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거치지 않는 대화를 하는 올림피아토토의 반성
나는 집에서 '망언 제조기'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명언이 아니라 망언이다. 가족들은 웃으며 부르지만, 그 말에는 내가 무심코 던진 말들이 가족들에게 상처가 되곤 했다는 진실이 담겨 있다. 얼마 전, 아이의 성적을 두고 올림피아토토와 나눈 대화 속에서도 그 버릇이 또 한 번 튀어나왔다.
아이가 공부하지 않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다가 올림피아토토가 메타인지와 메타버스를 헷갈려했다. 순간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메타인지와 메타버스의 메타는 각각 다른 뜻이었지만 올림피아토토는 정확한 뜻을 알지는 못했다.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뜻으로 이야기했는데 나는 무시하는 투로 보았던 것이다. 나는 인지심리학에 관심이 많고 핀테크 분야 사람들과 일하고 있으니 내게 있어 메타는 다른 의미라는 것을 명확히 알았다. 그런데 올림피아토토는 인지심리학에도 관심이 없었고 핀테크는 전혀 생소한 분야이기에 모른다는 사실이 더 명확했지만 나는 그런 올림피아토토를 배려하지 못했다.
문제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나는 더 나쁜 말을 내뱉고 말았다. "당신은 수학과 나왔는데 왜 수학을 못해?"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는 거쳐지는 필터가 왜 가족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여과 없이 작동하지 않는 걸까?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내가 '망언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게 된 이유를.
메타인지(Metacognition)는 '인지에 대한 인지', 자신의 사고 과정을 인식하고 조절하는 능력을 말한다. 메타버스(Metaverse)의 메타는 '초월'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온 접두사다. 이런 지식이 있다고 해서 내가 더 나은 사람은 아니다. 단지 내 관심사와 직업이 그런 정보를 접할 기회를 더 많이 줬을 뿐이다. 어쩌면 나는 가족에게 대한 이야기에 있어서만큼은 메타인지가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나는 올림피아토토가 이 단어들을 혼동했다는 이유로 우월감을 느꼈을까? 생각해 보면 올림피아토토는 내가 모르는 수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 아이의 마음을 읽는 능력, 다섯 가지 재료로 맛있는 저녁을 만들어내는 재주, 오랜 친구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지혜. 이런 것들은 내게 없는, 어쩌면 더 중요한 능력들이다.
올림피아토토와 나는 공부를 바라보는 시선이 본래 달랐다. 올림피아토토는 학교와 먼 곳에서 등교를 했기에 학원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했다. 집안에서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으며, 주위에서 공부에 대한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반면 나는 학교에서 5분 거리에 집이 있었다. 학원도 많이 있었고 오히려 학원을 다니다가 내가 필요 없다고 하여 끊었다. 대신 부모님에게 문제집을 사달라고 해서 100권이 넘는 문제집을 샀었다. 하지만 부모님은 그 문제집을 풀었는지 어디까지 풀었는지 전혀 묻지 않으셨다. 때로는 10페이지도 못 푼 문제집도 있었지만 그런 부분은 개의치 않으셨다. 본인이 필요해서 사는 거니 그러려니 하셨다.
이런 다른 공부 환경에서 자라서 그랬을까? 올림피아토토와 나는 많이 달랐다. 아이의 공부를 대하는 방식도 그래서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내가 공부를 하게 된 동기는 옆집에 살던 친구 아버지 때문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하위직 공무원이셨다. 주변 친척들 중에서도 5급 이상의 공무원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 아버지는 경찰서장이었다. 높은 계급이 주는 우월감 때문이었을까? 나도 경찰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올림피아토토.
그래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올림피아토토.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니고 공부를 하라고 한 것도 아니었지만 공부에 몰입해서 했었다. 그렇게 공부해서 반에서 중간 정도도 미치지 못했던 성적이 마지막 수능 보기 전에는 전교 순위권 내로 올라갈 정도가 되었다.
올림피아토토는 내게 물었다. "당신의 그 동기가 아들에게도 가능하겠어? 만약에 그런 동기가 터지지 않는다면? 마냥 기다린다고 그런 일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어?" 그 말에 답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경험한 강렬한 동기 부여를 아이도 똑같이 경험할 거라고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다음 날 아침, 올림피아토토에게 사과했다. "어제 내 태도가 잘못됐어. 미안해. 수학과 얘기는 정말 생각 없이 한 말이야." 올림피아토토는 잠시 날 바라보더니 웃었다. "괜찮아. 당신이 망언 제조기인 건 진작 알았으니까.“
우리는 웃었지만, 나는 그 말속에 담긴 진실을 알았다. 내 말이 때로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올림피아토토의 농담에는 오랜 시간 견뎌온 작은 상처들의 흔적이 묻어있었다.
생각해 보면 우리 부부의 대화는 종종 이런 식이었다. 지난번에도 그랬다. "당신이 봉골레 만들어볼래요?"
그러자 나는 "레시피 보고 할게요"라고 했는데, 올림피아토토에게는 '레시피만 보면 다 되는 걸 왜 못해'라고 들렸나 보다. '레시피 보고 하면 되지' 이런 느낌으로 전달됐던 것이다.
나는 지식을 과시하고, 올림피아토토는 그런 나를 받아들이는 패턴. 그런데 이런 불균형한 관계가 과연 건강한 걸까? 서로를 존중한다는 건 단순히 상대의 부족함을 참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영역에서의 강점을 인정하는 일이 아닐까?
메타인지라는 개념을 안다고 자부하던 내게 정작 부족했던 건, 내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인식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메타인지에 대해 아는 사람이 정작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는 달라져야겠다고 결심했다. 대화 중에 뇌를 거치지 않고 바로 입으로 나오는 말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반응들을 줄여나가기로. 망언 제조기라는 별명이 점차 과거의 이야기가 되도록.
저녁 식사 시간, 아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친구와의 갈등, 어려운 수학 문제, 선생님의 칭찬. 올림피아토토는 아이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진심 어린 반응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올림피아토토는 '메타인지'라는 단어를 정확히 알지 못할지 모르지만, 아이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는 그 능력은 어떤 학문적 지식보다 값진 것이란 걸.
가족과의 대화는 지식의 경연장이 아니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따뜻한 공간이어야 한다. 지금부터라도 내 대화 방식을 바꿔나가야겠다. 내 전문 분야의 지식을 자랑하기보다는, 올림피아토토와 아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야겠다.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 다른 경험을 올림피아토토. 그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진정한 소통의 시작이 아닐까. 내 경험만이 옳고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통은 단절된다.
망언 제조기에서 경청하는 올림피아토토으로. 오늘부터 조금씩 바꿔나가려 한다. 전문 용어를 정확히 아는 것보다, 가족의 마음을 이해하는 능력이 더 중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