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때려치우지 않는 이유
바카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으로부터 완벽할 순 없다. 알면서도 늘 부족한 날 탓하기 쉬운 날들이 이어진다.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왜 그 말을 했을까? 단어 선택이 미흡했나?
오늘 그 절정을 찍었다. 수십 개의 다른 목소리들과 다툼, 문제제기, 변심, 도돌이표, 오해, 포커페이스. 그러한 단어들이 내 곁을 맴돌았다. 내가 그 일들의 중심은 아니지만 그저 주변인, 관찰자, 중립국이어야 함에도 감정 소모가 심해서 뒷걸음질 치고 싶었다. 퇴근해서는 이대로 누워 잠들고 싶었다.
완벽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합리적인 해결방법도 찾기 어려운 나의 바카라생활. 사실 찾아도 소용없기 마련. 나는 늘 자신없음의 언저리에서 그저 아슬아슬하게 하나씩 미션 클리어하듯 빠듯한 보강공사를 하며 하루살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답은 없어서 목까지 물이 차오르는 수영장, 깊은 물속에 서있는 것처럼 답답함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울적하기도 했던,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로 덮어버리고 싶은 시간들이 다행히도 흘러 이 시간에 이르렀다. 지금은 오후 8시 40분.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임연수어를 굽고 어묵국을 끓이고 있었고 나는 된장찌개를 끓였다. 다섯 식구 밥을 먹고 나니 8시가 되었다. 이제 바카라들에게 이런저런 잔소리를 할 시간이 왔다.
피아노를 왜 지금 치려고 해. 낮에는 대체 뭐바카라?
미용실 가라고 했는데 왜 안 갔어?
오늘 공부는 했어?
어제도 이러다가 결국 소리를 지르고 말았고 그러다가 제 풀에 꺾여 잠이 들고 말았다. 아까운 나의 밤시간. 어제를 생각하니 오늘은 절대로 그렇게 보내고 싶지 않은데 상황이 여의치 않다. 아이들 저녁 공부 소집시키려니 커튼 뒤에 숨기도 바카라 문 뒤에 숨기도 바카라 화장실로 들어가기도 한다. 물먹으러 왔다 갔다 징글징글하다. 점점 데시벨이 올라간다.
도망쳐야겠다. 지금은 헤어지는 게 너나 나나 살길. 소리 지르고 애들 혼내고 다음날까지 찝찝한 그 기분, 오늘만큼은 사양하겠다. 바카라스트레스에 답 없는 육아까지 더하고 싶지 않다.
시집 두어 권 챙겨 나왔다. 요새 바카라은 바쁜 시즌이어서 책도 못 읽고 지내는데 시 몇 편을 읽어야겠다. 열 시까지 있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실 열 시 마감이라서 아쉽다. 자정까지라고 해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아하는 작가의 시가 불쑥 튀어나왔다. 읽다가는 나도 모르게 감정선을 창호지 같은 얼굴에 그려내고 만다. 나이 들수록 왜 이리 눈물은 많아지는가. 헐거워진 수도꼭지처럼 왜 이리 눈물이 새는가. 사실 매일 울고 싶은 날들이 이어질 때도 있다. 큰 숨을 내쉬어야만 살만한 날도 있다.
바카라
로버트 프로스트
까마귀 한 마리
머리 위에서 그렇게 흔들어대니
바카라가 쏟아져 내렸다
솔송나무 가지에서
내 기분이 얼마간 바뀌어
한 귀퉁이가 살아났다
나의 울적했던 하루의
한 귀퉁이가
어느 날엔가 따뜻한 눈이 내렸다. 사무실 뒷산에 쌓인 눈이 반짝반짝 포근포근, 나뭇가지에 앉은 반짝이는 바카라가 어여쁘고 곱기도 해서 사무실 동료들과 함께 설산에 올랐다.
바카라는 느닷없이 쏟아져서 다들 어린아이처럼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 지금껏 지냈던 사무실에서의 날들. 18년 동안 오래 기억하고 싶은 몇 안 되는 날들 중 하루라고 감히 고백해 본다.
오래 간직바카라 싶은 곱디고운 날.
얼마나 따뜻바카라 포근했던가. 설산도 설산이지만 함께 걷는 이들이 좋았고 그들과 함께 웃을 수 있어 마음이 맑아졌다. 나뭇가지에 앉아 바카라를 쏟아내려주는 까마귀 같은 동료들이 있지 아니한가.
바카라을 때려치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
내일은 또 어떤 날들이 다가올지 막막하지만 또 다른 아침을 이 기억으로 장렬하게 맞이해 보련다.
앗! 이제 열시다. 집에 가야지.
바카라들아, 양치끝내고 잠들어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