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학시켜 주세요. 네?
아이 외투 주머니에 중슬롯 꽁 머니 배정통지서가 구겨져 있었다.
아이의 상실감, 분노, 불안감, 슬픔이 아이의 손끝을 통해 구겨진 통지서 안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선생님들이 힘들게 출력했을 통지서를 이렇게 구겨오다니. 중슬롯 꽁 머니에 내야 할 서류도 같이 있었는데...
사실 아이는 1순위 외에 어느 슬롯 꽁 머니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A슬롯 꽁 머니가 면학분위기 좋다는 이야기가 친구들 사이에 떠돌았던 모양이다. 나도 몇 년째 귀동냥으로 들었던 이야기다. 평소에 공부에 재미 들린 것도 아니면서 무슨 면학 분위기를 신경 쓰나. 그래도 좋은 게 좋다고 무조건 1순위를 꿈꿨나 보다. 아이는 중슬롯 꽁 머니 배정을 위해 매일 밤 기도했다.
하나님, 땡땡 중슬롯 꽁 머니 배정받게 해 주세요.
이 정도면 아이의 간절함이 어느 정도인지 나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엄마인 나는 다른 슬롯 꽁 머니를 염두에 두지 않고 얼떨결에 아이의 마음에 편승해서 같은 길을 걷고 있었다. 또 '잘되겠지' 하는 어렴풋한 기대감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 꿈은 와르르 무너져버렸다. 2순위 중슬롯 꽁 머니로 배정된 것이다.
오후 3시 30분, 배정통지서를 받기 위해 슬롯 꽁 머니에 간 아이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다짜고짜
"엄마 저 전학시켜 주세요"
"슬롯 꽁 머니 입학도 안 했는데 무슨 난데없이 전학이야"
내가 사는 곳은 2학군이 있는데 1학군은 6개의 중슬롯 꽁 머니가 있어 6지망 중 한 곳으로 결정이 된다. 6개의 중슬롯 꽁 머니는 당연한 얘기겠지만 지도에서 보자면 오밀조밀 모여있는 것이 아니라 바게트빵처럼 길게 분포되어 있다. 여차하면 집에서 가장 먼 거리 중슬롯 꽁 머니로 배정될 수도 있었다. 근거리와 상관없는 뺑뺑이로 5지망, 6지망이 되는 경우도 있어 이맘때면 맘카페가 원성이 가득한 글로 도배된다. 근거리 우선 배정방식이면 좋을 텐데 슬롯 꽁 머니 중 선호하는 중슬롯 꽁 머니 한두 개가 있어 쉽게 바꿀 수가 없는 모양이다.
우리 아이는 2지망이 된 거니 그저 감사해야 하는데 아이 마음은 온통 불안감에 휩싸였다. 1지망이 되지 않은 이유와 함께 단 한 명의 친한 친구도 같은 슬롯 꽁 머니에 배정받지 못해서다. 내가 본 너는 서글서글하고 쉽게 친구들을 사귀기도 하는 성격이기도 해서 새로운 인간관계를 충분히 개척할 수 있다고 다독여봐도 소용없었다.
그래. 친구들이 한창 좋을 나이니까.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당연히 '노'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뒤적거려 본다.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 중슬롯 꽁 머니 배정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중슬롯 꽁 머니 전학 또는 편입학의 경우, 거주지를 학구로 하는 초등슬롯 꽁 머니가 속하는 슬롯 꽁 머니군 또는 중학구 안의 중슬롯 꽁 머니로 제한된다고 한다. 또 재배정은 중슬롯 꽁 머니 입학 배정을 받은 학생이 슬롯 꽁 머니군을 달리 한 거주지 이전 시에는 가능지만 슬롯 꽁 머니군이 다른 경우는 어렵다고 한다. 이사를 갔다 와도 거주기간이 짧으면 다시 원배정슬롯 꽁 머니로 배정된다고도 한다.
하기야 모두 다 맘에 안 든다고 바꿔달라고 하면 무작위추첨 배정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이 엄마는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통지서를 구겨서 오면 어떻게 해? 개인정보 동의서, 교복신청서 등 제출할 서류가 이렇게나 많은데, 중슬롯 꽁 머니 안 갈 거야? "
말은 그렇게 했어도 어미인 나도 마음이 속상하다.
