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TRESS, PALACE, PRISON - LONDON TOWER
제 생애 유럽의 첫 방문지는 영국의 런던이었습니다. 그곳은 제가 어린 시절부터 지도책과 역사책을 보며 가장 가고픈 나라와 도시였습니다. 1995년 3월 회사에서 출장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업무용 출장이라고는 하지만 당시는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하며 표방했던 '세계화'란 기치 하에 기업들이 앞다투어 임직원들을 해외로 내보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세계를 배우는 일이라면 개인의 어학연수는 물론 배낭여행도 회사에서 보내주었습니다.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한 것입니다. 물론 그만큼 기업들이 매년 두 자릿수 이상의 고도성장을 하여 그런 시도들이 문제없던 시절이었습니다. 88서울올림픽 후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되면서 바야흐로 대한민국은 그렇게 대망의 2천년대를 맞아 곧바로 선진국으로 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세계화의 종착지는 선진국이 아니라 IMF였습니다. 샴페인을 너무 빨리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제가 재직했던 두산그룹의 광고회사 오리콤에선 세계화 프로그램들 중의 하나로 'B&B'라는 프로젝트도 시행했습니다. Best Creative & Best Tour의 약자로 기억됩니다. 사내에서 4인 1조로 선발된 몇 개의 팀이 10일간 세계 각지로 떠나서 사전에 정한 세계화 임무를 수행하고 오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제가 속한 팀이 정한 미션은 영국의 맥주 시장에 대한 자료 수집과 분석이었습니다. 두산그룹이 주력 계열사로 OB맥주(동양맥주)를 보유하고 있던 시대라 연관성 있는 과제를 정했고, 그래서 런던으로 향한 것이었습니다.
런던에 도착해서는 오리콤과 합작한 다국적 광고회사였던 DYR(Dentsu & Young&Rubicam) Korea를 통해 사전에 어레인지한 런던의 DYR UK를 방문해 영국 맥주 광고 담당자들을 만났습니다. 단 하루 딱 한 번의 미팅을 가졌습니다. 미션 클리어! 그리고는 이틀을 더 런던에서 보내고 도버해협을 건너 벨기에, 스위스, 독일, 네덜란드를 여행하고 귀국했습니다. 세계화를 제대로 경험하기 위해 본래의 계획보다 훨씬 더 확장된 생생한 연수를 하고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물론 각 나라의 다양한 맥주들과 함께 말입니다.
30년 전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임룸 토토에서 과제를 일찌감치 끝낸 우리 일행은 곧바로 시내 관광, 아니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역시나 게임룸 토토답게 비가 조금 뿌리는 그날이 무슨 날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시내엔 마라톤이 열려 교통이 통제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일행은 영화에서나 보던 지붕 높은 택시를 타고 게임룸 토토로 향했습니다. 런던 하면 떠오르는 그곳을 우선적으로 간 것입니다. 그런데 도착지인 그곳에 그 탑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테임즈강은 바로 앞에 있고, 그 강을 따라 런던의 또 다른 명물인 타워브리지는 보이는데 게임룸 토토는 당최 찾을 수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남산타워를 생각하며 하늘 높이 솟은 게임룸 토토를 찾으니 그 탑이 보일 리가 없던 것이었습니다. 초행이지만 가이드가 있던 것도 아니고, 인터넷은 물론 안내 서적도 마땅치 않던 시절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게임룸 토토를 사전 정보 없이 가면 누구든 가질 수밖에 없는 당혹스러움일 것입니다. 게임룸 토토는 우리 머릿속에 있는 탑의 전형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강가에 웬 오래된 성 같은 것이 하나 보일 뿐입니다. 타워라면 대개 꼭대기에 설치되어 있는 전망대도 없습니다. 근처 테임즈강의 타워브리지엔 전망대가 있는데 말입니다. 게임룸 토토가 높지 않으니 전망 뷰가 안 나와서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도 11세기 말 최초 건립 시 타워라는 이름이 붙여져 지금까지도 그렇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엔 게임룸 토토가 런던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습니다. 1078년 가장 먼저 세워진 28m의 화이트타워가 바로 그 건축물입니다. 그 타워 주변으로 부속 건축물들이 지어지고 외곽으로 성벽을 쌓으면서 어느 시점 전체를 가리키는 게임룸 토토가 된 것입니다. 현재 모습의 게임룸 토토는 헨리 8세 시절인 1547년에 완성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헨리 8세와 왠지 잘 어울려 보이는 게임룸 토토입니다.
