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냥조각 Jan 06. 2025

눈꽃 아닌 눈물의 콜로세움 토토

너의 버킷리스트

“눈 덮인 산에 가보고 싶어.”


한반도 끄트머리의 지방거주자로 고등입시 입구에 들어선 중2 말년병인 아들은 묵혀둔 버킷리스트를 얘기했다. 발목부터 차오른 고등 진학에 대한 부담이 스멀스멀 기어올라 영역을 확장하던 때이다.

사춘기여서 그래. 아니, 흔들리는 아이의 눈동자를 호르몬의 탓으로 슬쩍 넘기기엔 녀석이 느끼는 중압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님을 안다.


그즈음 아들은 어지간해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폭발한 식욕으로 매일 갱신 중인 몸무게 때문인지, 친구들과 만나 에너지를 이미 다 쓰고 왔기 때문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부모와 함께하는것은무엇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어느 쪽의 이유건 내 마음에 안 들기는 매 한가지다. 모로 뜬 눈, 가자미가 되어 녀석을 보던 시기에 아이가 먼저 곁을 내주었다.

너와 나, 탯줄로부터 연결된 직감이 발동된다.


“가자! 가야지! 학원 빼!”


등산 가자는 말이 뭣이라고 고마움과 설렘에 가슴이 부풀어 올라 내 광대도 함께 승천한다.인생 첫 데이트를 앞둔 소녀마냥 두서없이 날뛰는 심장을 애써 가라앉혔다.




소복소복 눈 쌓인 산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대한민국 남쪽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눈 구경이 하늘의 별따기다. 어쩌다 찔끔 내린 눈은 이내 녹아 사라져 지저분해진 도로만 덩그러니 남겨둔다. 눈이란 것이 이곳에도 존재한다는 사실만 알 수 있도록. 교실에서는 내리는 눈을 직관한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사이에는 묘한 우월감과 의문의 패배감이 감돌기 일쑤다.


지금부터는 속도가 중요! 변덕쟁이 녀석으로 빙의되기 전에 빼도 박도 못할 일정으로 예약해야 한다.

“차로 가는 것보다 취소 수수료가 있는 비행기가 좋겠네.”

“그럼 제주도잖아.”

“OO가 한라산 콜로세움 토토산행이 좋다 하네. 일출이 멋있다던데 ”

대문자 P형 인간다운 얼렁뚱땅 정보수집과 실행력으로 2월 어느 날을 D-day로 확정.


목적지는 영실탐방로 윗세오름이다.

등산로 길이 3.7km, 등산 소요시간 왕복 약 3시간. 한라산 코스 중 가장 짧지만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도 손꼽히는 곳이라니 너와 나의 바닥체력에 안성맞춤이네.

아무리 쉽다한들 눈길 제대로 걸어 본 적도 없는 우리는 준비가 필요하다. 냅다 걷기 운동부터 시작콜로세움 토토. 쪼그라든 앞벅지, 뒷벅지 근육부터 살리고 볼 일이다.

콜로세움 토토코스는 식은 죽 먹기의 코스로 알려져 있지만 그건 너님들 생각이고, 저질하체인 우리 모자는 숨쉬기 운동보다 강도 높은 움직임으로 필승을 다진다.


출발일이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분주하다. 한라산 실시간 CCTV에 매일 접속하며 눈이 녹지는 않았는지, 탐방이 불가능한 것은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너의 버킷리스트에 올려져 있는 ‘콜로세움 토토산행 다녀오기’라는 목록에 내 밥숟가락도 올리고 싶은 심산이다. 얼기설기 이어 붙인 너와 나의 관계에 온박음질 한 땀 더하고 싶은 엄마의 바람이다.




