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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인숙 Feb 27. 2025

프리카지노군의 사모곡(思母曲) 2편

김인숙 저 <조선 4대 사화(프리카지노군 부분 요약 발췌)

무오사화(戊午史禍)


비록 프리카지노군이 ‘폭군’이라는 꼬리표를 달기는 했으나 처음에는 정치를 잘했다. 1494년 12월, 성종 승하 이후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은 즉위 초 성종 때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이어갔다.


등극 6개월 후에는 전국의 모든 도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민간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았다. 또 인재를 확충하기 위해 별시 문과를 실시하였으며, 변경 지방에 여진족의 침입이 계속되자 귀화한 여진족을 내세워 그들을 회유케 하여 변방 지역의 안정을 꾀했다.


문화 정책으로는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실시하였으며, 세조 이래 3조의 <국조보감(國朝寶鑑)을 편찬해 후대 왕들의 제왕 수업에 귀감 되도록 했다. 오히려 겉으로 보기에는 그 어느 때보다 드물게 평화로운 시기였다.


그러나 연산은 처음부터 부왕인 성종과는 다른 정치를 펴고 싶은 야심이 있었다.


성종은 친정 후 세조 대에 양산된 훈구 공신들의 전횡을 꺾기 위해 대간을 키웠다. 대간이란 감찰의 임무를 맡은 대관(臺官)과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의 임무를 맡은 간관(諫官)을 합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조선시대의 대간은 왕권 및 의정부와 육조, 특히 이조와 상호 견제하도록 짜인 권력구조 속에서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는 데 큰 구실을 했다.


대간은 성종의 바람대로 훈구세력을 밀어내는 데 크게 기여했으나 나중에는 힘이 너무 실려 왕권까지 제약하게 되었다.


성종은 학문을 담당하던 홍문관의 언론 기능을 강화하여 대간을 견제토록 했다. 비로소 왕권과 신권에 대한 중요한 견제 장치인 3사, 즉 대간에 홍문관이 가세한 언론, 감찰 기관이 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성종은 늘 대간들의 반대에 부딪쳐 많은 일들을 접어야 했다.


14살 때부터 조참에 참여하여 정치 공부를 했던 연산은 신하들 앞에서 무기력하게 밀리는 성종이 못마땅했다.


왕이 누군가? 온 백성과 신하들이 우러러보는 절대 권력자가 아니던가?


그러나 연산이 바라본 성종은 늘 신하들의 공격에 쩔쩔매며 해명하는 약하디 약한 존재였다.



프리카지노청와대 뒤쪽의 휜 소나무


연산은 자신이 왕위에 오르면 부왕처럼 신하들에게 질질 끌려다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렇게 결심했던 연산도 막상 닥친 현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연산이 즉위한 후에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연산과 대간들과의 첫 충돌은 즉위한 지 며칠 되지 않았을 때 일어났다.


전례에 따르면 수륙재는 늘 절에서 지냈다. 그러나 성종은 불교를 멀리했기 때문에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며 신하들이 연산에게 물었다.


수륙재(水陸齋)란 물이나 육지에 있는 외로운 귀신, 배고파 굶주리는 아귀에게 공양하는 법회로 고려 광종 22년 혜거국사가 처음 시행하였다.


이 수륙재는 많은 물자와 인원이 동원되는 행사였다.


처음으로 부딪친 일이라 연산은 대비전에 의견을 물었다. 대비는 성종이 불교를 좋아하지는 않았으나 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이 없었으니 폐할 수 없다고 했다.


연산 역시 대비의 뜻을 좇아 수륙재를 허락했다. 그러자 대간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이는 불교를 숭상하는 행동으로 대행 대왕의 뜻을 거스르는 불효 행동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연산은 발끈했다.


선왕께서 어찌 다 불법을 좋아하셨으랴마는, 수륙재의 거행은 조종조로부터 이미 그러하였고, 대행 대왕께서도 그만두라는 유언이 없었으니, 폐지할 수 없다.”


신하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대행 대왕이 불도를 본디 믿지 않으셨는데, 이제 칠칠일에 수륙재를 지낸다면 효자가 어버이를 받드는 뜻이 아니오니, 지내지 마소서.”


그로부터 얼마 후 다시 성종의 묘호(廟號)를 둘러싸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묘호는 ‘인(仁)’과 ‘성(成)’ 두 글자가 거론되었는데, 명나라 4대 황제 홍희제의 묘호가 인종이었기에 중국의 묘호를 같이 쓰는 것은 피하자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은 서로 경중이 크게 다릅니다. ‘이란 것은 천지가 만물을 낳은 마음이요, 마음의 큰 덕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은 집대성(集大成)의 성이니 역시 아름다운 칭호다라고 하기는 하지만, 신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 위에 ()’ 자를 더한 까닭에 자가 아름다운 것이지, 만약 다만 자만 쓴다면 어찌 에 견줄 수 있겠습니까?”


연산은 정승들과 원로대신들의 뜻에 따라 ‘성’ 자를 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며칠 후 홍문관 부제학 성세명 등이 묘호를 인(仁)으로 고칠 것과 성(成)을 주장하는 대신들을 벌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프리카지노창덕궁


연산은 몹시 화가 났다. 이 일은 이미 자신이 결정한 일인데 기어이 뜻을 꺾으려는 상소가 올라온 것이다. 더더욱 홍문관의 탄핵에 대신들이 줄줄이 사직 상소를 올리자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고민하던 연산은 유생들이 올린 상소를 트집 잡아 서명한 유생 157명을 잡아들이라 명했다. 유생을 모두 잡아들이는 것은 전례에 없던 일이라 이 일에는 대간과 대신들이 모두 나서서 풀어줄 것을 청했다. 그러나 연산은 기어이 유생 세 명을 유배형에 처하고 21명은 과거 응시 자격을 박탈하였다.