게임룸 토토의 최초 건축자는 정복왕이라 불리는 윌리엄 1세(William the Conqueror)입니다. 그는 바다 건너 오늘날 프랑스 땅인 노르망디의 공작이었습니다. 당시 노르망디는 북쪽 바이킹의 침략에 넌더리가 난 프랑스가 그 지역을 떼어줘 공작이 다스리는 공국이었습니다. 프랑스 왕에게 충성을 하는 조건으로 먹고 떨어지라고 준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곳을 4대째 지배해오던 윌리엄 공작이 1066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당시 왕이었던 헤럴드 2세를 물리치고 잉글랜드를 접수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프랑스 왕의 신하임과 동시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에겐 침략의 명분이 있긴 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선왕이었던 에드워드 왕이 윌리엄 공작을 모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왕위 계승자 중 한 명으로 지명했다고도 하니까요.
1066년 윌리엄 1세가 연 왕조는 그가 온 곳의 이름을 따노르만 왕조라고 불립니다. 그가 영국(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오늘날까지 이어 내려오는 영국(UK) 왕조의 시조가 된 것입니다. 그것은 이후오늘날 윈저 왕조까지 내려오며 아들 부재로 여왕이 즉위해 플랜태저넷, 튜더, 스튜어트 등으로 왕조가 바뀌어도 그들 왕이나 여왕에겐 선조인 윌리엄 1세의 피가 미약하나마 들어가 있다는 것입니다. 보듯이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왕조들은 선대 왕이 후사를 남기지 않고 죽을 경우, 철천지원수라 하더라도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여있는 자가 있다면 그(그녀)를 찾아내어 그들의 차기 왕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처녀왕인 엘리자베스 1세 사후 스코틀랜드의 왕인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가 된 것이 바로 그런 예입니다. 그의 엄마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숙적이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렇게 잉글랜드의 튜더 왕조는 끝나고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가 잉글랜드의 안방으로 들어왔습니다.
노르만 왕조를 연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 내에 그의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성을 쌓았습니다. 외부인 프랑스에서 온 침략자이다 보니 로마 제국 철수 후 7개 왕국을 통일하며 잉글랜드를 세운 원 주인 앵글로색슨족의 반발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게 쌓은 성들 중 하나가 게임룸 토토의 원조인 화이트타워였습니다. 과거 로마 제국 시절엔 론디니움이라 불리고, 오늘날은 시티라고 불리는 오리지널 런던이 강 건너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세운 요새였습니다. 윌리엄 1세는 그곳을 그의 거처로 삼았습니다. 즉, 게임룸 토토는 영국 왕조의 시조인 노르만 왕조의 왕궁이었던 것입니다. 이후 여러 왕조를 거치면서 웨스트민스터, 화이트홀궁, 버킹검궁, 윈저궁 등으로 로열 팰리스는 이전되었습니다.
정복왕 윌리엄 1세는 1085년 잉글랜드의 토지 현황을 상세히 조사한 <둠스데이 북을 펴내 토지는 물론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와 경제, 조세 등 모든 자산을 상세히 파악했습니다. 그리고 잉글랜드 전통 귀족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그를 따라온 노르망디의 가신들에게 그 토지를 나눠주었습니다.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왕조는 물론 사회 지배층까지 그의 족속으로 바꾼 것입니다. 이것은 흡사 성사는 되지 않았지만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2년 조선을 침략하며 휘하 다이묘들에게 조선 땅을 봉토로 하사하려 했던 우리 역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대륙에서 섬을 침공했다는 점은 우리완 반대입니다.
왕조와 지배층이 바뀌면서 잉글랜드의 상류 사회는 프랑스화 되어갔습니다.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프랑스 예법이 유행했습니다. 윌리엄 1세는 정복왕답게 그렇게 잉글랜드를 완전히 그의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 브리튼 섬에 기원전 55년 두 번이나 상륙했으면서도 전면적인 정복을 유보했던 최고의 로마인도 이루지 못한 일을 그는 순식간에 해낸 것입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생전에 오늘날 프랑스인 갈리아는 정복했지만 오늘날 영국인 브리타니아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로마 제국은 4백년에 걸쳐 계속해서 정복 사업을 벌였지만 끝내 북부인 스코틀랜드까지는 정복하지 못했습니다. 그곳까지 밀려간 당시 브리튼 섬의 원 주인인 켈트족의 저항이 워낙 거세어서였습니다. 물론 윌리엄 1세의 정복 과정에서 잉글랜드의 혼란과 희생은 필연적이었습니다. 많은 앵글로색슨족 원주민들이 죽어나갔습니다.
