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직하고 두 번째 혼밥이다. 점심시간 목동 스타벅스는 직장인과 모자모녀, 혼공족으로 바글바글하다. 자리를 선점하고 앉아 우아하게 아아 한 잔 걸치며 샌드위치를 와그작 씹어 무는데, 역대급 밥이 생각 나 피식 웃음이 터졌다. (혼자 낄낄대는 중ㅋㅋ)
때는 바야흐로 4년 전.어린이집에서 가정통신문을 보내왔다.
"00월 00일 자연사박물관으로 소풍을 갑니다.
텐텐벳 텐텐벳을 준비해주세요.
평소 잘 먹는 음식이 좋습니다^^"
악!! 텐텐벳 너 뭔데? 어떻게 싸는 건데? 텐텐벳 텐텐벳은 또 뭔데?!왜 아빠표, 부모표는 없는 건데?!!멘붕에 빠진 나는 폭풍 검색에 들어갔다. 오색주먹밥 만들기, 소시지로 문어 만들기, 꼬마깁밥 만들기, 미니 샌드위치 만들기 등등 여러 레시피가 난무했으나 내 머릿속은 점점 하얘질 뿐이었다.
어머! 나.. 김밥 싸는 거 모르네?!
꼭두새벽부터 쌀 줄도 모르는 김밥과 옆구리 터지는 혈투를 벌이기 두려워, 평소 내가 텐텐벳(당시 4살)에게 종종 만들어주던 음식을 싸 보내리라 결심했다. 그리고 대망의 결전의 날! 새벽 5시에 일어나 뚝딱뚝딱 뇨리를 하고 아침 7시 집을 나섰다. (당시 법조 출입기자라출근이 빨랐음)
장어와 LA갈비. 4살 유아의 소풍 텐텐벳ㅋㅋㅋ
별 생각 없이 페이스북 피드에 소풍 텐텐벳 사진을 올렸는데 난리가 났다. 나중에 어린이집에서 전해 들은 바로는, 선생님들과 소풍 온 학부모들이그 텐텐벳 때문에한바탕뒤집어졌다고 했다. 아니 왜? 평소 잘 먹는거 싸서 보내라며?!!
(페북 댓글)
ㅡ남편 보양식인 줄?
ㅡ4살이 이런 걸 먹어?ㅋㅋㅋ
ㅡ스태미너 어쩔ㅋㅋㅋㅋ
ㅡ인간적으로 뼈는 발라줘라
장어야 이마트에서 손질 장어 사다가 시판양념장 쓰윽 발라 구우면 그만이고, LA갈비도 양념 다 재워진 거 굽기만 하면 끝인데 이렇게 만들기 쉬운 텐텐벳이 어딨다고!!! (비싸서 애미는 한 점 맛만 본다는 게 단점이지만.) 근데 댓글 반응을 보니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이느껴졌다. 그리하여 내 호기심은 아이에게로 향하는데...
아니, 너 4살짜리가 왜 이거 잘 먹는 건데?!ㅋㅋㅋ
그로부터 1년 후,난 제법 주부 티가 나서 김밥 따위는 거뜬하게 말 줄 알게 되었다. 땡쓰갓!
김밥은 이제 껌이다. 내 텐텐벳의 장점: 싱겁다 / 내 텐텐벳의 단점: 싱겁다.
텐텐벳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 친구 텐텐벳로부터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코로나가 좀 잠잠해졌을 때였음) 친구 집에 텐텐벳만 보내기로 하고,카페에서 작가교육원 줌수업을 듣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저녁 메뉴 미리 준비하려는데 아이랑 통화할 수 있냐고. 집 번호를 알려주고 내 할 일 열심히 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텐텐벳로부터 충격적인 일화를 들었다.
"□□엄마랑 통화했어?"
"응."
"저녁으로뭐 먹고 싶다고 했어?"
"응, 뭐 먹고 싶다고 했냐면...^^"
다음은, 텐텐벳와 □□텐텐벳 간통화를 재구성한 내용.
"○○아, 저녁 때 뭐 먹고 싶어?^^" "(천진난만) 장어요!!!" "(당황) 혹시.. 그거 말고 또 없니;;? "(해맑게) 갈비요!!!" " ...."
으악!!! ㅋㅋㅋ 난 당장 친구 텐텐벳에게 연락을 해 석고대죄를 했다. 얘는 암거나 다 잘 먹는다고, 장어니 갈비니 그냥 귓등으로 흘려 들으시라고. 다행히 인자한 미소로 그럴 수도 있죠, 하고 받아주셨다. 텐텐벳에겐다신 그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단단히 백신을 놨다.
"장어랑 LA갈비 비싸... 다음번엔 안 비싼 걸로 말씀드려줘.."
그랬더니 딸의 일갈. "뭐가 비싸고 안 비싼지 나는 모르지. 엄마가 얘기해줬어야 알지!" 듣고 보니 맞는 말 대잔치다. 그래, 네 애미가 누구냐!!! 애미를 쳐랏 아니아니 네 애비도 같이 쳐라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