선왕께서 유생을 죄주지 않았으므로, 이렇듯 임금을 능멸하는 풍습을 가져왔다. 일마다 사사건건 걸고 넘어간다면 과연 임금의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이 말은 연산이 왕권 강화를 위한 속마음을 털어놓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러한 왕의 생각이 앞으로 피바람을 일으킬 행보의 시작이라는 것을 눈치챈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


얼마 후 실록의 기초가 되는 사초가 빌미가 되어 무오사화가 일어났다.


무오사화를 계기로 신진 사림파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원래 사화(士禍)란 선비들이 화를 입은 사건이라 하여 선비 사(士)를 쓰는데, 무오년의 사화는 사초 때문에 일어났다 하여 역사 사(史)를 써 사화(史禍)라 한다.

즉위 후 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던 대간 세력과의 팽팽한 줄다리기에서 승리한 연산은 무오사화 이후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게다가 간신들은 혹시 남아 있을 사림 잔당을 한 명이라도 더 잡아내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간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그동안 걸핏하면 상소를 올려 임금의 뜻을 번번이 방해하던 3사의 대간과 유학자들이 몸을 사리자 왕은 마음껏 정치를 할 수 있었다. 결국 무오사화는 연산이 바라던 대로 언론 기관의 기능을 상실시킨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왕에게 학문해야 한다고 권하는 신하는 없었고, 오직 비위를 맞추려고 전전긍긍하는 신하들만이 프리카지노의 주위에 가득 찼다.


흥청망청(興淸亡淸)의 유래


조정을 자신의 손아귀에 쥐었다고 판단한 프리카지노은 그때부터 매일 향연을 베풀고 기생을 궁으로 끌어들였다.

이때 궁중으로 들어온 여인들을 ‘흥청(興淸)’이라 했는데 여기서 마음껏 떠들고 논다는 뜻인 ‘흥청거리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프리카지노은 처녀든, 유부녀든, 기생이든 여염집 여인이든 가리지 않고 얼굴이 좀 어여쁜 여자들이면 강제로 데려와 수청을 들라 명했고, 수청을 들지 않으면 죽였다.이 흥청 때문에 몰락한 가정도 한두 집이 아니었다.



프리카지노흥청으로 뽑힌 여인들


프리카지노은 장악원의 기생 수를 1천 명으로 늘린 후 이들을 운평(運平)과 흥청(興淸)이라 이름 지었고, 더불어 악공의 수도 역시 1천 명으로 늘리고 광희(廣熙)라 불렀다.


운평에 뽑히려면 얼굴이 예뻐야 함은 기본이고, 노래와 춤도 일품이어야 했다. 운평 중에서 인물이 반반하고 재주가 빼어난 여인은 흥청이 되었는데, 흥청이 되면 가족들에게 집과 땅을 하사하였다.


연산은 수많은 여인들의 치마 속에 빠져 술과 사냥과 춤을 추며 살았다. 정치는 아예 뒷전이었다.


프리카지노이 흥청과 노는 것을 한탄한 백성들은 이를 조롱하고 비판하는 의미로 ‘흥청망청(興淸亡淸)’이라는 말을 민간에 유행시켰다. 이 말의 속뜻은 흥청들과 놀면서 정사에 관심이 없으니 곧 나라가 망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채홍사에서 뽑은 흥청들


이때 나인들이 국고로 먹고 입는 자가 1천 명이나 되어, 군자창, 풍저창, 광흥창 등의 창고가 모두 텅 비었다.<프리카지노군일기, 1505(을축乙丑, 프리카지노군 11)년 11월 3일


왕이 금표 안 길을 따라 두모포에 놀이 가므로 궁녀 1천여 명이 따랐었는데, 왕이 길가에서 간음하였다.<프리카지노군일기, 1506(병인丙寅, 프리카지노군 12)년 7월 18일


그런데 이러한 프리카지노의 폭정, 그 뒤에는 직접 채홍사가 되어 총신 역할을 한 임사홍과 그의 아들 임숭재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후일 임사홍은 소인에 이어 간신이라는 오명까지 쓰게 된 것이다.


임사홍은 왕의 후광으로 권세를 누리다가,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몽둥이로 맞아 죽고 이어 부관참시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요부(妖婦) 장녹수


수많은 여인이 연산에게는 그저 하룻밤 노리개일 뿐이었다. 그러나 장녹수는 달랐다. 그것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아니면 장녹수의 요염한 교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연산이 장녹수에게 깊이 빠져 있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연산이 남다르게 총애한 여인으로는 장녹수 외에 전전비(田田非), 백견(白犬)등도 있었다.


장녹수는 연산을 어린아이 같이 조롱하고 때로는 학대하며 욕을 하기도 했다고 전한다. 이를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은 혀를 찼지만, 연산은 자신의 마음을 어루만질 줄 아는 장녹수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장녹수는 당시 예종의 둘째 아들인 제안대군(齊安大君)의 노비였다. 그녀는 노래와 춤이 뛰어나고 매우 영리했다.


장녹수의 아버지는 성종 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의 현령을 지낸 장한필이다. 그러나 어머니가 장한필의 노비였다. 당시 조선은 양반의 급증을 막기 위해 어머니가 천인이면 자녀도 천인의 신분을 따라야 했기에 장녹수는 나면서부터 노비였다.


