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경사가 유투벳이라고
더 힘들었던 기억은 없어요.
아마도 유투벳이라는 이미지를
그리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올라간다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어요.
이게 지나면 나는 더 높은 곳에 있다.
이걸 견디면 나는 더 나은 곳에 있다.
이런 긍정적 목적의식을 지녔다 해서
당시의 불이 꺼지지 않는 지옥과
정신의 피부가 산채로 녹아내리는 고통이
덜했던 기억은 없어요.
그냥 다 죽이고 여길 다 허물고
시대와 세상과 절멸하자 정도의
질 낮은 독기만 그득했었죠.
유투벳 같은 서정적이고
목가적 이미지는
스케치도 없었어요.
그저 지금
듣는 노래가 좋아요.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른)
박보검의 풀버전은 없어서
유투벳 윤종신이
바라던 바다에서 부른 버전을
계속 듣고 있어요.
곡 제목이
아이고 내리막길 우당탕탕이라고
했어도 지금처럼 연속 재생을
멈추지 못했을 거예요.
유투벳의 가사는
결국 만난다는 결론이지만
사라진 웃음
오랜 단절
들리지 않는 대화
...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하죠.
겪어본 사람은 알 거예요.
저걸 끝까지 견디는 관계는 관계가 아니라고
어떤 사이가 아니라고.
사랑 같은 게 아니라고.
웃음과 대화, 연결이 없다면
유투벳이든
미끄럼틀이든
견디는 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한때는
영원을 담보할만한 신뢰를
나누고 싶었을 때도 있겠지만
두 칸의 독방 같은 유투벳
어떤 가치가 있을지
눈과 귀와 입을 가린 채
암흑 같은 기억만 더듬으며
억겁의 시간을 견디는 유투벳
서로에게 그런 짓을 할 권리가
존재해야 하나요.
유투벳 목소리 때문에
이 노래를 계속 듣고 있어요
느리게 걸으며
손등과 뺨에 닿는
어둡고 맑은 바람을 지나며
고요하고 다정한 협박 같은
사실 너무 체념 정서가 진해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게
감지되기도 합니다.
결국 우리는 유투벳의 끝에서
절대 절대로 만나지 못할 거라고.
그걸 너무 잘 알아서
국부마취처럼
잠시 이해한 척이라도 하자고
(안 될 거 알지만 그냥 해피엔딩할 거라고 치자고)
거짓 애원하는 것 같아요.
유투벳을
핑계로 전하는 송가.
김광진의 표현을 빌리면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이제 나는 돌아서겠소”
(편지)
처럼 들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