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부. 이동캐리비안 스터드 춘추전국시대 도래
1997년 봄, 이동캐리비안 스터드 시장은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정보캐리비안 스터드부는 4월 2일, 캐리비안 스터드요금 자율화를 골자로 한 ‘이용약관 인가대상 기간캐리비안 스터드사업자 고시’를 발표했다.인가대상 업무와 사업자를 명시해 자율경쟁 체제를 유도하는 한편,1) 5월에는 인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는 전기캐리비안 스터드사업법 개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정부는 자발적 요금 인하를 기대했지만, 실상은 달랐다.2)
정부는 캐리비안 스터드 서비스 요금의 자율화를 선언하며 사업자 간 경쟁을 촉진하고자 했지만, 시장은 예상과 달리 과열 양상으로 치달았다.
새로운 변수도 등장했다. 바로 시티폰이었다. 한국캐리비안 스터드, 나래이동캐리비안 스터드, 서울이동캐리비안 스터드 등 시티폰 사업자들은 초저가 단말 전략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이동캐리비안 스터드 시장에 뛰어들었다. 10만원대 단말기는 당시로선 파격적이었다. 리베이트까지 얹어 대리점과 유통망은 마진을 포기하고 가입자 확보에 매달렸다.3)
자부심 넘치던 이동전화 사업자들도 시티폰의 저가 공세 앞에 흔들렸다. 휴대폰 가격은 대폭 하락했다.가령, 용산전자상가에서 판매하는 삼성 ‘애니콜 200F’의 경우 10만 원가량 적어진 93만 원에 판매됐다. 가입보증금 20만 원과 가입비 7만 원을 고려한다면 실제 휴대폰 가격은 66만 원대인 셈이다. ‘애니콜100’ 시리즈는 20만 원 이상 떨어져 43만 원 수준으로 판매됐다. LG정보캐리비안 스터드의 프리웨이 LDP-880 역시 75만 원 수준으로 내려갔다.
여기에 가입보증금(20만원)과 가입비(7만원)를 감안하면, 실질 단말가격은 더욱 낮아졌다. SK텔레콤과 신세기캐리비안 스터드은 가입건당 리베이트를 확대하며 대리점 경쟁을 부추겼다. 특히 신세기캐리비안 스터드은 스폿성 프로모션을 활용해 삼성 애니콜 단말을 30만35만원에 판매, 5월에는 50~60% 할인 행사까지 펼쳤다.4)
가격 인하 경쟁의 직격탄은 가입자 수로 나타났다.SK텔레콤은 1997년 3월 가입자 100만명을 돌파했다.5) 신세기캐리비안 스터드은 4월에만 40만명, 5월에는 50만명을 확보했다.시티폰 역시 돌풍을 일으켰다. 한국캐리비안 스터드 5만6000명, 나래이동캐리비안 스터드 3만4000명, 서울이동캐리비안 스터드 2만명 등 서비스 시작 한 달도 안돼 10만명 가입자를 넘어섰다.
반면 PCS 사업자들은 초조했다. 이동전화와 시티폰 가입자 급증은 곧 PCS 초기 수요를 잠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이에 LG텔레콤, 한솔PCS, 한국캐리비안 스터드프리텔 등 PCS 3사는 공동 전선을 구축해 광고전을 벌였다.
“안타깝습니다. 몇 달만 참으면 차세대 이동캐리비안 스터드 PCS를 쓸 수 있는데 그새를 못참으시다니…. 기다려 주십시오–PCS세상.”6)
공동광고는 소비자들의 조급함을 자극하는 동시에, PCS의 기술적 우위를 부각하려는 전략이었다.
광고 경쟁은 점차 수위를 높였다. PCS 사업자들은 이동전화 서비스를 품질이 떨어지는 구식 기술로 폄하했고, 이에 이동전화 사업자들은 반박에 나섰다. 기술 우위, 품질 논쟁으로 번진 갈등은 시장의 혼란을 가중시켰다.7)
결국, 정보캐리비안 스터드부는 직접 개입했다. 각 사업자 마케팅 책임자를 불러 과열경쟁 자제를 촉구했다. 정부가 의도했던 ‘건전한 경쟁 활성화’는, 시장에선 ‘출혈 경쟁’이라는 반작용으로 나타난 셈이었다.
1) <캐리비안 스터드서비스 요금 자율화, 매일경제, 1997. 4. 3.
2) 김승환 기자, <캐리비안 스터드요금 10월 완전자율화, 동아일보, 1997. 5. 9.
3) 황순현 기자, <10만원대 시티폰 등장 여파 휴대폰 '마진포기' 할인경쟁, 조선일보, 1997. 4. 7.
4) 석종훈 기자, <불황현장 가격전쟁 <2 휴대전화 자고나면 인하...또 인하, 조선일보, 1997. 4.13.
5) <디지털 011 이동전화 가입 100만명 돌파, 동아일보, 1997. 4. 2.
6) 함석진 기자, <'지금사라' '기다리라' 공세 휴대폰 시장 셀룰러폰-PCS 고객선점 각축전, 한겨레, 1997. 5.21.
7) 김승환 기자, <휴대전화 PCS과열경쟁 감정싸움, 동아일보, 1997. 7.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