어린 시절 장녹수는 매우 곤궁하게 지냈는데, 가난 때문에 여러 남자에게 몸을 의탁했고 자식까지 두었다. 그러던 중 제안대군의 가노와 혼인하여 제안대군의 여종으로 살게 되었다.


프리카지노군과 장녹수가 등장하는 사극


연산은 미복 차림으로 자주 바깥출입을 했다. 어느 날, 연산이 숙부인 제안대군의 집으로 행차해 술을 마시던 도중 제안대군이 장녹수를 불러 가무를 시켰다.


연산은 첫눈에 장녹수에게 반해하룻밤을 보냈다. 그 후 프리카지노은 그녀를 잊지 못해 궁궐로 불러들였다.


연산은 곧 장녹수를 후궁으로 삼았다. 왕실에서는 장녹수가 천기였으며 이미 시집을 여러 번 갔고 가정도 있는 여자라고 반대했지만, 연산은 이를 무시하고 장녹수를 종 4품인 숙원에 봉했다.


왕의 사랑을 얻은 여인에게는 거칠 것이 없었다. 당시 벼슬을 얻으려면 장녹수에게 청하는 것이 가장 빨랐다. 덕분에 장녹수의 사가는 벼슬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재물은 쌓아둘 곳이 없었다.


장녹수가 임신하여 옹주를 생산하자 1503(프리카지노군 9)년에는 종 3품인 숙용(淑容)에 봉해졌다. 이듬해에는 장녹수의 사가(私家)가 민가 가운데 있어 화재의 위험이 있다 하여 주변의 민가를 헐어 새로이 단장시켰다.


프리카지노군과 장녹수(영화 스틸)


연산은 장녹수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들어주었다.


장녹수가 자신의 부모 환갑 때 장수를 빌려고 하자 악공을 보내 음악을 하사했고, 경복궁에 드나드는 장녹수가 궁 안 기생들의 따가운 시선을 부담스러워하자 여러 명의 군졸을 거느린 부장(部將)이 앞뒤의 사람을 물리쳤으며, 장녹수의 패물을 만들기 위해 종들을 광산으로 보내 은을 캐 오게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장녹수의 사가에 쌀과 면포, 정포, 백포와 중국에서 들여온 후추까지 하사했다. 심지어는 장녹수가 자신의 옷을 밟은 궁녀 옥지화를 두고 분해하자 ‘옥지화를 군기시 앞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돌려 보이고 높이 매달아 여러 사람이 보게 하라’는 어명까지 내린다.


실수로 상전의 치마를 밟았을 뿐인데 불쾌하다 하여 목숨까지 잃게 되었으니, 장녹수의 권세가 얼마나 높은지 가히 짐작이 간다.


영화 <왕의 남자



1506년에는 장녹수의 오빠 복수(福壽)와 자녀들을 모두 양인의 신분으로 올리고, 나라의 배를 이용하여 평안도 미곡 7천 석을 무역하게 하였다.


장녹수의 최후는 비참했다.


<프리카지노군일기에는 “전비, 녹수, 백견 등 연산이 총애하던 여인들을 군기시 앞에서 베니, 길에 있던 사람들이 다투어 기왓장과 돌멩이를 그들의 국부에 던지면서 ‘일국의 고혈이 여기에서 탕진됐다.’고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라고 적고 있다. 산더미같이 쌓아둔 재물은 모두 나라에 몰수되었다.


피의 복수

장녹수의 기세가 한창인 어느 날 예종의 딸인 현숙공주가 장녹수를 찾아왔다. 현숙공주는 임사홍의 큰아들 임광재의 아내였다. 장녹수는 왕이 총애하는 임사홍과 친밀하게 지냈는데, 임사홍의 며느리들과도 곧잘 어울렸다.


현숙공주가 장녹수를 찾아온 것은 바로 폐비 윤 씨의 생모인 신 씨가 자신의 집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장녹수는 왕의 외조모가 현숙공주의 사가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두 눈이 빛났다. 장녹수는 그 길로 연산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당시 연산은 향락을 위해 국고가 더 필요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 세금을 걷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쥐어짜도 더는 원망밖에 나올 것이 없었다.


이에 프리카지노은 훈구파들이 받은 공신전을 몰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안 그래도 연산의 정치가 지나치다고 생각하고 있던 훈구파들은 연산이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으려 하자 즉시 반발했다.


훈구파는 연산에게 향락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연산에게 닥친 이 위기를 돌파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임사홍이었다. 임사홍이 폐비 윤 씨의 전말을 연산에게 고해 갑자사화를 일으킬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다.


장녹수에게 자신의 외할머니가 임사홍의 집에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연산은 그날로 미복 차림을 하고 임사홍의 집을 찾았다. 임사홍은 넙죽 꿇어 엎드려 눈물로 폐비 윤 씨의 전말을 고했다.


“대궐 문이 겹겹이라 스스로 들어가 아뢸 수 없었는데, 오늘 저의 집에서 성주를 뵐 줄이야 어찌 뜻하였겠습니까? 전하, 모후께서 폐비된 것은 엄 숙의와 정 소용의 성품이 편협한 데다가 선왕의 은총이 지나쳐 서로 시기함이 쌓여서 저지른 일이옵니다. 모후께서는 투기한 죄밖에 없사온데, 두 후궁은 틈만 나면 모여 앉아 모후를 참소하였나이다.”


