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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호 May 09. 2025

무대뽀 정신 VS 사무라이 정신

이야기로 엮는 리더십



J기업에서 구매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장상무가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원재료의 많은 부분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특수 합성고무 메이커인 D사를 방문하기 위해서였다. D사는 J기업에서 사용하고 있는 특수합성고무의 세계 최대 메이커로 규모가J기업의 100배쯤 되는 대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내사업확대를 도모하고 있는 D사 입장에서는 J기업을 무시할 수없어, 거래 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융숭하게 J기업을 대하였다. 장상무의이번 출장에는 구매팀의 최팀장이 동행하였고, D사의 한국 내 에이전트인 W통상의 박상무가 함께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도착한 도쿄에서 D사의 판매자회사인 Y상사의 야마구치상이 합류하였다.


일본의 대기업들은 직거래를 하지 않고 판매 자회사를 통하여 거래하는경우가 많았는데, 일종의 제조와 판매가 분리된 형태였다. 그렇게 운영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점이 있었다. 나이들어 진급못하는 직원들을 회사에서 바로 쫓아내는 대신 자회사로 보내 인건비도 줄이고 그들의 노하우를 그대로 살릴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퇴직에 대한 완충장치 역할을 하여 직원들이 새로운 진로를 찾는 기간이 되기도 하였다. 반면에 J기업은 내보내는 직원들을 절대로 자회사로 보내지 않았을뿐더러, 회사와 관련된 어떤 거래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자칫 뒷거래가 생길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는데, 결과적으로회사를 퇴직하는 많은 직원들을 적으로 만들었다. 말로는 인화단결을 외쳤지만,사람을 믿지 못하고 직원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보는것은 오너 일가의 대를 이어 내려오는 전통이었다. 때문에퇴직한 직원들은 회사를 욕하고 다녔고 어떤 경우에는 경쟁회사에 정보를 팔아 넘기기도 하였다. 그러면 오너는 그것 보라며, 사람은 믿을 게 못된다며 직원들을 더욱 다그쳤다.


J기업과 D사와의 거래관계는 D사 - 일본 자회사인 Y상사 - 한국 대리점인 W통상 - J기업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흐름을 탔으나, 각자의 역할이 명확하여 특별한 혼선은 없었다. 장상무 일행은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D사의 특수 합성고무 생산공장이 있는 니가타현이토이가와시로 향하였다. 기차 시간이 빠듯하여 역에서 초밥도시락을 구입하여 객실에서 점심식사를 하며 이동하였다. 빠르게 멀어져 가는 들판과 저 멀리 보이는 후지산을 감상하며 먹는 초밥과 녹차 음료는 완전 별미였다. 식사를 마치고 이동판매대에서 구매한 핫 아메리카노를 한잔 하면서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사이 기차가 목적지인 이토이가와역에도착하였다.일행은 거기서다시택시를 타고 이동하였다. 택시는시내를 벗어나 교외로 한참을 달려 산기슭의 작은 마을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에 D사의 특수 합성고무 공장이 있었다.