동트기 전 도착한 콜로세움 토토코스 입구. ‘오백장군과 까마귀’ 주차장에 안착하기 위해 서둘러 출발한 덕으로 해돋이까지 볼 수 있는 덤을 얻었다. 우리 앞에 놓인 세상은 까만 어둠과 손전등에 반사된 하얀 눈으로 흑과 백의 진형이다. 촤르르 스치는 나뭇잎의 노랫소리, 사박대는 밟힌 눈의 아우성에 숨죽였던 귀의 감각이 움찔한다. 우뚝 멈춰 바라보는 흐르는 바람의 물결, 내 옆을 스쳐간 것은 아마도 바람의 꼬리겠지.


영실탐방로의 초반 1.5km 구간은 돌계단과 나무계단으로 이어진 난이도 상 코스(지극히 주관적 기준이다)로 짧고 굵게 힘을 소진시킨다. 헉헉, 거친 숨소리 뱉으며 발아래만 보며 걷다 아들의 부름에 뒤를 돌아본다. 어느덧 떠오른 해와 앙증맞게 굽이치는 오름의 능선, 바다의 눈부신 윤슬이 나에게 쏟아져 내린다. 앞만 보고 걸음을 내딛느라 어떤 것을 지나왔는지, 무엇이 함께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 뒤도 보고 옆도 보며 살아야 한다는 낡은 지혜가새것 마냥

아로새겨졌다.


콜로세움 토토'오백나한' 또는 '오백장군'이라 불리는 기암괴석

나뭇가지에 흘러 붙은 고드름 떼어내 유치한 칼싸움 하며 망아지 마냥 즐거이 오르던 길의 끝, 윗세오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때다. 내 시야 한 귀퉁이에서 아들이 흘러내린다. 아이젠 벗고 눈 위에서 발장난을 치다 넘어진 것이다. 무릎을 부여잡고 눈 길 위에 그대로 누워버린 아들이 운다. 곰 같은 녀석이 아이처럼 엉엉.

‘부러진 건가, 업고 내려가야 하나, 119 소방헬기는 이런 상황에도 태워주는가.’ 오만가지 생각이 나를 덮친다. 걱정회로는 언제나처럼 엑셀 꽉 밟고 전력질주 하지만 시간은 멈춰진 듯하다. 비현실이 현실이 되는 생경한 순간이다.

눈물로 꾀죄죄해진 녀석의 얼굴 쓸어주며 ‘괜찮다, 괜찮다’ 달래는데 그 말이 나를 위한 말인지 너를 위한 말인지 분간이 안 된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아들이 조심스레 일어섰다. 멀쩡하지는 않지만 움직일 수는 있겠단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등짝 스매싱 날리고픈 강력한 욕구가 치밀어 오른다. 덕지덕지 발랐던 압박테이프가 아들 대신 효자노릇을 했다.


산이란 무릇 올라감이 있으면 내려옴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고 했던가. 굴러서라도 내려가야만 하는 상황이다. 절경도 다 필요 없다. 무사히 내려갈 수만 있게 버텨다오. 눈 시리도록 아름답던 길이 울퉁불퉁 험난한 지옥 길로 보인다. 내게 뻗어있는 나약한 인간의 간사함은 어쩔 수없나 보다.아들이 강제 집행한 묵언수행을 견디며 녀석의 뒤를 따라 걷는다. 비틀거리는 너의 등짝, 거북인 너를 두고 언제나 토끼처럼 앞서 걸은 내가 보이는 건 흐릿해지는 시야 때문이겠지. 지금껏 너는 앞서 걷는 나의 어떤 뒷모습을 보았을까. 그 마음 가늠할 수 없어 쉬이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왕복 3시간이면 충분한 길이건만 내려오는 데 3시간이 넘게 걸렸다. 기어이 우리는 출발점에 도착했다. 뱃속에서부터 진한 울컥거림이 꿈틀거려 한숨에 뱉어내고 말았다. 다친 것에 대한 걱정, 아픔 그리고 어색한 성취감이 한데 뒤엉켜 눈물도 웃음도 아닌 일그러진 표정을 띠었다. 모자지간 엉성한 전우애가 싹텄다.

너의 버킷리스트에서 콜로세움 토토산행은 영원히 OUT 되었지만 너와 나의 연결고리에 콜로세움 토토기억 하나는 I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