연산은 한동안 말을 잃었다. 어머니가 폐비된 사실도, 사가로 쫓겨나 죽은 것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가 두 후궁의 모략으로 사약을 받았다는 사실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성종은 프리카지노을 세자로 책봉한 후 폐비의 일은 사후 100년이 지나도록 비밀에 부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모두 프리카지노이 알게 될까 봐 쉬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비밀을 임사홍이 터뜨린 것이다.


“신은 그때 왕비의 폐위를 강력하게 만류하였사옵니다만, 일개 승지인 신이 그것을 막기가 역부족이었사옵니다. 더 자세한 내막을 들으시려면 외조모를 만나보소서. 신의 말에 추호도 거짓이 없음을 곧 아시게 될 것이옵니다.”


임사홍은 소리를 내며 구슬피 울었다. 프리카지노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곧 할머니 신 씨를 찾아갔다.


“이 늙은 것이 감히 전하의 용안을 뵈오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사옵니다.”


신 씨는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피 묻은 딸의 저고리를 프리카지노 앞에 내놓으며 통곡하였다.


“이것은 마마가 사약을 마시고 죽어가면서 피를 토하실 때 입으셨던 그 저고리이옵니다. 전하 부디 폐비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아직도 고혼이 구천에서 떠돌고 있을 것이옵니다. 폐비의 고혼이 편히 눈감게 해 주옵소서."


드라마 한 장면


프리카지노의 눈도 붉게 물들었다. 프리카지노은 통곡하는 할머니의 손을 부여잡고 당시의 상황을 좀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간청하였다.


“폐위된 마마는 억울하여 밤낮으로 울다가 끝내는 피눈물을 흘렸사옵니다. 그러나 모든 잘못은 마마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책하셨습니다. 다만 어떻게든 살아 있으면 원자 아기씨를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오직 그 희망만으로 세월을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궁중에서는 마마를 중상함이 날로 더했습니다.”


신 씨의 말은 사실이었다. 당시 성종은 세자가 있었기에 어떻게든 폐비를 다시 궁궐로 불러들이려고 안간힘을 썼다.그러나 인수대비는 성종의 지시로 윤 씨를 염탐하던 내시를 불러 ‘윤 씨가 죄인답지 않게 머리를 빗고 낯을 씻어 예쁘게 단장하고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이 없다’라고 성종에게 보고하게 했다.


이에 성종은 내시의 참소를 믿고 괘씸하다 하여 사약을 내린 것이다.


항간의 소문대로 폐비 윤 씨와 인수대비(소혜왕후)의 사이는 별로 좋지 못했다. 폐비 윤 씨는 성종보다 무려 12살이나 위였고, 시어머니와도 겨우 8살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1477년(성종 8년), 자성대왕대비(정희왕후) 윤 씨는 명을 내려, 중전 윤 씨의 폐위에 대해 논하였다. 덕종의 후궁인 귀인 권 씨 집에 날아든 언문투서 때문이었다.


투서에는 성종의 총애를 받던 소용 정 씨와 숙의 임 씨가 왕비 윤 씨와 원자(프리카지노군) 모자를 해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프리카지노군일기


그러나 이 일은 중전 윤 씨가 어머니 부부인 신 씨, 나인과 여종 등 주변 사람들을 시켜 꾸며낸 일로 드러났다.


중전의 도덕적 결함을 두고 대왕대비와 성종은 윤 씨를 폐위하고자 했다. 또 윤 씨는 극약인 비상(砒霜)을 가지고 있었고 굿하는 방법을 적은 서책을 성종에게 들킨 일도 있었다. 이로 인해 성종은 윤 씨에게 마음을 돌리게 된다.


그러나 중전을 폐출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윤 씨는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근신하기에 이른다. 윤 씨의 질투가 거기에서 끝났다면 오죽이나 좋았을까?


윤 씨의 질투는 끝날 줄을 몰랐다. 자신의 생일인데도 아무런 인사조차 없는 성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여 후궁의 처소에 들이닥쳤다.그리고 놀라서 중전을 나무라는 성종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고 말았다.


당시 조선의 법도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배경 없는 윤 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어머니 인수대비는 그 길로 윤 씨를 사가로 쫓아냈다.


마침내 사인교에 오른 폐비 윤 씨는 그토록 보고 싶었던 원자(프리카지노군)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궁궐에서 나왔다. 윤 씨는 사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머니 신 씨를 붙잡고 통곡했다.


한편 조금도 반성하는 빛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성종은 폐비를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윤필상 이하 대신들은 밤낮으로 윤 씨에게 중한 벌을 내리라고 요구했다. 결국 성종은 윤 씨에게 사약을 내리라는 교지를 내린다.


성종 13년 임인(壬寅, 1482)년 8월 16일 이세좌가 사약을 들고 폐비의 사가를 찾았다.


사약을 마시는 폐비 윤 씨


윤 씨는 사약을 먹고 죽음을 맞았다. 마지막으로 윤 씨는 어머니에게 피가 묻은 금삼(비단으로 만든 한삼)을 세자에게 전해달라고 유언하였다.


"원자가 다행히 목숨을 보전하거든……, 이것으로 나의 원통함을 말해주고……, 또 나를…… 임금이 거동하는 길옆에 묻어……, 임금의 행차를 보게 해 주시오."


그 피 묻은 문제의 저고리를 손에 든 프리카지노은 다시 한번 입술을 깨물었다. 프리카지노의 무서운 복수의 서막이 오르게 된 것이다.


자신의 피 묻은 저고리를 남겨 아들에게 처절한 복수를 하게 만들고 훗날 아들이 폐위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무덤 속에 누운 폐비 윤 씨는 과연 어떤 심정이었을까?