어릴 때 나는 시골에 살아서 그저 같은 초등슬롯 꽁 머니 아이들이 그대로 같은 중슬롯 꽁 머니로 올라가서 이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다. 타지에 오도카니 혼자 떨어진 느낌이겠지. 낯선 친구들 사이에 있을 그 순간이 두렵기도 할 것이다.
대체 1 지망된 아이들은 누구인가. 퇴근해 집에 와보니 방문이 잠겨있다. 그동안 없던 일이다. 젓가락으로 문을 따고 열어보니 아이가 이불속에서 울고 있다. 벌써 몇 시간 째야. 아이에게 가서 손을 벌리니 일어나 앉아 안긴다. 아이 등이 오르락내리락 한참을 들썩인다.
"픽시 자전거 안 사도 되니 전학시켜 주세요"
그렇게 사고 싶었던 100만 원짜리 자전거를 언급한다. 제동거리, 안전문제로 아이와 타협이 안되었는데 자전거를 사고 싶은 마음을 던져버릴 만큼 간절한가 보다.
이렇게 슬퍼서 우는 모습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는 제일 친한 친구가 전학 갔을 때다. 전학 가기 전에 친구와 여기저기 다니면서 추억을 만들더니 친구가 전학 간 날 저녁에
"엄마 너무 슬퍼요. 친구가 그때 만나자고 연락왔었는데 귀찮아서 안나갔는데 그게 너무 후회돼요. 그때 나갈 걸. 같이 시간 보낼 걸"
아이는 흐느끼며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도 시큰시큰 아려왔다. 그러고 나서도 며칠 동안을 시무룩했지만 헤어짐을 경험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슬픔이 머무는 시간이 짧아지고 차츰 잦아들면서 그곳은 다른 감정으로 채워 나가는 게 보였다. 슬픔은 또 다른 모양새로 아이의 마음을 단단하게 두들겨주며 굳은살을 만들어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너는 커가는구나. 헤어짐을 배우고 그리움을 배우고 또 반가움을 배우고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느끼겠구나. 마음의 지평이 점점 넓어져가는 아이를 보며 그 시간들이 네게 필요한 시간임을 나도 배우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겪을 수많은 일들, 그 가운데 배워가는 모든 감정들. 그 감정들이 건강하게 네 안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엄마는 네 마음을 읽어보고 공감하고 응원해야 할 것이다. 오롯이 네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도록.
중슬롯 꽁 머니 배정이 있던 그날, 저녁에 있을 논술수업 책을 다 읽지 못해 이불 속에 들어가 앉아 책을 읽다가도 흐느끼는 일을 반복하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원에 갔다. 아이 앞에서는 단단한 척 표정관리를 위해 애썼는데 그제야 나도 표정에서 자유로워졌다.
어쩌면 좋아. 여기저기 통화하기도 하고 맘카페 들락날락하며 슬롯 꽁 머니에 대해서 알아보는데 수업에 다녀온 아이는 의외로 밝은 얼굴이다.
'무슨 일이지? 벌써 잊은 것인가?'
엄마! 논술수업받는 친구들 세 명 다 저희 중슬롯 꽁 머니래요! 저 이제 괜찮아요! 이제 마음 진정했어요.
세상에! 몇 시간을 대성통곡하던 너는 어디에 갔느냐.
논술친구라고 해봤자 이번 1월부터 같이 수업을 같이 듣게 된 처음 만난 친구들, 그날 두 번째 본 친구 들이었을 텐데 그저 아는 친구가 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고 힘을 얻었나 보다. 이렇게 마음이 금세 바뀌는 너는 초긍정 아이인가? 냄비인가? 내 마음도 함께 주름을 편다. 논술 선생님께서도 이런저런 말씀으로 좋은 점을 얘기해 주시고 그러면서 아이는 금세 웃음을 되찾았던 것이다. 얼마나 다행인가.
해맑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오는 너는
엄마, 자전거 사주실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