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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에누 Apr 15.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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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집중력 탓일까?

난독증일까? 책 한 권을 온전히 정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진다. 솔직히 말하면 책을 못 읽는 것이 아니라 안 읽는 삶을 살고 있다. 책 말고도 재밌는 일이 많아서 그럴까? 한 시절문인행색을 내다가 무인으로 전향한 것 같기도 하다.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당구나 골프 연습은사나흘만 걸러도근육이 굳는 느낌이 든다. 헬스클럽에 등록해 놓고 땡땡이를 치는 죄의식이 책을 읽지 않는 것에 대한 거시기함보다 더 크다."요즘 뭐 읽고 있어?"라는 말 대신 "잘 맞고 있어?"라는 안부 인사가 입에 밴다.


노안도 한몫한다. 원시교정 안경이 없으면 글자가 어른거려서 읽는 게 불가능하다. 공원 벤치 같은 데 앉아 느긋하게 책을 펼쳐드는 낭만적 장면도 연출하기 어렵다. 안경을 일일이 챙기기 귀찮아하는 습성 때문이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책을 읽지 않게 되는 이유는 단지 시력 문제만은 아니다.
노화는 집중력의 상실과도 직결된다. 요한 하리의 <도둑맞은 집중력이라는 책도 이 점을 지적한다. 그는 예전엔 몇 시간씩 책에 몰입하던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몇 페이지만 넘겨도 흐트러지는 집중력을 경험하게 됐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전체가 겪고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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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울리는 알림, 끊임없이 갱신되는 SNS 피드.
뇌가 한 가지 일에 깊이 몰입하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여러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실은 주의가 분산된 상태에서 그 어떤 일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독서처럼 느리고 깊은 몰입을 요하는 행위는 그 피해가 더 크다.

정보 과잉도 문제다. 너무 많은 정보가 매일 쏟아지다 보니, 긴 글보다는 짧고 자극적인 콘텐츠에 익숙해진다. 독서는 본질적으로 ‘느림의 예술’인데, 이 느림을 감당해 낼 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나약하다는 말은 아니다.
이 책은 그런 나를 다정하게 감싸며 말해준다.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 속에 당신이 있다”라고.

예전에는 책을 읽으면서 포스트잇을 붙이고 형광펜을 칠하고 밑줄을 긋는 식의 아날로그 독서를 했다. 스티커에 키워드를 써서 갈피에 꽂기도 했다. 요즘은 그런 방식이 거의 사라졌다. 궁금한 건 휴대폰으로 바로 검색해서 캡처하고, 그나마도 챗GPT 덕에 검색조차 줄어들었다.
책에서 얻은 지식은 혈관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지만, 검색으로 얻은 정보는 뇌하수체까지 도달할 새도 없이 휘발된다. 용도를 충족하면 즉시 사라진다.

책 한 권을 산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읽을까?
장편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게 된다. 그래야 스토리가 연결되고 재미가 생기니까. 반면, 단편집이나 에세이는 관심 있는 제목, 끌리는 주제부터 들춰보기 마련이다. 전문서적이나 교과서도 상황에 따라 다르다. 특히 시험과 관련된 교재는 어쩔 수 없이 다 읽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내가 쓴 책에 대해 독자들에게 정독을 요구한다는 건 참 후안무치한 일이다. 일부분이라도 읽어주면 감사할 일이다. 굳이 사지 않고 도서관에서 빌려 읽는 것도 전혀 서운하지 않다.


어쩌다가 '저서'라는 글묶음을 여러 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 룸카지노 교과서로 채택해 대학생들에게 필독을 강요하는 건 스스로도 민망한 일이었다.
그런 생각 끝에 꼭 필요한 교재를 비매품 도서로발간해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곤 했다.하지만 그 책도 완독하는 학생은 많지 않았다. 수업이 끝난 뒤, 강의실 책상 위에 그대로 남겨진 책을 보고 분노와 배신감을 느낀 적도 있다. ‘다신 이런 산타클로스 같은 짓은 하지 말아야지’ 하는 속 좁은 생각도 들었다.