갑자사(甲子士禍)


통곡하는 외할머니 신 씨를 뒤로 하고 연산이 그 길로 쫓아간 곳은 바로 선왕의 후궁, 종 2품 숙의에 오른 엄 씨와 정 씨가 살고 있는 궁이었다.


프리카지노의 눈은 이미 살기로 번득였다.연산은 내시에게 즉시 몽둥이를 구해오라 이르는 한편 도승지를 불러 말했다.


엄 씨와 정 씨는 중죄를 저질렀기에 서인으로 폐하고, 하사 받은 노비와 재산은 모두 거두어들이라. 또 그 아들들 역시 이제부터는 종친이 아니다.”


연산은 나인들을 문밖으로 내쫓고 출입을 엄금시켰다. 졸지에 서인이 되어버린 두 후궁은 연산의 핏발 어린 눈을 보고 이제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폐비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으니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몽둥이를 부여잡은 프리카지노의 손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네 년들이 지은 죄를 알렸다?”


프리카지노은 다짜고짜 몽둥이를 휘둘렀다.두 후궁은 살이 터지도록 맞을 뿐이었다.


“하늘이 무섭지 않습니까? 대체 이 무슨 패악한 짓이오. 우리들이 선왕의 후궁임을 정녕 모르신단 말이오?”

“그 입 닥쳐라.”


프리카지노은 분이 풀리도록 몽둥이를 휘둘렀다. 프리카지노은 곧 정 숙의의 아들인 안양군(安陽君) 이항과 봉안군(鳳安君) 이봉을 잡아들였다.


“여기 이 죄인들은 죽어 마땅하도다. 너희들도 함께 이들을 몽둥이로 쳐라.”


왕의 명령에 안양군은 어두워서 어머니라는 것도 모른 채 죄인을 몽둥이로 쳤고, 봉안군 이봉은 짐작으로 어머니일 것이라고 여겨 차마 치지 못하였다. 날이 밝기 전 두 여인은 참혹한 모습으로 죽고 말았다.


두 여인을 몽둥이로 때려 숨지게 한 후 프리카지노은 장검을 들고 자순대비(정현왕후-훗날 중종의 어머니)의 침전으로 달려갔다.


이미 소식을 전해 들은 자순대비의 시녀들은 무서워서 도망쳤고, 자순대비는 침전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때 다행히 중전 신 씨가 달려와 말리자 프리카지노은 발걸음을 돌렸다.


연산은 안양군과 봉안군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대왕대비전으로 향했다. 인수대비는 담담한 심정으로 연산을 맞았다.


“대비마마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몽둥이를 들어 직접 선왕의 후궁을 때려죽인 프리카지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그것은 이미 사람의 눈이 아니었다.


프리카지노의 돌발적인 행동으로 이제는 자신이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인수대비는 두 눈을 감았다. 그렇지만 며느리를 내친 것에 대한 후회는 없었다.


다만 이런 결말을 예상했기에 그토록 프리카지노이 세자에 책봉되는 것을 반대했고, 프리카지노의 귀에 폐비의 일이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히 단속했었다. 그러나 결국 곪은 것은 터지고, 올 것은 오고야 만다고 하지 않던가!


극 중 인수대비


“주상, 부왕의 후궁을 죽이시다니요? 죽어서 어찌 부왕의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입니까?”


인수대비는 그래도 체통을 잃지 않고 프리카지노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죽어서 부왕의 얼굴을 보는 것은 하나도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내 어머니……, 처참하게 사약을 받고 죽은 어머니가 가엾을 뿐입니다. 어째서……, 왜……, 내 어머니를 그토록 괴롭히셨습니까?”


인수대비는 프리카지노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프리카지노이 갑자기 인수대비 쪽을 향하여 몸을 던졌다. 인수대비는 곧 터질 듯한 머리를 움켜쥐었다. 연산이 인수대비의 머리를 들이받은 것이었다.인수대비는 그 길로 혼절하고 말았다.


왕이 항과 봉의 머리털을 움켜잡고 인수대비 침전으로 가 방문을 열고 욕하기를 이것은 대비의 사랑하는 손자가 드리는 술잔이니 한 번 맛보시오.” 하며, 항을 독촉하여 잔을 드리게 하니, 대비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왕이 또 말하기를, “사랑하는 손자에게 하사하는 것이 없습니까?” 하니, 대비가 놀라 창졸간에 베 2 필을가져다주었다. 왕이 말하기를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 하며, 불손한 말이 많았다. 뒤에 내수사內需司를 시켜 엄 씨, 정 씨의 시신을 가져다 찢어 젓을 담근 후 산과 들에 흩어버렸다.

<프리카지노군일기, 1504(갑자甲子, 프리카지노군 10)년 3월 20일


그 뒤 프리카지노은 안양군과 봉안군을 곧바로 귀양 보냈고, 이어서 ‘항과 봉은 이미 그 아내와 인연을 끊었으니 그 아내들은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라’라는 기막힌 명을 내린다.


또 두 후궁의 부모와 동생은 연좌하여 곤장 100대를 쳐서 먼 변방으로 쫓아냈다.


프리카지노의 복수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친김에 폐비 윤 씨 사건에 얽힌 인물들을 모두 조사해서 보고하라는 명을 내렸다.


손자의 무례함에 놀란 인수대비는 그대로 누워 일어나지 못했다. 안 그래도 병중에 있던 인수대비는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504(갑자甲子, 프리카지노군 10)년 4월 27일 술시(戌時)에 창경궁 경춘전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만 18살에 세자빈이 되었으나 남편의 죽음으로 궁궐을 떠났고, 아들이 왕위에 오르면서 대비가 되었으나 끝내 손자의 폭정으로 인해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인수대비가 죽자 프리카지노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로 27일 만에 마쳐버렸고, 인수대비가 아직 빈소에 있는데도 풍악을 그치지 않았다.


