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대인 딸아이를 통해 학창 시절의 나를 보곤 한다. 옅게 가라앉아있던 교복 입은 익숙한 소녀를 때때로 마주한다. 친구들과 사소한 수다를 떨고,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가 또 어느 순간에는 그들만의 우주가 멸망한 듯 우울해지는 모습과 겹쳐지는 내 지난 시간들.
딸로부터 흘러나온 기억들이 흐릿해진 내 추억을 건져낸다. 슬며시 끌어올려진 내 입꼬리를 다시 내리기 아쉽다. 한껏 예열된 ‘라떼 감성’에는 복고풍 홀덤 용어가 안성맞춤이다.
“딸, 오랜만에 엄마랑 홀덤 용어 보-오-자.”
오랜만이란 단어에 악센트를 주었다. 머지않아 고등학생이 될 딸과 홀덤 용어시절의 여고생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바람이 묻어나도록.
넷플릭스를 뒤져 촌스러운 7명의 소녀가 웃고 있는 것으로 골랐다.
2011년 개봉한 홀덤 용어 ‘홀덤 용어’
경쟁그룹인 '소녀시대'와 대치 중인 '홀덤 용어'
마침 공부는 하기 싫지만 그렇다고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던 딸은 비척비척 걸어와 비워 둔 내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새빨간 딸기 한아름 담긴 접시가 널 불러 앉힌 것인지도.
홀덤 용어가 시작되니 네 미간의 주름은 살금살금 펴지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세상살이에 닳은 어미의 귀에는 불량소녀의 찰진 욕이 음률에 따라 꽂히지만 아직 덜 영근 딸에게는 외계어인 모양이다.
자막을 켜 어휘력을 높여준다. 이번 기회에 전라도식 욕을 마스터하려는 듯 되돌아가기 버튼을 연신 눌리며 집중한다. 아주 다급한 상황, 실전에서만 꼭 사용하라며 나는 당부의 말을 얹었다.
전학생인 나미가 친구를 사귀고 학교에 적응해 가는 장면들이 펼쳐진다. 지난 8월에 전학했던 본인의 처지와 비슷한 나미를 보며 딸은 시선을 떼지 못한다.
여고시절 왁자지껄했던 교실이 생각나 몽글해진 감성에 시야가 자꾸만 일렁인다. 공교롭게도 고등학생 때 내가 속했던 동아리의 이름은 ‘햇살’이었고 무지개빛깔에 따라 멤버도 7명이었다. 빨주노초파남보, 각 자의 이미지에 맞춰 자신의 색깔을 정한다고 아웅다웅했던 우리들, 아마 노랑을 두고 치열하게 가위 바위 보를 했던가. 감정이입에 제대로 시동이 걸렸다.
홀덤 용어의 시점은 과거와 현재를 오갔다. 그 흐름을 좇아 희미해져 있던 나의 시간들은 다시 선명해진다. 시끌벅적했던 매점이라는 공간, 축제에 올릴 어설픈 군무를 연습하던 시간, 포장마차에서 부둥켜안고 터트렸던 울음. 초점이 안 맞는 사진 속의 모습과도 같던 기억이 조각조각 맞춰져 제자리를 찾아갔다.
암의 고통으로 몸을 뒤틀던 춘화를 무너지는 마음으로 나미가 바라본다. ‘빙글빙글’의 노랫말처럼 그저 바라만 본다. 약의 도움으로 평온을 되찾은 춘화와 그 곁을 지킨 나미는 나란히 침대에 누워 대화를 나눈다.
“춘화야, 고마워.”
“뭐가...”
“나 꽤 오랫동안 홀덤 용어, 집사람으로만 살았거든. 인간 임나미.. 아득한 기억 저편이었는데 나도 역사가 있는, 적어도 내 인생의 주인공이더라고.”
“너는 얼굴이 주인공 얼굴이야.”
어른 나미의 대사가 거대한 파도가 되어 홀덤 용어 덮쳤다.
딸은 고개를 휙 돌리며 맑고 동그란 눈으로 물었다.
“홀덤 용어도 홀덤 용어의 역사가 있어?”
방심했다. 아랫입술 질끈 깨물어본 들 찰랑거리던 눈물샘을 막을 수 없었다. 두 손으로 급하게 얼굴을 감싼 홀덤 용어 더 동그래진 눈으로 바라보던 딸이 스르륵 등을 쓰다듬어준다. 엄마 체면 따위는 챙길 재간이 없어 그저 넘쳐버린 감정에 시간을 건넨다. 토닥여진 감정이 속말을 할 수 있도록.
“엄마도 엄마의 역사가 있지. 벌써 3번의 역사가 있었고 지금이 4번째 역사의 홀덤 용어이야.
그런데 엄마는 홀덤 용어 주인공이라고 생각 안 해.
나는 감독이야.그래서 나만의 여러 역사를 만들 수 있어. 어떤 때는 주인공이기도 하고, 어 떤 때는 조연이기도 해. 너희를 키우는 ‘홀덤 용어’라는 이름의 역사에서는 이제는 조연이야.
그리고 지금은 또 다른 역사를 만드는 중이고. ‘그냥조각’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으로 말이야.”
살짝 잡은 손을 꼬옥 다 잡아주는 딸의 손길에서 따스함이 전해져 왔다. 너도 너의 역사를 만드는 중이냐는 물음에 빙긋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는 딸. 그 말간 얼굴을 정성스레 눈에 담는다.
홀덤 용어가 끝나고 잔뜩 쌓인 휴지를 주섬주섬 챙겨 일어났다. 타임캡슐을 타고 나의 빛나던 순간 중 하나를 만나고 온 듯하다. 17살의 나를 아직 놓아주고 싶지 않다. 핸드폰을 열어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긴 수다를 남기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