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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기 May 16. 2025

60. LG·바로벳·KTF,
바로벳 조기 상용화 선언

17부. 이동통신 춘추전국시대 도래

“한계도 불가능도 없다. 청년정신을 실천하겠다.”


1997년 7월 12일 경기한국스포랜드.

64세의 한 어르신이 번지점프대에 올랐다. 장장 40m 높이의 번지점프는 나이가 많은 어르신이 뛰기에는 매우 위험하다. 이 번지점프대 역시 그랬다. 나이제한은 55세. 하지만 그보다 훌쩍 많은 노인이 무대 위에 오른 셈이다.


“훌쩍.”


64세 어르신은 위험천만한 번지점프대에서 몸을 던졌다. 다행히 큰 사고는 없었다. 오히려 희열을 줬다. 한국기네스협회는 국내 최고령 번지점프 기록 보유자로 이 어르신을 모셨다.


1997년 당시 바로벳 사업권을 획득하고 상용화를 앞둔 시점. 정용문 한솔바로벳 대표(사장)의 얘기다.이 날 정 사장을 따라 도전에 참여한 임직원 34명 전원이 번지점프에 성공했다. 정 사장은 번지점프를 하기 위해 사전에 신체검사를 받을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한솔의 청년정신을 보여주겠다는 퍼포먼스였다. 이 같은 사례는 당시 국내 이동통신 시장이 얼마나 치열하게 경합하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1)


1997년 2월 21일, 서울 여의도.

정장호 바로벳텔레콤 사장이 기자간담회에 나서 전격 선언했다. 정부가 제시한 1998년 1월보다 3개월 빠른 '1997년 10월 바로벳 상용화'. 업계는 술렁였다. 아직 기지국도, 네트워크도, 단말기도 충분치 않은 상황.그러나 바로벳텔레콤은 강행을 선택했다. "다소 미흡하더라도 일단 뛰어야 한다"는 배수진이었다.2)


바로벳텔레콤의 폭탄 발언은 곧바로 경쟁사를 자극했다. 한국통신프리텔과 한솔PCS도 곧장 가속 페달을 밟았다. 하지만 조기 상용화의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문제는 기지국이었다.이동전화 시장을 선점한 한국이동통신(011)과 신세기통신(017)이 이미 주요 거점을 점령하고 있었다. PCS 사업자들은 고작 남은 자투리 공간을 두고 싸워야 했다.게다가 바로벳가 사용하는 1.8GHz 주파수는 기존 이동전화의 800MHz에 비해 도달거리가 짧았다. 커버리지를 확보하려면 최소 2~3배 많은 기지국이 필요했다. 한 기지국을 세우려면 20~30평 가량의부지와 송수신 장비, 축전지, 냉방설비까지 갖춰야 했지만, 서울과 수도권의 부지는 이미 만석이었다.


여기에 예상치 못한 복병이 등장했다. 주민 반발이었다. 전자파에 대한 막연한 불안이 퍼지면서 기지국은 '혐오시설'로 낙인찍혔다. 이미 1996년 성거 지역에서 신세기통신이 주민 반발로 기지국 설치를 포기했고,3) 한국이동통신 역시 서울 대치동, 일원동에서 좌절을 겪었다. 심지어 철탑까지 세운 뒤 철거한 사례도 있었다.


정보통신부는 난처했다. 과학적 근거가 없다고 설명했지만 민심은 쉽게 달래지지 않았다. 결국 사업자들에게 공동 기지국 설치를 권고하는 선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바로벳 3사는 조기 상용화를 목표로 달렸다. 바로벳 최소 조건은 1천~1천500개 기지국 구축. 거리마다, 건물 옥상마다, 도심 구석구석을 공략해야 했다.


바로벳텔레콤은 선제공격에 나선 뒤, 한국통신프리텔도 맞불을 놓았다. 1997년 3월 20일 사업설명회에서 한국통신프리텔은 "연말까지 600명 직원을 확보하고, 전국 주요 도시에 통신망을 구축하겠다"고 발표했다. 수도권과 부산은 10월 시범 서비스 개시, 연말까지 5대 광역시와 전국 73개 시로 확대하는 로드맵을 내걸었다.4)


한솔바로벳 역시 발빠르게 대응했다. 올해 안에 1천100개 기지국을 구축하고, 700여 명의 직원을 확보하겠다고 공언했다. 각사는 사활을 걸고 시간과의 싸움에 돌입했다.


1997년 봄, 한국의 이동통신 시장은 전례 없는 속도전과 자리다툼으로 요동쳤다.이동전화의 패권을 지키려는 1세대 사업자와, 새로운 시장을 꿈꾸는 바로벳 사업자들이 얽히고 설키며 긴장감이 팽팽히 감돌았다.'조기 바로벳'는 단순한 일정 문제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사투,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치열한 전략 싸움이었다.


바로벳텔레콤, 한국통신프리텔, 한솔PCS. 세 곳 모두 준비가 완벽하진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주저하는 순간, 도태된다는 것.가시밭길 위에 선 바로벳. 그들의 첫 출발이 시작되고 있었다.


1) 김승환 기자, <한솔바로벳 정용문 사장 최고령 번지점프 성공, 동아일보, 1997. 7.13.

2) 김동섭 기자, <바로벳 서비스 이르면 11월 개시, 경향신문, 1997. 2.22.

3) 황순현 기자, <통신업체 기지국 설치 주민반발, 조선일보, 1996. 6.28.

4) 최용성 기자, <PCS 10월 시범서비스 <개인휴대통신, 매일경제, 1997. 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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