‘이일역월제’란 유교식 3년 상 달(月)을 날(日)로 바꾸어 27일 만에 끝나는 단상제(短喪制)다. 원래 이 제도는 왕이 승하한 후 정치적 동요를 줄이고, 왕권의 안정과 정치적 공백을 최소화하여 왕권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조처로 중국에서 시행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이 제도를 패륜이라 여기고 있었다. 이 일로 프리카지노에게는 폭군 외에 패륜이라는 오명 하나가 덧붙여졌다.


표면적으로 갑자사화는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된 상태에서 프리카지노군의 생모 윤 씨 복위(復位) 문제로 훈구파까지 제거한 사건이다.


이후 프리카지노군은 생모 윤 씨를 왕비로 복원하려 했으나 이를 반대하고 나선 권달수는 처형되었고 이행은 귀양 보냈다.


또 윤 씨의 죽음을 찬성하였거나 관여하였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되었고,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하였으며, 이들의 가족들도 죄를 피할 수 없었다.


왕의 남자 한 장면


1504(프리카지노군 10)년 3월부터 10월까지 약 7개월에 걸쳐 벌어진 갑자사화의 희생자와 규모, 그리고 형벌의 잔인함은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갑자사화로 인해 성종 때부터 양성된 많은 선비가 수난당하자 학계는 정지상태에 놓였으며, 뒤이어 한글 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국문학 발달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프리카지노군은 재위 12년 동안 무오사화, 갑자사화를 일으켜 명망 있는 수많은 선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경연과 대제학을 폐하였으며, 성균관 역시 폐하여 오락장소로 만들었다.


프리카지노군이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며 국정을 도외시하는 동안 폭정으로 백성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이에 전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과 지중추부사 박원종은 밀약하고 이조판서 유순정의 힘을 빌어 프리카지노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내세워 반정을 꾀하기에 이른다.


인수대비가 죽자 프리카지노은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었다. 프리카지노은 마침내 어머니를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하고, 묘(墓)도 높여 회릉(懷陵)으로 격상시켰다.


폐비 윤 씨의 회묘(경기도 고양시)


아마도 죽은 폐비 윤 씨에게는 이보다 더 기쁜 날은 없었을 것이다. 아들이 통쾌하게 복수를 해주었고, 제헌왕후로 추존되었으며, 묘까지 회릉으로 격상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폐비 윤 씨가 제헌왕후로 불린 것은 불과 2년여에 불과했다. 결국 아들 연산의 폐위로 폐비는 다시 강등되었고, 격상되어 회릉으로 불렸던 묘도 회묘로 되돌아갔다.


다만 프리카지노이 정성 들여 가꾼 탓에 왕릉 못지않게 잘 꾸며진 회묘의 석물은 웅장하기 이를 데 없고 석호와 석양도 뛰어난 모습을 갖추었으니그것만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권력을 손에 넣고 그야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뭐든 생각나는 대로, 닥치는 대로 하던 연산은 중종반정이 일어나 폐위되기 전인 2년여 동안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엽기에 가까운 만행을 저질렀다.


프리카지노은 장의문 밖에 사는 사람을 홍제원 밖으로 내보내게 하고는 길을 넓히고 성을 쌓았다. 공사는 높은 곳은 깎고 낮은 곳은 메워 큰길을 이리저리 내었으며 프리카지노은 그 길을 밤낮으로 시녀들과 오가며 놀았다.


그중에서 가장 큰 것은 삼각산 밑 장의사동에 있는 탕춘정(蕩春亭)으로 시냇물이 졸졸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지었는데 그 단청이 현란하기 이를 데 없고 규모 또한 웅장하였다.


또 창덕궁 후원에는 서총대(瑞葱臺)를 지었는데, 높이가 1백여 척에 1천여 명이 앉을 수 있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끊임없이 재목을 모아 건물을 짓고 길을 내는데 급급하여 공사를 감독하는 벼슬아치들은 인부들을 독촉하고 가혹하게 다루었다. 조금만 일정을 맞추지 못하면 심한 매질은 물론 물건을 징수하였으므로 백성들의 원망과 신음이 그치지 않았다.


공사를 하다가 주리고 헐벗고 병들어서 죽는 자도 속출하였다. 그래서 마을과 거리에 시체가 쌓여 악취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간혹 숨이 붙어 있는 자들이 있어도 근방에 사는 사람들이 시체를 버려두었다는 죄를 입을까 겁내어 서로 끌어다 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전한다.


수탈 역시 본격화되었다. 한 해의 세금도 버거워하던 백성들에게 2~3년 치의 세금을 미리 거두어들이는가하면 노비와 전답에도 각종 명목을 붙여 세금을 부과했다. 또 이런 처사에 불만이 표출되자 금표에 불만인 자와 금표 안에 함부로 들어오는 자는 참형에 처하고 효수하게 하는 한편 삼족을 멸한다고 공표하였다.


말로 해서 통하지 않으면 우격다짐을 쓰는 프리카지노의 주특기는 금표에 있어서도 예외가 없었다. 금표 안을 통행할 수 있는 패 1백 개를 만들어 엄격히 관리하였고 죄를 짓고 금표 너머로 달아나면 잡을 수 없었으니, 금표 안은 일종의 치외법권 지역이었다.


