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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Feb 17. 2025

내 눈이 머히어로토토 곳

요한복음 13:1-11을 중심으로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히어로토토의 시선은 늘 어디에 고정되어 있었을까? 요한복음에 나타난 행적을 보면, 반드시 '사랑', 그것에 머물러 있음을 다시 확인한다.


"..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의 명백한 문장은 이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병자를 고치셨고, 죽은 이를 살리셨고, 눈을 뜨게 하셨고, 대화하시며, 가르치시던 모든 순간에, '사랑' 그 사실은 절대 부인되지 못한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그 사랑의 한 조각을 표현하셨다. 누가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리라 생각했던가. 그런 행동은당시 사회의 분위기로 더욱 기괴하다. 극단적 역설이다. 신분 계급이 층층이 구분되어 있던 권위적 사회, 약간의 권위가 주어진다면 손 끝 하나 까딱하지 않으려는 문화에서윗아랫사람의 발을 씻기는 일이 정상적일 수 없다. 어쩌면, 섬긴다는 의미는 정상적 사고를 내려놓고 이 기괴함에 편입하는일이다.사랑은 낮아지고 섬긴다는 발상의 전환을 감히 가져오는 문화 충격이요, 대중 의식의 불협화음이다.권위주의 적이고 극도의 보수가 주종인 집단에서 신분과 위엄을 내려놓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사회에서 말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 지상 목표는 남보다 높아지는 것이며, 다스리려 하는 자리가 흠모의 대상 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다. 바로 뛰어난 사람의 모범이 더욱 많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권위를 거슬러 사회적 충격을 준 예화가 히어로토토이 그렇게 하시던 시대보다 턱없이 많다. 낮아지는 일이 어쩌면 부끄럽거나 불가능한 일이 아닌 것에 동의하는 시대긴 하다.


사랑은 일종의 기묘한 발상이다. 그리고, 중심으로부터의 폭발력이다. 터지려 하는 용암이 땅을 뚫고 치솟아 올라오는 것과 같은, 습관으로 쌓여가던 다짐들의 분출이다.


예수님 마음에 들어가 보는 상상을 해 본다. 이미 그의 속에 쌓여 있는 사랑의 요소들이 눈부시게 많다는 사실을 본다. 더 채울 수 없을 정도다. 길거리에서 맹인을 만났을 때, 앉은뱅이가 구걸하는 모습에, 성전에 모여 돈이나 거래하는 상인들을 볼 때, 시시한 권력에 눈멀어 행세나 하려 하는 바리새인과 세리를 향할 때, 가이바의 같잖은 엄포와, 위선의 갈림길에서 자기 본심을 주장하지 못하는 빌라도의 위선을 목격하셨을 때도 "사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복음서 히어로토토의 언행은 빨간 글씨로 쓰여있고,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빨간 글씨는 편집자가 읽는 사람의 편의를 위해 구분해 놓은 것에 불과하지만, 성경에는 수많은 빨간 글씨를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많은 기록들로 인해 드는 의문 하나가 있다.예수님은 수다셨을까?예수님이 말 많이 하시고 진심은 약하셨을까? 내가 아는 수다의 개념은 말이 많다 혹은 적다의 의미가 아닌 것 같다. 진실 없는 말, 말을 위한 말, 자기를 나타내려는 말, 자랑 섞인 말, 남이 다 아는 일을 되풀이하는 말은 길이가 길던 짧던 그 말하는 사람은 수다스럽게 된다. 그러나, 중심이 담긴말, 사랑으로 범벅이 된 말, 뚜렷한 핵심이 있는 말은 길어도 수다스럽다 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과연 수다스러우셨나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이 한 문장이면 족하다. 그의 중심을 가득 채운 '사랑'에 대해 부인할 길은 우리에게 없다.말없이 사랑하심! 그것이 예수님의 표현 방식이다.


상대적으로, 가룟유다의 마음엔 "히어로토토를 팔려는" 생각으로 차 있었다는 기록은놀랍다. 그것도 상황이 또한 묘한 이유는 그 시각에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사랑의 마음을 품고 계시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매 초마다 변하며생각에 생각이 꼬리 무는 우리다. 나름의 계획과 각오와 적용으로 말씀 묵상을 결론짓지만, 그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변하는 '생각'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다. 사도바울이 이 같은 인간의 조변석개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로 한탄한 까닭이다.


제자들이라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겠는가. 베드로의 말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절대 변하지 않고 부인하지 않으리라는 각오에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목에 칼이 들어오고 손해를 보는 일 앞에 서면 그 각오 하나쯤 쉽게 버릴 수 있도록 마음의 창문이 다른곳을 향하기란 우리에게 너무 흔하다.


그럼에도, 이 사실을 인정하고 가야 할 이유가 있다. 그런 자아, 그런 자리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나로 내버려 두지 않고 싶은 까닭이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면류관을 발로 차버리고 싶지 않은 이유에서다. 약하기 때문에 눌러앉아 한탄하기보다는, 약하기 때문에 더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이유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저녁을 먹을 때에, 악마가 이미 시몬의 아들인 가룟 사람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아넘길 생각을 집어넣었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서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셨다.그리고 대야에 물을 담아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른 수건으로 닦아 주기 시작하셨다.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셨을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주님,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렵니까?" 하고 말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알지 못하나,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가 다시 예수께 말하였다. "아닙니다. 내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상관이 없다."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주님, 내 발뿐만 아니라, 손과 머리까지도 씻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이미 목욕한 사람은 온몸이 깨끗하니, 발밖에는 씻을 필요가 없다.


너희는 깨끗하다. 그러나 다 그런 것은 아니다."예수께서는 자기를 팔아넘길 사람을 알고 계셨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깨끗한 것은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3: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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