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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May 14. 2025

기부벳이에게


하찮은 나를 한동안 외면하다가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고 지는 꽃들을 눈길로 쓰다듬어 주다 보니 계절은 흘러 흘러 어느덧 봄도 여름에게 자리를 내여주고 있구나, 기부벳아.


나만 비루한 인생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단톡방의 네 얘기를 듣고, 불과 몇 주전의 내 얘기 같기도 하면서 누구보다 밝은 네 마음에서 나온 소리라 순간 놀라기도 했어. 이 봄 나에게도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너의 토로를 그냥 흘려들을 수 없어 몇 자 적어.


중년의 우리, 엄마 손이 많이 필요했던 아이들은 자라 이제 어엿한 학생이 되었고 아이들이 학교에 간 시간 아이들이 먹다 남은 과일조각, 빵조각으로 우린 아침을 대신하지. 아이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고요한 집에 덩그러니 남겨져 숨을 고르며 이따금 아침 인사를 나누고,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우리. 브런치에 네 글이 올라오면 반갑게 찾아가서 네 마음을, 네 일상을 가만가만 들여다 보고 라이킷으로 너의 오늘을 응원하는 사이. 나보다 더 큰 아이를 키우는 선배 엄마이자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때로는 우리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전업주부이자 함께 다독이며 글을 쓰는 글벗인 우리 사이, 이 나이가 되면 있던 친구도 연락이 뜸해지는데 사소한 취미 하나가 인연의 끈이 되어 맺어진 친구라 고맙고도 소중하기만 한 너.


얼마 전 네가 쓴 여행 프롤로그 너무 잘 읽었어. 지금 당장이 아닌, 어쩜 10년 후의 여행기 서문일지도 몰라서 읽고 나서 어찌나 설레던지. 아이들과 함께 한 너의 제주 한 달 살기가 그렇고 나의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가 그렇듯 평범한 아줌마인 우리에게 여행은 얼마나 마음을 들뜨게 하고 다가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하는지 너무 잘 아니까. 너한테 말하지 못했지만 나 있잖아 너에게 조용히 갠톡을 하고 싶었어. 우리 5만 원씩 저금해서 10년 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캐리어는 던지고 배낭 하나 메고 여행 가고 글도 쓰자고. 아, 우리 둘째가 어리니까 12년으로 좀 기간을 늘려달라고 부탁도 해 볼 생각이었어. 매달 5만 원씩 적금 들면 가계 경제에 큰 타격을 주지 않고, 12년 후에 남편 눈치며 자식 사정 볼 필요 없이 곰국 한 솥 끓여놓고 우리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겠지. ‘아줌마, 너는 자유다’를 외치며 말이야. 붙박이장의 일탈,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기부벳아.


있지 수정아, 아이들 스스로 해 나가는 일이 많아질수록 내가 더 무가치하고 쓸모없게 느껴지는 나날들이 곧잘 오더라. 그리도 고대하던 시간들이었건만 말야. 그래서 아이 키우느라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쳐 들었고, 끄적이기 시작했어. 너도 그랬을 테지만. 우리가 구두를 신고 핸드백을 메고 회사를 나가는 워킹맘이었다면 이런 자조의 시간이 지금보다는 뜨문뜨문 왔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난 가끔 해. 나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련한 동경 같은 것일지도.


삶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다는 말을 나는 참 좋아해. 월급도, 명함도 없는 기부벳를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이 설사 애처롭다 하더라도 나는 이 세상에 조용한 질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으로 남고 싶어. 성공한 커리어 우먼이 아니면 어때, 저명한 여류 문필가가 아니면 어때. 너는 너의 자리에서, 나는 나의 자리에서 고요히 피어나는 꽃인걸.


10년 후 어느 날, 어떤 나라로 향하는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우리 주부 대신 작가를 쓰는 날이 올까. 상상만으로도 헛웃음이 나오는 꿈같은 미래지만 그때까지 우리 맑은 눈 들어 서로를 알아봐 주자.



2025년 5월 놀이터에서 기부벳을 기다리며,

서린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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