회사 정문에서 신분증 확인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고 있으려니 한 직원이 나와 장상무 일행을 회의실로 안내하였다. 회의실에는 공장장과 기술담당 그리고 생산담당 부서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공장 소개 및 생산제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장상무는 거기서 특수 합성고무가 석회석에서 나온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회사 뒷산에 대규모의 석회석 광산이 있는데, 그곳에서 캔 석회석을 물을 이용하여 전기분해하여 합성고무를 만든다고 하였다. 돌이 고무가 되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덧붙여 생산 공정중에나오는 따뜻하고 깨끗한 온수를 이용하여 민물장어를 기른다고 하였다. 그렇게 기른 장어의 품질이 좋아 도쿄와 교토의 고급 음식점에서 판매되는 장어구이와 장어덮밥에 사용된다고 하니 깜짝 놀랄만한 일이었다. 석회석과 합성고무와 민물장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조합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장상무 일행은 현장견학을 하였다. 공장 규모가 워낙 커서 직원 차로 이동하였는데, 특이할만한 것은 직원이 안전모를 쓴 채로 운전을 하는 것이었다. 공장이동시는 반드시 안전모를 착용하고 다녀야 한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고 장상무는 역시 일본이구나 싶었다. J기업에서는 현장 내에서도 설마 무슨 일이 있겠냐며 안전모를 착용하는 이가 없었다. 한국과 일본은 안전에 대한 인식 자체가 확실히 달랐다. 장 입구 사무실에서 장상무 일행도 흰색 가운과 안전모를 지급받았다. 그리고 다시 차에 올라 공장 뒤편의 석회석 광산으로 향했다. 공장 견학의 출발이 등산. 해발 1300 미터의 정상 부근에 다다르자 커다란 평지가 나왔다. 차에서 내려 살펴보니 산을 절개하여 석회석을 캐내는 광산이 눈앞에 펼쳐졌다. 땅을 파 들어가는 게 아니고 절개하여 떼어 내는 식이었다. 석회석을 운반하는 맘모스급 트럭이 몇 대 보였는데, 대당 적재중량이 200톤이라고 하였다. 트럭이 어찌나 큰지 트럭 바퀴의 높이가 장상무의 키를 훌쩍 넘을 정도였다. 그런 트럭들이 부지런히 오가면서 광산에서 캔 석회석을 커다란 구멍으로 쏟아붓고 있었다. 그 구멍을 통해서 아래에 있는 공장으로 내려보낸다고 하였다. 매일 그렇게 캐내는 데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200년은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 그 규모가 얼마나 큰지 입이 떡 벌어졌다.


광산을 내려온 일행은 민물장어 양식장으로 향했다. 기다리고 있던 그곳 담당자가 일행을 맞았다. 커다란 수조 다섯 개가 있는데 현재 세 곳을 가동 중이라고 하였다. 수조당 장어가 20,000마리. 그는 며칠 내로 출하할 다 큰 장어가 있는 수조로 일행을 안내하였다. 출입문을 통하여 들어가자 안은 흐릿한 불빛에 겨우 눈앞을 가늠할 정도로 어두웠다. 그가 전등을 켜고 바가지로 사료를 퍼서 던져주자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팔뚝만 한 장어들이 사료를 먹으려고 물 위로 떠오르며 달려드는데 그 수가 어마어마하였다.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징그럽기도 하끔찍스럽게도보였다. 만일 사람이 내쳐져서 그것들이 달려들어 살점을 뜯는다면? 장상무는 문득 든 생각에 소름이 오싹 끼쳤다. 안내자는그런 장상무를 보고 씩 웃으며한 마리만 먹어도 힘이 불끈불끈 솟는다며 엄지척을 하였다. 그날 저녁 회사 영빈관에서 장상무 일행은 민물장어구이를 배 터지도록 먹었다.


회사가 외지에 있는 관계로 그지역에 변변한 숙박시설이 없었다. 그래서 회사에서 영빈관을 지어 방문하는 손님들이 묵을 수 있도록 하였는데, 객실은 물론 온천욕을 즐길 수 있는 대형 목욕탕도 갖추고 있었다. 객실을 배정받은 장상무 일행은유카타를 입고목욕탕으로 향했다.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피곤했던 몸이 사르르 풀리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온천욕으로원기를 회복한 장상무는 옷을 갈아입고 저녁 회식이 있는 연회실로 향했다. 다다미가 깔려 있고 앉은뱅이 의자가 있는 연회실이었다. 먼저 도착한 최팀장이 장상무를 보고 입을 열었다.


"상무님, 진열장에 있는 술이 대단한데요. 오늘 여기 있는 술을 싹 다 비우는 게 어떻겠습니까?"


