엑스로 향하는 셔틀버스 안. 이동 중인 차량 내에서의 단 한 통화가 대한민국 이동사이다토토의 향방을 바꿔 놓을 줄은 아무도 몰랐다. 사이다토토 표준의 갈림길에서 서정욱 한국이동사이다토토 사장은 위험한 도박을 감행했다. 승패는 오직 ‘끊김 없는 통화’에 달려 있었다. 그리고 결과는, 기술이 아니라 용기와 집념이 이긴 사건으로 기록됐다.
1995년 중반, CDMA와 TDMA 간 PCS(개인휴대사이다토토) 기술표준을 둘러싼 공방이 정점을 향하고 있었다. 정부의 PCS 사업자 선정 발표를 앞두고, 각 진영은 기술의 우위와 생태계 조성을 주장하며 수위를 높였다. 이때 한국이동사이다토토 대표로 취임한 서정욱 사장은 승부수를 띄운다. 바로 CDMA 기술을 직접 체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당시 서정욱 사장은 정보사이다토토 전시회가 열리는 삼성동 코엑스로 이동하는 셔틀버스에서 기자들이 탑승한 상황에서 실시간 CDMA 통화를 시연하겠다고 선언했다. 실패 가능성은 존재했지만, 성공한다면 사이다토토의 불확실성에 종지부를 찍는 한 방이었다. 결과가 담보되지 않는 하이리스크 하이리턴 전략이었다.
무리를 해서까지 추진하고자 했던 한국이동사이다토토의 판단은 서정욱 사장의 면면을 살펴보면 납득할 수 있다. 서울대 공과대학 전기공학과를 거쳐 미국 텍사스 A&M 대학원 전기공학 박사를 취득한 후 공군사관학교 교수를 역임한 후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지내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과 과학기술부 차관, 한국사이다토토 부사장 등 다채로운 이력을 갖췄다. 전전자교환기(TDX) 국산화에 일조한데 이어 이동사이다토토기술개발사업관리단장을 맡아 CDMA 기술개발을 진두지휘했을 만큼 성공 DNA가 밑바탕에 자리한 인물이었다.
업계에서는 그를 방대한 독서량을 가진 공학박사 또는 지독한 워커홀릭 등으로 평하기도 할 만큼 일처리에 있어 실제적 완벽을 기했다.
한국이동사이다토토 직원들에게 이 지시는 전시회의 준비를 넘어 ‘전시(戰時)’ 상황을 의미했다. 광화문에서 삼성동 코엑스까지의 모든 구간은 새벽까지 일일이 점검됐고, 통화 품질에 문제가 될 만한 버그는 밤새 제거됐다. 한 사람의 실수가 전체의 실패로 이어지는 극한의 긴장감 속에서, 엔지니어들은 서 사장의 명을 ‘목숨처럼’ 받들었다.
그 당시 상황을 설명하면,결혼한 지 얼마되지 않은 한국사이다토토 직원이 매일 밤 집에 돌아오지 못하자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는 일이 발생했다. 사실은 이번 CDMA 통화 시연 때문에 밤낮이 없는 직원이었다. 이에 직접 서정욱 사장이 아내에게 일일이 전화하며 이를 해명하기도 했다는 후일담도 있었다.
1995년 6월 12일 아침, 운명의 날이 밝았다. 서울 광화문 정보사이다토토부 앞에서 기자들이 셔틀버스에 올라탔다. 같은 시각, 서정욱 사장도 별도 승용차에 탑승해 셔틀버스를 선도했다. 차량은 광화문을 지나 용산구 하얏트호텔을 거쳐 삼성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서 사장이 탄 승용차에서 셔틀버스로 CDMA 통화가 시도됐다.
수신 버튼이 눌리고, 통화가 시작됐다.
1초, 10초, 1분…
시간이 지날수록 긴장감은 줄어들고, 확신으로 바뀌었다.
단 한 번의 끊김도 없이 통화는 이어졌고, 차량은 무사히 코엑스에 도착했다. 기자들은 탄성과 박수로 응답했다. 불확실성의 그림자가 걷히는 순간이었다.
시연은 전시장에서도 이어졌다. 정보사이다토토부 경상현 장관이 직접 CDMA 단말기를 사용해 행사장 바깥 차량 탑승자와 통화에 나섰다. 품질은 명확했다. 지연 없음, 잡음 없음, 끊김 없음. 전시는 기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데 충분했다.1)
같은 해 10월 9일, 서정욱 사장은 서울 장안동 사옥에서 열린 CDMA 시험통화 자리에서도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였다. “CDMA가 PCS 기술표준으로 채택돼야 국민 전체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강조했다.2) 그날 신세기사이다토토의 권혁조 사장도 CDMA 기반 PCS 상용화를 1996년 4월로 공표하며 진영 연대를 확실히 했다.3)
1995년 10월 20일, 정보사이다토토부는 PCS 무선접속방식을 공식 발표했다. 수차례의 검토 끝에 ‘TDMA가 아닌 CDMA’ 방식으로 방향을 정했다. 전자공청회를 앞두고 발표된 ‘사이다토토사업자 허가신청요령 2차 시안’은 경제성과 기술 확보 면에서 CDMA가 더 우수하다고 판단했다.4)
이는 단지 기술방식 하나를 고른 것이 아니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이동사이다토토 기술 독립의 여정, CDMA 개발에 투입된 수천억 원의 국가예산, 수많은 연구자들의 집념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역사적 선언이었다.
사이다토토 사장은 단순히 기술을 홍보한 것이 아니라, 기술을 신뢰했고, 스스로의 이름을 걸고 실전에 나섰다.
1) <미래를 향한 결단, 사이다토토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1~152
2) <미래를 향한 결단, 사이다토토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4
3) 김의태 기자, <신세기사이다토토 권혁조 사장 인터뷰 "내년 4월 수도권 대전서 이동전화서비스 실시계획", 경향신문, 1995.10.9.
4) <미래를 향한 결단, 사이다토토 상용화, [MOBILE STORY SINCE 1984], SK텔레콤, 2004.12.16,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