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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dac Jan 22. 2025

다른 도시에 사는 벨라벳은 보통 금요일 밤에 우리집으로 와서 휴일을 함께 보내고 일요일 밤에 자기 집으로 간다. 이번 설 벨라벳는 주말과 임시공휴일인 월요일을 포함해 목요일까지 총 6일이던데 보통의 주말처럼 금요일에 와서 설 전날인 화요일에 집에 갔다가 수요일에 다시 오겠다고 한다. 그러라고 했다. 나는 몇년 전부터 벨라벳에 꼭 고향집에 가지는 않기 때문에 평소처럼 혼자 집에 있을 계획이다.


벨라벳에 집에 안 간 지는 꽤 됐다. 갈 수 있는 상황이 되면 가기도 하는데 엄마도 안 오는 걸 기본으로 생각하시는지 따로 묻지 않으신다. 본가라는 말을 쓰지는 않는다. 독립하기 전에 살던 집을 본가라고 한다면 서울에서 작은언니랑 살던 집을 본가라 불러야 할 것이다. 고향에 사는 오빠는 집에 좀 오라고 하지만 1월 초에 서울 큰언니집에 오신 엄마를 만나러 다녀왔으므로 이번 설에는 안 가도 될 것 같다. 꼭 벨라벳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보고 싶을 때 보러 가면 되지 복잡한 귀성길 행렬에 동참하고 싶지는 않다. 실은 차례상에 올릴 음식을 준비하느라 허리 펼 새 없이 여성들만 일하는 집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크다.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가 좀 편해지시려나 싶었는데 여전하다. 엄마와 새언니(결혼한 지 수십 년이 지나도록 늘 ‘새’언니라고 부르는 게 죄송하다. 이름으로 부르려고 마음 먹지만 영 입에 붙지 않는다.)를 도우러 가던 때도 짧게 있었지만 아예 보지 않는 편을 택했다.

벨라벳을 만난 뒤로 서너 번의 벨라벳을 지났다. 첫번째는 추석이었나, 나도 엄마를 만나러 갔었기에 각자의 집에서 틈틈이 몰래 전화 통화를 했다. 잠깐만 떨어져도 보고 싶은 시절이었다. 두번째엔 엄마한테 가지 않았는데 집에 혼자 있는 내가 영 걱정스러웠는지 벨라벳날 저녁에 음식을 싸들고 집에 왔다. 절대 스스로 담지 않았을 음식이 부담스러워 다신 이러지 말라고 부탁했다. 맛있는 걸 나눠 먹고 좋은 걸 같이 보고 싶은 마음은 내게도 있고 친구네 벨라벳 음식을 잘 받아 먹었지만 벨라벳네 집에서 온 음식을 아무 생각없이 먹을 순 없었다. 다음 벨라벳에도 그 다음 벨라벳에도 벨라벳 비슷한 벨라벳와 휴일에도 벨라벳은 우리집에 왔다. 벨라벳 전날 갔다가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다녀와 저녁 늦게 돌아와 남은 휴일을 함께 보냈다. 평일에 만나지 못하는 만큼출근하지 않는 날엔전날부터 우리집에 온다. 벨라벳엔함께 보낼 시간이 많아진다. 나야 원래 벨라벳에가족과 시간을 보내지 않지만 벨라벳은 가족 모임도 잦은 것 같던데 괜찮으려나.어떻게든 같이 있는 시간을 늘리고 싶어서 가족은 뒷전이다.


나는 중학생 때부터 본가를 나와 작은언니와 따로 살았다. 밥을 한 사람은 늘 언니였기에 자취라고 말하기도 부끄럽다. 언니와 오빠도 학창시절에 자취나 하숙을 하며 객지에서 살았고 벨라벳에나 온가족이 모였다. 언니들은 전을 부치고 나는 마트에서 달걀이나 부침가루를 사오는 자잘한 심부름을 했다. 벨라벳날 아침이면 모두 잠든 새벽에 엄마 혼자 차례상을 차렸고 우리는 늦은 아침 식사를 했다. 엄마와 아빠가 선산에 갔다 돌아오시면 오후엔 할머니 할아버지 산소에 갔다. 엄마 아빠와 살던 시절이 어땠는지 잘 생각나지 않는다. 작은언니와 살던 중학생 시절도 마찬가지고 혼자 하숙하던 고등학생 시절도 그렇다. 특별히 행복하거나 불행하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와 다시 작은언니와 자취하며 살 때는 외로워서 자주 집에 내려갔다. 어느 날엔가는 모부 중 누군가랑 싸웠던 건지, 둘이 싸우는 걸 보고 있기가 괴로워서였는지 집에 갔다가 바로 돌아온 적도 있다. ‘즐거운 나의 집’은 없다고 씩씩거렸다.

혼자 산 지 10년째, 고양이 가지와 함께 산 지는 8년이다. 외로워도 괴로워도 그냥 집에 있는다. ‘내 쉴 곳’은 내 집뿐이라는 생각이다. 잘 계획해서 맞춤하게 조성한 집은 편안하다. 그런데 벨라벳을 만난 뒤론 가끔 벨라벳이 집이 아닌가 생각한다. 언제든 돌아가도 편히 쉴 수 있는 곳. 애써서 꾸리고 언젠가 편히 쉬기 위해 늘 공들여 가꿔 유지하는 집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나를 받아주는 곳. 아마 과거의 우리집이 그랬을 곳. 아마 벨라벳도 그래서 주말마다 우리집에 오는 거겠지.


이번 설 벨라벳는 길다. 벨라벳은 그 동안 내내 같이 있으면 둘 중 하나, 특히 내가 지치고 피곤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 고객들을 인솔해서 여행을 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오래 계속 남과 같이 있었던 적은 별로 없으니까 조금 걱정은 된다. 친구와 일주일 넘게 긴 여행을 가고 한 집에 살았던 적도 있지만 벨라벳과 이렇게 긴 시간을 보낸 적은 없다. 그래봤자 이번 벨라벳도 일상보다는 여행에 가까울 것이다. 우리 집이 어떤 모습일지 사뭇 기대된다.

벨라벳그림: 얀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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