최팀장이 입맛을 다셨다. 장상무도 술을 잘 마셨고, 폭탄주를 제조하는 회장님 눈높이도 통과하여 임원 승진을 하였지만, 최팀장은 술고래였다. 일도 잘했지만 주량이 워낙 세서 임원 승진이 무난해 보이는 촉망받는 친구였다. 그런 친구가 진열장의 술을 싹 다 비우고자 하면 또 못할 이유도 없어 보였다.


이윽고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고 회식이 시작되었다. 그곳 공장장과 기술부장 그리고 생산부장이 참석하였고, 도쿄 본사의 영업부 담당자인 사카이 씨가 합류하여 총 여덟 명이 참석하였다. 사카이는직급이 계장이라고 했는데 일류대 출신의 엘리트라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본사 직원이라서 그런지 공장 사람이나 자회사 사람들을 조금은 얕잡아보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판매자회사의 야마구치부장이 거의 작은 아버지뻘의 연배인데도 불구하고 동년배를 대하는 듯하였고 오히려 야마구치상이 사카이를 깍듯하게 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카이의 그런 태도는 공장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여서 공장장에게나 공손하였지 기술부장과 생산부장에게는 야마구치상을 대하는 것과 비슷하였다. 그런 연유로 장상무는 회식하는 내내 사카이가 못마땅하였다. 게다가 장상무의 마음에 더 들지 않았던 것은 사카이가 자신은 술을 못한다며 건배조차 하지 않는 것이었다. 첫 잔만 술을 받아 입에 대지도 않고 내려놓더니 녹차만 홀짝홀짝 마셨다. 그래놓고 민물장어구이는 어찌나 잘 먹는지 다른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날름날름 잘도 집어 먹었다.


J기업에서의 회식문화는 폭탄주로 시작하지만 일본은 그렇지가 않았다. 미즈와리라고 해서 술에 물을 타 먹었다. 장상무에게는 그게 술도 아니고 물도 아니고 영 싱거웠지만, 그렇다고 그쪽 회사에서 주최한 회식자리인데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수도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먹을 수밖에. 게다가 원샷도 아니고 한 모금 마시면 기모노를 입은 여성이 옆에 대기하고 있다가 바로 잔을 채워 주었다. 한 모금 마시면 잔을 채우고 또 한 모금 마시면 또 채우고. 그러다 보니 술을 몇 잔을 마신 건지,얼마나 마신 건지 도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서빙하는여성들이젊고 예쁘지는 않았,살집이 제법 두툼해 보이는 중년 이상의 여성들이었다. 그런 여성들이 기모노 차림에 바짝 다가와 지분 냄새를 풍기며 잔을 채워주는데,처음에는 별 감각이 없었으나 나중에 술이 좀 되고 나서는 좀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조금 더 술이 되고 나서는 예뻐 보이기까지 하였다.


"상무님, 이곳에 있는 술을 다 거덜 내려고 했더니 도저히 안 되겠는데요. 장어를 많이 먹어서 배가 부른 데다가 술에 물을 타는 바람에 물배를 채웠지 뭡니까? 오늘은 이만 후퇴해야겠습니다."


의외로 최팀장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장상무는 그래도 한국남자의 배포가 있지 그냥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다.


"자자, 이제부터는 미즈와리 말고 깡술로 한잔씩 합시다. 사카이상도 한잔 받으시고요."


모두들 장상무가 따라주는 깡술을 들고 건배하였다. 장상무가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자 나머지 사람들은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우리가 남이가!'를 따라 외치고 모두 원샷으로 잔을 비웠다. 그러나 역시 사카이는 입에대지도않고 잔을 내려놓았다. 장상무는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우리 회사에근무했다면 출세하기는 다 글렀겠군."