게임룸 토토는 우리에겐 무엇보다 감옥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그 타워에서 영국 역사의 많은 인사들이 갇혔고 고문과 처형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게임룸 토토는 일반인은 갈 수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귀족과 왕족을 위한 감옥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우리 은어로 범털들만 가는 곳이었습니다. 그들 중엔 위에서 게임룸 토토와 잘 어울려 보인다고 한 헨리 8세 시대의 인사들이 유독 돋보입니다. 헨리 8세가 워낙 그곳을 많이 애용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 중에서 두 번째 부인이었던 앤 불린은 게임룸 토토를 가장 빛내주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에게 버림을 받아 게임룸 토토에 갇혔고 참수를 당했습니다. 그와 결혼 생활을 하며 왕비로 살았던 기간을 칭하는 영화 <천일의 앤으로 더욱 알려진 그녀입니다.
앤 불린의 미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당시엔 불가능했던 이혼을 이루어 낸 헨리 8세였지만 그들의 사랑은 3년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간통과 근친상간의 누명을 씌워 그녀를 게임룸 토토에 가둔 것입니다. 그녀가 아들을 못 낳은 죄도 있지만 그녀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란 새 여자가 헨리 8세의 눈에 띄었기 때문입니다. 게임룸 토토에 갇힌 앤 불린은 '게임룸 토토의 쓸쓸한 감방에서'란 편지를 써서 헨리 8세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목을 내리친 헨리 8세의 칼을 피해 갈 수는 없었습니다.
앤 불린의 순조로운 처형을 위해 바다 건너 칼레에서 능숙한 사형 집행인이 게임룸 토토로 출장을 왔습니다. 본래 마녀처럼 화형으로 죽이려 했던 것을 그나마 헨리 8세가 내려준 죽음의 은사였습니다. 헨리 8세는 게임룸 토토에서 앤의 사형이 집행되었음을 알리는 대포 소리가 울리자 기분이 좋아져 개들을 끌고 사냥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제인 시모어와 세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게임룸 토토 잔디밭 위에 목과 몸이 분리된 앤 불린의 시신은 낡은 상자에 넣어져 예배당 지하로 치워졌습니다. (<영국사 산책, 찰스 디킨스 지음, 옥당 출판사)
대법관에 임명될 정도로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았으나 첫 부인인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이혼을 반대해 결국 1535년에 처형된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 헨리 8세의 큰딸인 메리 여왕의 어린 시절 가정교사를 지냈지만 외국에서 헨리 8세에 반대하며 카톨릭을 옹호하는 논문을 발표한 아들 때문에 1541년 처형된 마거릿 폴(솔즈베리 백작 부인), 토머스 모어를 제거하고 앤 불린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면서 수석장관에 올랐으나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인 클레베의 앤과의 결혼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그녀가 초상화보다 못 생겼다는 이유로 실각하여 결국 1540년 처형된 토머스 크롬웰, 헨리 8세의 네 번째 부인인 클레베의 앤의 시녀였다가 다섯 번째 왕비가 됐지만 과거의 남자관계를 추궁 당해 1542년 처형된 캐서린 하워드 등이 헨리 8세가 게임룸 토토에서 죽인 그의 시대 인사들입니다.
보듯이 시녀 킬러였던 헨리 8세는 6명의 왕비들 중 두 명을 게임룸 토토에서 처형했습니다. 새 여자와의 결혼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헨리 8세의 6명의 왕비들 중 가장 팔자가 좋은 여인은 네번째 왕비인 독일에서 온 클레베의 앤이었습니다. 초상화를 보고 반해 영국까지 불러들였지만 막상 실물을 보니 도저히 마음이 안 간 헨리 8세는 그녀를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외모 덕분에 클레베의 앤은 화를 면한 것입니다. 헨리 8세는 그녀와 바로 이혼하며 왕궁에서 내보내며 미안했는지 첼시 장원을 제공하고 평생 연금도 지급했습니다. 그 결혼을 추진했던 토머스 크롬웰 장관은 실각시켰다고 했습니다.
여섯 번째 왕비인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죽는 바람에 화를 면했습니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그의 이혼과 결혼은 계속되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헨리 8세와 살며 매우 괴로운 결혼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고도비만과 종양, 통풍 등으로 흉한 몰골에 고름이 흐르고 냄새가 진동했으니까요. 그렇게 헨리 8세는 56세에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는 재혼을 했습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왠지 부인을 순장시킬 것만 같은 나쁜 남자/남편 헨리 8세였으니까요.