책을 쓴다는 일이 ‘빚’처럼 느껴졌다. 나무에게도 빚지고, 한글을 만들어준 세종대왕에게도 죄송하고, 끝내 다 읽지 않을 독자에게도 뭔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법정스님도 그런 마음을 가지셨던 것 같다.
‘무소유’라는 책을 쓰셨지만, 세상에 글을 남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자신의 책이 소유의 대상이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던 거다. 하지만 그 유언은 오히려 그 분의 책에 대한 소유욕을 더 자극했다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다.

나도 스님의 뒤를 어설프게 흉내 내본 적이 있다. 정년퇴임을 앞두고, 보유했던 책들을 모두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요즘은 도서관도 책 기증을 반기지 않는다. 그래서 후배 교수나 제자들에게 틈틈이 나눠줬다. 그래도 남은 책들은 애물단지처럼 남았다. 집으로 가져오기도 애매했다. 부산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가족들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야 했기 때문이다. 좁은 집에 읽지도 않을 책을 보물처럼 들여놓을 이유도 없었다.

특히 전공 관련 책들은 이미 십여 년전부터 관심이 멀어진 상태였다. 퇴임 후 그 책들에 다시 손이 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은 책들은 어쩔 수 없었다. 나눌 수 없고, 버리기도 애매한 책들이 쌓여갔다. 그러다 어느 날, 결심했다.


연구실 책장에 꽂혀있던 책들을 캐리어에 실어 캠퍼스귀퉁이에 있는 소각장으로 옮겼다. 숨을 크게 한번 들이키고 나서 직접 불을 질렀다. 책을 태우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종이가 쉽게 타들어 갈 줄 알았지만, 책은 고집이 있었다. 불꽃을 피해 똘똘 뭉친 채 타들어갔다.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르고, 한 장 한 장 검게 변해가던 그 순간, 이상하게도 마음이 후련하지 않았다.

책을 불태우며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다.
속 시원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찜찜했다. 뭔가를 정리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무엇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꼭 책이 아니라 나 자신을 태우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과거에 써두었던 문장들, 밑줄 친 구절들, 서평을 붙였던 책들까지, 다 불 속에서 사라졌다.

그때 나는 내 안의 어떤 욕망도 함께 태운 줄 알았다. 다시는 책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고, 원고를 펼쳐보는 일도 하지 않았다. 출간의 기쁨도, 독자의 반응도, 다 지나간 일이니 놓아주자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간이 지나고 나니 다시 쓰고 싶어졌다. 어디선가 봤던 문장이 자꾸 머릿속을 떠돈다. 가끔 서점에 들러 새로 나온 에세이집들을 훑어보다가, 누군가의 문장이 마음에 들어오면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이런 건 나도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물론 곧바로 ‘근데 안 쓰잖아, 안 되잖아’ 하는 자조가 따라붙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무언가를 쓰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어떤 이야기를 꺼내놓고, 그 이야기를 받아줄 독자가 있다는 건 여전히 큰 기쁨일 것이다. 출간 소식을 SNS에 올린 작가들을 보면, ‘와 대단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부럽다, 나도 다시 해볼 수 있을까?’ 하는 감정이 스며든다.

책은 나를 괴롭히면서도, 끝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한때 그렇게 불살라버렸지만, 책이라는 존재는 내 안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쓰고 싶어 하는 마음을 되살려낸다. 사라진 줄 알았던 열망이 책장 한 구석에서 먼지를 털고 다시 걸어 나오는 것처럼. 요즘 다시 연필을 쥐고 메모를 시작했다. 때로는 휴대폰 메모장에 정리해 두기도 한다. 게으르게, 아주 천천히.

그런 나에게, 최근 한 권의 에세이집이 찾아왔다. 며칠 동안 그냥 훑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새 정독하고, 또 정독하게 되었다. 몇몇 구절이 마음을 건드렸고,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감정을 일깨웠다. 그 책은 나에게 다시 ‘정독’이라는 오래된 습성을 되살려줬다.

감정이입하며, 곱씹고 또 곱씹으며 읽었다. 몇 번을 되풀이해 읽고도 또다시 펼쳐 들게 만든 그 책 이야기. 다음 글에서 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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