깡술이 몇 순배 더 돈 후 그날 회식이 끝났다. 모두들 취해서 불콰해진 얼굴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다만 단 한 사람, 사카이만 말간 얼굴로 인상을잔뜩 찡그리고 있었다.장상무는 옆에서 계속 잔을 채워주고 시중을 들어준, 이제는 완전 예쁘게 보이는 여성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5,000엔짜리 지폐 한 장씩을 건넸다.그러면서 그녀들의 통통한 손을 한 번씩 잡아볼 수가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눈을 뜬 장상무는 유카타를 입고 목욕탕으로 향했다.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이마에 땀이 송송 맺혔다.땀과 함께 몸에 축적되었던알코올이 함께배출되었는지,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몸과 정신이 가뿐해졌다. 아침해가 동그랗게 떠오르고 정원에서는 새들이 짹짹거리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우는 아름다운 아침이었다. 낫또와 장국과 김을 곁들인 심플하지만 건강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장상무 일행이 영빈관을 나서자 회사 미니버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공장장과 기술부장이 배웅을 나왔다. 그래도 간밤에 함께 술 꽤나 마셨다고 친해져서인지 활짝 웃으며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장상무는 공장장에게 한국에 꼭 한번 오시라고, 민물장어에는 못 미칠지 모르지만 한국에 오시면 한우고기를 양껏 대접하겠다고 하였다. 공장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미니버스에 올랐다. 공장장과 기술부장은 버스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상무 일행은 이토이가와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다시 도쿄로 향했다. 이번에는 도쿄에 있는 D사의 본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D사본사가 있는 빌딩은 30층 높이의 D사가 속해있는 그룹빌딩이었는데, 그 위용이 단단해 보였다. D사는 그 건물의 다섯 개 층을 사용하고 있다고 하였다. 장상무는 D사의 합성고무 사업부가 있는 11층으로 안내되었다. 널찍한 공간에 책상이 오와 열을 맞추어 쭉 늘어서 있고, 중간중간 칸막이가 쳐진 공간 상부에는 부서 표지판이 일렬로 가지런히 걸려있었다. 직원들이 빽빽하게 앉아있음에도 마치 사람이 거의 없는 듯 조용하였다. 간간이 들리는 전화벨소리와 소곤소곤 작은 속삭임. 그리고 이내 정적.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장상무는 가슴이 턱 막히는 듯했다. 직원들 모두무표정한 얼굴에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람이 들고나가도, 옆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전혀 개의치 않을 듯한 분위기. 마치 사람이 아니고 AI 로봇들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사무실 안쪽에 위치한 회의실에 앉아있자니 합성고무 사업부장인 후루타상이 들어왔다. 그가 신임 사업부장으로 발령받고 한국에 출장을 왔을 때, 장상무를 만난 적이 있기 때문에 인사를 하러 온 것이었다. 후루타상이 바로 나가고 회의는 영업부서장인 모리상과 진행되었다. 모리상은합성고무 사업부의 영업통으로 차기 사업부장으로 거론되는 사람이었다. 장상무는 다음 달부터 변경되는 거래조건에 대하여 모리부장과 업무 협의에 들어갔다. D사 입장에서는 J기업이 자기들 매출의 0.5%에불과한소형 거래선이었음에도 한국 시장에서의 상징성과 향후 시장확대 가능성을 고려하여 장상무의 요구조건을 거진 수락하였다. 그렇게성공적으로 회의를 마친 장상무는 모리부장과 저녁 식사자리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본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긴자 거리에 있는 한 횟집에서 식사자리가 있었다. 일본 기업의 관행은 거래 규모와 전략적 중요도에 근거하여, 거래처를 A, B, C 등급으로 구분하여 딱 거기에 맞는 수준으로 방문자에 대한 접대 수준을 정하였다. 그럼에도 장상무 일행을 긴자에 있는 고급 횟집에서 접대한다는 것은 적어도 J기업을 C급으로 취급하지는 않는다는 뜻이었다. 참석자는 장상무 일행과 모리부장 그리고 사카이 총 여섯 명이었다. 거기서 장상무는 사카이의 새로운 면을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공장이나자회사 사람들 앞에서는 한껏 콧대를 높이던 그가 직속상사인 모리부장 앞에서는 꼬리를 바짝 내리고 아주 고분고분한 모습을 보이는것이다. 심지어 모리부장이 술을 따라줄 때는 무릎을 꿇고 두 손을 공손하게모아 술잔을 받아 원샷으로 마셨다. '어쭈? 저렇게 술을 마실줄 아는 놈이 내 잔은 거부해?' 장상무는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모리부장님, 사카이상이 아주 샤프하고 훌륭한 직원이더군요. 어제 공장에서도대접을 잘 받았습니다. 그렇지요? 사카이상!"