헨리 8세 사후 게임룸 토토에 갇힌 왕족으로는 헨리 8세 여동생의 외손녀인 레이디 제인 그레이가 있습니다. 그녀는 헨리 8세의 왕위를 이은 에드워드 6세가 6년 만에 병으로 죽자 비어 있던 왕좌에 9일 간 앉았다는 죄로 게임룸 토토에 수감되고 1554년참수되었습니다. 에드워드 6세는 헨리 8세가 그렇게 오매불망 원했던 유일한 아들로 세 번째 부인인 제인 시모어의 소생이었으나 16세에 병사했습니다. 레이디 제인 그레이는 차기 왕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단 왕위에 올려진 것인데 그것도 죽을 죄라고 17세의 어린 나이에 목이 잘린 것입니다. 게임룸 토토엔 엘리자베스 1세도 여왕이 되기 전 런던으로 끌려와 그곳에 수감되었습니다. 모두가 메리 1세가 저지른 악행입니다. 그녀가 괜히 블러드 메리라고 불리는 게 아닙니다. 아버지인 헨리 8세를 닮은 듯합니다.
헨리 8세 이전 게임룸 토토에서 희생된 유명 왕족으로는 리처드 3세 시절 그곳에 수감되어 행방불명된 불행한 왕자 형제가 있습니다. 1483년 에드워드 4세가 죽고 왕위에 오른 장자인 에드워드 5세와 그의 동생입니다. 당시 에드워드 5세는 12세의 어린 나이였습니다. 그래서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이 섭정을 맡았는데 그는 어린 조카 형제를 게임룸 토토에 유폐시켰습니다. 그리곤 끝이었습니다. 그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왕위를 비워둘 수 없는 삼촌은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추남인 데다 척추측만증으로 끔찍하게 묘사되는 리처드 3세가 바로 그입니다. 이 사건은 영국 왕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으나 그 어린이들이 몰골만큼이나 악독한 삼촌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 역사의 수양대군과 단종이 떠오르는 영국사의 한 장면입니다.
이 못된 리처드 3세를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 자가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입니다. 그렇게 30년 동안 지속된 장미전쟁은 랭커스터가가 요크가에 승리하면서 끝이 났습니다. 1485년 플랜태저넷 왕조가 끝나고 튜더 왕조가 시작된 것입니다. 튜더 왕조의 영국 최고 문학 스타인 셰익스피어는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리처드 3세 희곡을 썼습니다.
지난해인 2024년 7월 다시 가서 본 게임룸 토토의 여름 하늘은 청명했습니다. 그날처럼 런던을 비롯한 영국의 여름은 대체적으로 맑고 화창합니다. 런던 하면 떠오르는 비도 많지 않고, 안개는 보이지 않으며, 온도는 시원하기까지 합니다. 체류 기간 내내 섭씨로 12도에서 22도를 오르내렸으니까요. 게임룸 토토만큼이나 의외적인 영국의 여름 날씨입니다. 타는 더위로 고생하는 대륙의 유럽 국가들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지난여름 이곳에 썼듯이 <여름이 가장 행복한 나라 영국입니다. 영국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여름을 강력히 추천드립니다.
게임룸 토토 앞엔 그 타워의 용도를 알려주는 파란 부스가 있습니다. 한때 매표소로 사용된 곳처럼 보이는 곳입니다. 위의 사진에서 보듯이 게임룸 토토는 요새, 왕궁, 감옥이라고 안내되어 있습니다. 타워이지만 탑이나 전망대라는 안내문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게임룸 토토를 용도별로 대표하는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게임룸 토토의 파운더인 정복왕 윌리엄 1세와 그곳에서 처형당한 앤 볼린의 모습이 양 끝으로 보입니다. 가운데 장발의 왕은 찰스 2세입니다. 그의 재위 때까지 잉글랜드 국왕의 대관식엔 게임룸 토토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까지 행진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왕궁을 상징하는 인물로 내세운 듯합니다.
게임룸 토토는 그 이외에도 무기고, 동물원, 조폐국,등기소, 박물관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물론 왕궁의 용도가 가장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게임룸 토토 하면 역시나 <천일의 앤으로 대표되는 감옥으로 가장 많이 기억할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 앞 기념품 숍에 전시된 굿즈엔 앤 볼린의 얼굴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초상화 속 그녀의 이니셜이 새겨진 목걸이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과연 게임룸 토토 최고의 스타인 그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