금표는 점점 그 범위가 넓혀져 한양을 벗어나 양주, 파주, 고양 등에 이르기까지 사방 100리에 이르렀고, 나중에는 경기도 땅이 반 넘게 금표 안에 들어가기도 했다.


나중에는 연산이 어머니처럼 따랐던 큰어머니 월산대군 부인 박 씨를 겁탈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나 연산이 박 씨를 겁탈했다고 할 즈음 박 씨는 중풍으로 누워 있었으며,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다는 설도 있다.


중종반정


중종반정의 주역은 박원종과 성희안인데 바로 박원종이 박 씨 부인의 동생이기 때문에 이런 소문이 퍼졌다는 설도 있다.


본래 반정(反正)은 정통이나 정도를 다시 회복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반정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구실이 있어야만 하는데, 바로 그 구실을 만들기 위해 박원종의 누이를 희생시켰다는 견해다.


프리카지노군이 박 씨를 겁탈하자 박원종이 프리카지노군에게 깊은 원한을 품게 되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연산이 경기도 관찰사였던 박원종의 벼슬을 거두어버렸으며, 이에 박원종이 복수를 하기 위해 반정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반정의 또 다른 중심인물은 성종이 총애했던 문신 성희안이었다. 연산 때 이조참판이었던 성희안은 연산이 망원정에서 연회를 즐기는 것을 보다 못해 비판하는 시를 지어 올렸다가 종 9품인 부사용이라는 미관말직으로 좌천되었다,


프리카지노을 체포하러 온 신하들(드라마 장면)


이렇게 박원종, 성희안 두 사람은 각각 프리카지노에게 반감을 품을 만한 명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실록은 왕이 죽은 이후에 쓰이기에 반정으로 쫓겨난 왕의 나쁜 점은 더욱더 부각하기 마련이라는 현실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1506(병인丙寅, 프리카지노 12)년 8월 17일, 거제도에 유배 중인 이장곤이 도망쳤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장곤은 1495(프리카지노군 1)년 사마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이어 1502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한 인물로 학문과 무예를 겸비한 자였는데, 갑사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귀양을 가 있었다.


프리카지노은 항상 귀양을 간 사람들이 원한 때문에 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모두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에 유배시켜 힘든 일을 시키고, 아침저녁으로 감시하였다.


연산은 그중에서도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던 이장곤을 가장 마음에 걸려 했다. 그래서 곧 죽이려고 하던 중이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장곤이 미리 알고 도망을 치고 만 것이다.


프리카지노은 무언가 가슴속에서 툭 떨어져 나가는 듯한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만약 무용과 지략을 겸비한 이장곤이 나서서 유배된 다른 이들을 선동하고, 각지로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킨다면 어떻게 될까? 프리카지노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장곤의 집을 즉시 폐쇄하고 그 부모, 동생과 족친을 포로로 잡아두며, 의금부 낭원 중 순직 근신한 자를 보내어 그 형 이장길과 함께 잡되, 만약 잡거든 손바닥을 꿰어 수갑을 채우고 칼을 씌워 오라.”


연산이 아무리 패악하다 하나 그 역시 사람이었다.


‘조선은 왕의 나라이고 조선의 백성, 조선 땅 풀 한 포기까지 모두 다 내 것인데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듯 독재와 폭정을 합리화하였지만, 밤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식은땀을 흘리며 깜짝 놀라서 깨는 날도 많았다.


연산은 누구든지 이장곤을 잡아오기만 한다면 비록 그가 죄인일지라도 방면할 것이라는 전교를 내리기에 이른다. 그러나 멀리 함경도로 도망간 이장곤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백성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장곤이 도망쳤으니 곧 무리들을 모아 병사를 일으킬 것’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로부터 다시 며칠 뒤인 8월 23일, 프리카지노은 후원에서 궁녀들과 놀다가 마치 불의의 변고를 예감하듯이 탄식하였다.


영화 한 장면


“인생은 초로와 같아서 만날 때가 많지 않도다.”


초금(草笒-풀이파리)을 두어 곡조 부르고 읊기를 마친 연산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여러 흥청들은 서로 눈짓을 하며 연산을 비웃었으나 전비와 장녹수는 슬피 흐느꼈다. 왕은 두 여인의 등을 어루만지며 마치 앞날을 예견하는 듯 말했다.


“지금은 태평한 지 오래이니 어찌 불의의 변이 있겠느냐마는, 만약 변고가 있게 되면 너희들은 반드시 화를 면하지 못하리라.”


프리카지노은 그날도 어김없이 두 여인에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프리카지노의 최후


1506년 9월 1일 저녁, 훈련원에는 이조참판을 지낸 성희안, 중추부지사 박원종, 인망이 높던 이조판서 유순정, 프리카지노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군자부정 신윤무(申允武), 전 수원 부사 장정(張珽), 군기시 첨정 박영문, 사복시 첨정 홍경주 등이 무사를 규합하여 모여들었다.


성희안과 박원종은 그동안 관계자들을 만나 포섭하였고, 때마침 전라도에 유배된 유빈 등도 거사를 결의하고 격문을 보내왔으며, 각 지방에서도 거병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문이 흘러들어왔다. 반정군은 프리카지노이 장단 석벽에 유람하는 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계획을 꾸몄다.


그리고 마침내 9월 2일, 그들은 임사홍, 신수근과 그 아우 신수영 및 임사영 등 연산의 측근을 죽인 다음 궁궐을 에워싸고 옥에 갇혀 있던 자들을 풀어 종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창덕궁의 돈화문을 통해 프리카지노군의 처소를 급습하였다.