장상무가 사카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분위기가그렇게 되자 사카이는 장상무의 술잔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상무에 이어최팀장이 사카이에게 술잔을 건넸고, W통상의 박상무와 Y상사의 야마구치상이 그 뒤를 따랐다. 모리부장 앞에서 사카이는 술잔을 넙죽넙죽 잘도 받아 마셨다. 그럼에도태도가조금도흐트러짐이없었다. 어제와는 완전 180도 다른 모습이었다. 술자리는 한국의 활어회와 일본의 숙성회와의 차이점 등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며 화기애애하였다. 더불어 술잔이 끊임없이 오갔고모두가 기분 좋게 취하였다. 마지막으로 맑은 탕요리가 나오고 식사자리가 끝났다.


식사를 마치고나오자 밖은 이미 깜깜해지고 상점마다 휘황찬란한 네온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리부장은 다음날 일찍 중국 상해로 출장을 가야 한다며 사카이에게 장상무 일행을 부탁하고 먼저 택시에 올랐다. 사카이는 택시 꽁무니에 대고 90도로고개를 숙이고 절을 하였다. 그리고 택시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야마구치상이 모리부장이 떠났다며 그의 어깨를 툭 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는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더니 근처 화단 턱에 걸터앉았다. 모리부장이 떠나고 긴장이 풀려서인지 취기가 크게 오르는 모양이었다. 그는 이내 화단에 대자로 뻗어버렸다. 거래처 손님들 앞에서 영업담당이 보여서는 안 될 추태였다. 그 모습이 민망해서 어쩔 줄 몰라하던야마구치상이 그를흔들어 깨우며 말했다.


"사카이상, 정신 차려요. 이제 어떻게 할까요?"


사카이가 귀찮다는 듯 야마구치상의 팔을 뿌리치며 소리쳤다.


"아 몰라 씨! 당신들끼리 알아서 가라고!쥐꼬리만 한거래선을 내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냐고!아이 C8"


그랬다. 그게 사카이 그 친구의 본심이었다. 일류대 출신에 엘리트인 자신이 사업부 매출액의 0.5%에 불과한 C급 거래선을 맡아 멀리 산골짜기에 위치한 공장까지 출장 가고, 억지 술을 마셔가며 접대하는 게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전날 공장에서 장상무 일행을 만났을 때부터 툴툴거렸던 것이었다.


"쯧쯧. 모리부장 앞에서는 마치 주군 앞에서 충성을 맹세한 사무라이처럼 굴더니, 모리부장이 떠나니 완전 무대뽀구만."


야마구치상이 한소리하며 돌아섰다. 그가 장상무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대신 사과하였다. 장상무는 야마구치상이 잘못하게 전혀 없으므로 사과받을 것도 기분 나쁠 것도 없다고 하였다. 대신 술이나 한잔 더 하러 가자고 하였다. 일본 출장 와서 사무라이 하나를 술로 때려잡았으니 왠지 승리주라도 마셔야 씁쓸한 기분이 해소될 것 같았다. 그리고사실 J기업이 D사의 매출 비중으로 봐서는 얼마 되지 않지만, 거래기간이 30년이 넘는 오랜 역사를 이어오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양사의 중역이 서로 오가며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이였다. 결코 입사한 지 삼 년이 겨우 지난 햇병아리한테 무시당할 상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장렬하게 전사하여 꽃밭에 널브러진애송이사무라이를 뒤로 하고,나머지 사람들은하하껄껄 웃으며네온사인이 반짝반짝 빛나는 한 술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이 이야기는 특정회사나 특정인물과 관계가 없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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