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단톡방에 엄마가 사진 한 장을 올리셨다.
아빠와 함께 절에 가서 가족 카드 크랩스을 올린 사진이었다.
연등 안에 이름을 적는 란에 엄마, 아빠, 언니네 가족, 우리 가족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아,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이었구나.'
"올해도 연등 켜주셨네요, 감사해요~ "
짧은 답장을 보낸다.
어릴 적 나는 부처님 오신 날이 아니어도 법회에 꾸준히 참석하시던 아빠를 따라 자주 절에 가곤 했다.
매년 카드 크랩스 가족의 이름을 올리는 일은 익숙한 연례행사였다.
그러나 내가 뉴질랜드에 오면서 그 익숙함은 조금 멀어져 있었다.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우리 가족이 무탈하게 지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가 이곳에서 부모님의 품을 떠나 자립해 살아갈 수 있는 건 무엇일까?
매일 새벽 기도드리시는 아빠의 정성과,
매년 이렇게 부처님께 연등을 켜주시는 엄마 아빠의 마음 덕분은 아닐까?
아빠의 새벽 기도는 내가 기억하는 한 늘 그 자리에 있었다.
몇십 년째 단 하루도 빠짐없이, 자식과 가정을 향한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부처가 살아 있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카드 크랩스을 사서 등불을 올렸다고 한다.
그중 하루 종일 구걸한 돈으로 카드 크랩스 하나를 겨우 마련한 가난한 여인의 이야기.
밤이 깊어지자 다른 이들이 올린 등불은 하나둘 꺼져갔지만,
그 여인의 등불만은 꺼지지 않고 밤새도록 환히 빛나고 있었다고 한다.
정성 어린 마음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이야기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생각해 본다.
유한한 우리의 몸과 삶을 지탱하는 힘은 기도, 마음, 정성에서 나오는 보이지 않는 무한한 에너지에 의해서가 아닐까?
내가 먹고, 마시고, 걷고, 자는 이 일상도 그 이면에 흐르는 사랑과 믿음의 에너지로 지탱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런 정성과 기도가 지금의 나를 있게 했듯, 이제 나는 내 카드 크랩스를 위해 같은 마음을 품고자 한다.
지난주 교회에서는 어린이 주일을 맞아 목사님의 설교가 있었다.
"아이를 위해 기도를 해야 하고, 장성한 아이를 위해서는 기도밖에는 할 수 없다."는 말씀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그 순간 다짐했다.
"지금, 아이가 내 품 안에 있을 때 내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줘야겠다.
사랑을 표현하는 행동들로, 카드 크랩스에게 충분한 정성과 신뢰를 심어줘야겠다."
유아기의 아이에게 부모와의 애착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시기의 사랑과 교감이 제대로 형성되어야, 성인이 되어서도 건강한 관계를 맺고 어려움을 이겨내는 내면의 힘을 가질 수 있다.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들이 내 삶에 얼마나 실천되고 있는지 돌아본다.
며칠 전, 카드 크랩스가 내 옆에 매달려 놀아달라고 했을 때,
“알았어”라는 말만 반복하며, 나는 계속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 순간은 스쳐 지나갔지만, 아이 마음에는 어떤 카드 크랩스이 심겼을까?
‘나는 엄마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구나.’
‘사랑받지 못하고 있나?’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미운 사람.' 이라는 카드 크랩스들이 심겨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 마음이 반복된다면, 카드 크랩스의 마음 밭에 해가 되는 것들을 뿌리게 되는 것이지 않을까....
내가 해야 할 것들에 쫓겨, 카드 크랩스가 보내는 눈빛과 신호를 놓치고 있었던 건 아니었는지,
지금 이 순간, 카드 크랩스가 내게 충분히 의존할 수 있도록,
내 마음과 시간의 여유를 먼저 만들어야 한다는 걸 다시 깨닫는다.
오늘 하루, 카드 크랩스가 나와 보내는 이 시간이 충분한 애정의 영양분으로 채워지길,
무엇을 하든,‘내가 뭘 해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신뢰를 느끼도록,
그 믿음이 카드 크랩스 씨앗이 되어 언젠가 카드 크랩스가 내 품을 떠나 바깥세상에나아갔을 때 부족함이 없도록,
나는 지금, 카드 크랩스가 온전히 의존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 중이다.
그 시간이 아이를 자립으로 이끄는 밑거름이 된다는 걸, 그 여정의 초석을 정성스레 다져야 함을 아빠가 피우신 연등을 보며 다시 한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