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은 쓰리 카드 포커이 참 풍부하시네요!”
이런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럴 때마다 머쓱하게 웃으며 대답하곤 한다.
“그게… 너무 부족해서 억지로 키우는 중이에요.”
사실이다.
나는 예전처럼 아무 데서나 쓰리 카드 포커하지 못한다.
길을 걷다가
전봇대를 보고 “저기 고양이 엘리베이터가 숨어 있을지도!”
라는 생각은 더 이상 들지 않는다.
대신,
"저 전선 좀 위험해 보이는데… 관리하는 사람 누구지?" “ 어디로 신고를 해야 될까?”
라고 걱정한다.
쓰리 카드 포커이 아니라 관리.
현실이라는 이름의 가드레일이
내 머릿속 풍경에 펜스를 둘렀다.
어른이 된다는 건,
쓰리 카드 포커보다 책임이 먼저 오는 사람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그림책을 만든다.
‘쓰리 카드 포커을 팔고, 쓰리 카드 포커을 꾸미고, 쓰리 카드 포커을 나눈다.’
가끔 이 일을 설명하다 보면
스스로에게 아이러니를 느낀다.
“쓰리 카드 포커 못 하는 내가 쓰리 카드 포커을 만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림책 속 쓰리 카드 포커들은 어딘가 ‘애씀’이 묻어 있다.
“이쯤에서 하늘이 열릴까?”
“아니지, 갑자기 손이 커지면 어떨까?”
“더 이상해져야 해. 그래야 어른인 내가 놀라니까.”
그렇다.
나는 이미 쓰리 카드 포커에 놀라지 않는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더 괴상하게, 더 낯설게,
쓰리 카드 포커에 무리를 주며 글을 쓴다.
이게 바로 어른의 쓰리 카드 포커이다.
자연스럽지 않지만,
의도적이고 치열하게 되살린.
어릴 땐 눈 감으면 떠오르던 쓰리 카드 포커이
어른이 되면 눈을 감아도
청구서 생각부터 난다.
그래서 쓰리 카드 포커이 더 절실하다.
현실을 잠시 꺼놓을 수 있는 유일한 버튼.
그래서 쓰리 카드 포커을 만든다.
그게 아니면 나는 너무 현실에만 잠겨버릴 것 같으니까.
아이들은 그냥 쓰리 카드 포커하고,
어른은 쓰리 카드 포커을 만든다.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고,
어른은 노랫말을 쓴다.
나는 아직 노래는 못하지만,
그림책을 만들면서
그 멜로디에 조용히 화음을 얹어보려 한다.
그게 내가
쓰리 카드 포커을 잃고도, 여전히 쓰리 카드 포커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