반정군의 규모에 놀란 궁궐 수비군은 거의가 담을 넘어 궁궐을 빠져나갔고, 궁궐 안에 입직하던 여러 장수와 군사들도 변을 듣고 수챗구멍으로 도망쳤다.


궁궐 수비대가 도망친 궁궐 안은 텅 비었고 프리카지노을 지키는 신하는 아무도 없었다.승지 윤장, 조계형, 이우가 변을 듣고 이 사실을 알리자 프리카지노은 놀라 뛰어나와 승지의 손을 잡고 턱이 떨려 말을 하지 못하였다.


“예로부터 폐립(廢立-임금을 폐위시키고 새 임금을 맞아 세우는 일)할 때 죄를 추궁한 일이 없었던 경우는 고려시대 창왕과 우왕뿐이었다. 지금은 잘 처리해야 한다. 임금에게 사람을 보내 ‘인심이 모두 진성대군에게 돌아갔으니 싸움을 피하고 옥새를 내놓으라’ 하면 이를 좇을 것이다.”


의논을 마친 후 박원종 등은 내시를 시켜 장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창덕궁으로 가서 옥새를 받아오라 일렀다.

“내 죄가 중대하여 이렇게 될 줄 알았다. 좋을 대로 하라.”


프리카지노은 이미 체념한 듯 별로 망설이지 않고 옥새를 내다가 상서원 관원에게 주었다.


옥새를 건네받은 박원종 등은 곧이어 경복궁으로 가서 대비 정현왕후에게 진성대군을 추대할 것을 청했다. 진성대군은 자격이 없다고 몇 번이나 고사하였으나, 결국 경복궁 근정전에서 즉위식을 올렸다.


원래 왕이 즉위할 때는 곤룡포와 면류관을 써야 하는데, 워낙 급하게 하는 즉위식이라 익선관을 쓰고 백관의 하례를 받아야만 했다.


유배 가는 프리카지노군


조선 제11대 왕위에 오른 중종은 곧 프리카지노군의 총애를 받아 온갖 음행과 파행을 일삼던 전비와 장녹수, 백견 등을 군기시 앞에서 목을 베었고, 연산은 폐위시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를 보냈다. 프리카지노이 교동의 가시울타리 안에 갇히자 백성들은 너도나도 노래하였다.


충성이란 사모요

거동은 곧 교동일세

일만 흥청 어디 두고

석양 하늘에 뉘를 좇아가는고

두어라 예 또한 가시의 집이니

날 새우기엔 무방하고 또 조용하지요


*사모(紗帽)와 사모(詐謀), 거동(擧動)과 교동은 음이 서로 가깝고, 방언에 각시[婦]와 가시[荊棘]는 말이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뜻을 빌어 노래한 것이다.


왕권의 절대화를 지향했던 프리카지노의 최후는 백성들의 조롱거리가 될 정도로 비참하였다. <프리카지노군일기 총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소시少時, 학문을 좋아하지 않아서 동궁東宮에 딸린 벼슬아치로서 공부하기를 권계勸戒하는 이가 있으매,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즉위하여서는, 궁 안에서의 행실이 흔히 좋지 못했으나, 외정外庭에서는 오히려 몰랐다. 만년에는, 주색에 빠지고 도리에 어긋나며, 포학한 정치를 극도로 하여, 대신, 대간, 시종을 거의 다 주살誅殺하되 불로 지지고 가슴을 쪼개고 마디마디 끊고 백골을 부수어 바람에 날리는 형벌까지도 있었다. 드디어 폐위하고 교동喬桐에 옮기고 프리카지노군으로 봉하였는데, 두어 달 살다가 병으로 죽으니, 나이 31세이며, 재위 12년이었다.<프리카지노군일기 총서


프리카지노군이 마지막 남긴 말은 부인 신 씨가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신 씨는 워낙 후덕하였으므로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아비 프리카지노도 곧 죽었지만, 아비와 달리 행실이 반듯하여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던 세자 황과 왕자들은 따로 유배되었다가 모두 죽임을 당했다.


프리카지노군은 반정으로 폐위되었으므로 묘호가 없고, 그 실록도 노산군(단종), 광해군처럼 ‘일기’라고 칭하고 있다. 하지만 체제나 내용 면에서는 다른 실록과 별로 다르지 않다. 프리카지노군의 무덤은 현재 도봉구 방학동에 ‘프리카지노군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프리카지노군과 부인 신 씨의 묘, 들어가는 입구




*오늘은 내용이 너무 길어 책 소개와 다른 안내는 생략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 4대 사화 책


-부록-

<무오사화, 갑자사화 요약정리


*무오사화(戊午史禍) - 프리카지노군 4(1498)년

유자광 중심의 훈구파에 의해 김일손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입은 화(禍).


성종실록 편찬 시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은 것을 기회로 이극돈 등이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방한 것이라고 유자광이 왕에게 고(告)해 발단.


김종직 문하(門下)의 많은 사림파(士林派) 선비가 화를 당함


*갑자사화(甲子士禍) 프리카지노군 10(1504)년

생모(生母) 파평윤 씨(성종의 비妃)의 복위 문제로 프리카지노군이 일으킨 사화.


질투가 많았던 파평윤 씨가 폐비 후 사사됨. 이에 훈구파와 사림파 등의 많은 선비들이 관련되었다고 임사홍이 프리카지노군에 고하여 사화 발생.


프리카지노군은 평소 생모 사건에 의혹이 있었으나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자 관련된 선비들을 처형.


당시 대신(大臣)이었던 한명회,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剖棺斬屍)함.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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