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City Life : 男2 女2 시트콤
사소한 킬러 15화
차가운 냉면에 편육 반접시 그리고 소주 한 병, 바카라 게임은 혼자 낮술 중입니다.
가을이 온 거죠.
짙어 가는 단풍색, 아침저녁으로 스산한 바람, 옷깃을 여미는 사람들의 잰 발걸음.
“캬아. 술맛 좋다.”
소주잔을 냉큼 비우고 편육을 집어 우물우물, 바카라 게임으로서는 보기 드문 호사를 누리고 있습니다. 이런 호사에 방해꾼이 없을 수 없죠.
보통이라면 바카라 게임 씨가 그 악역을 맡았을 테지만, 오늘은 다릅니다. 가을이니까요. 가을 타는 고독한 남자 옆에는 늘 미인이 나타나거든요.
“이런 데서 만나네요. 바카라 게임 씨.”
흘깃. 바카라 게임은 돌연 찾아온 불청객에 찡그리지도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짓습니다.
박서우였거든요.
“우연은 아닐 테고, 또 사람 붙였나?”
“아뇨, 조안나가 알려주던데요. 지나가다 여기서 청승 떨고 있는 것을 봤다고.”
“청승?”
“청승까지는 아닌 것 같고, 제가 보기에는 고독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네요.”
“쳇, 그냥 점심 먹고 있을 뿐이야. 같이 먹는 건 좋지만 자기 것은 시켜야 해. 이거 2인분처럼 보여도 1인분이야. 여기 주인이 나에게는 특별대우거든.”
박서우는 종업원을 불렀습니다.
“나도 편육 반접에 소주 한 병, 냉면은 됐어요.”
성인 남녀가 가을과 소주를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으니 기묘한 긴장감이 흐르네요.
“이 집 냉면은 별로라고 하는데 먹지 않을 것까지 시켜 놓은 것 보면 사연 있는 것 같아요.”
“맞아. 냉면은 서비스라서. 그래도 소주 마시고 입가심으로 국물 한 숟갈 떠먹기는 꽤 괜찮아. 재벌집 딸 취향은 아니겠지만.”
박서우가 찡그립니다.
“도대체 나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 거예요?”
“필요한 만큼은 알고 있지.”
“그게 얼만큼인데요?”
“돈이 많다는 거.”
“또?”
“돈이 더 많을 수도 있다는 거. 지금 숨겨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이. 많이.”
“또?”
“글쎄, 더 알아야 하나?”
역시 바카라 게임은 돈입니다.
“모르면 됐고요.”
“이건 뭐, 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하나 있기는 한데. 말해도 괜찮으려나?”
“여태 뭐든 다 말해 놓고는..”
박서우는 이제껏 따라만 놓고 마시지 않았던 소주를 꼴깍.
“목적을 위해서는 못 할 게 없는 여자. 소시오패스 기질도 있는 것 같고. 뭐 싫다는 건 아니야. 굳이 말하자면 좋은 쪽이지.”
“좋다니 다행이네요. 그런 의미에서 바카라 게임 사귈래요?”
어지간한 일에는 씹던 편육을 뱉어 내지 않았겠지만 바카라 게임은 입속에 있던 것이 기도로 넘어갔다는 것을 인지했어요.
“크흡. 커걱. 캑캑.”
고도의 훈련을 받은 바카라 게임이지만 기도로 넘어간 음식을 토해내 식도로 되넘기는 스킬만은 성공할 수 없었어요. 오히려 더 큰 부작용이 있었죠.
바로 눈물. 주르륵!
바카라 게임이 숨 막혀 죽을 듯 켁켁 대다가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보고 박서우가 해맑게 웃었어요.
“기대 이상으로 호응해 주니 고맙네요. 그럼 잘 생각해 보시고. 대신 오늘 밥값은 돈 많은 내가 낼게요. 빠이~”
그날은 바카라 게임에게 여러 가지로 굴욕의 날이었죠.
퇴근하던 김동훈 씨가 바카라 게임에게 지체 없이 마트로 달려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누가 감히 바카라 게임에게 명령하겠냐만은, 집주인은 예외죠.
특히 월세를 내지 않고 빌붙어 사는 세입자라면 집주인의 말을 어떻게 거역하겠어요?
“바쁜데 왜 오라 가라 야?”
“백수 주제에.. 하긴 과로사하는 백수도 있다고 하더라. 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하기도 싫고.”
“누가 백수야? 죽여 달라는 인간이 없어서 잠시 휴업 중일뿐.”
“그 치한인가 스토커는 어떻게 됐어? 이왕 죽일 거면 그런 쓰레기들을 우선적으로다가 죽이면 되잖아.”
“그거? 의뢰인이 너무 까다롭게 굴어서 보류 중이야.”
“뭐가 까다로운데?”
“자꾸 아무나 잡지 말고 꼭 그놈만 잡아다 족치라는데..”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대충 아무나 잡아다 패면 그게 해결사냐? 폭력배지?”
“이봐. 동치과. 해결사 일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니야. 이건 복권하고 비슷해. 한번 해서 당첨되겠어? 이놈 저놈 다 해봐야 진범이 잡히는 거지.”
김동훈 씨는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카라 게임식의 저세상 논리가 가능할까요?
치과 대신 뇌전문의 자격증만 있었더라면 당장 바카라 게임의 두개골을 가르고 그 안에 있는 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확인하고픈 충동이 일었습니다.
“시끄럽고, 이 짐이나 들어. 한 집에 살면 집세를 제 때 내든가, 그것도 못하면 집안일이라도 거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소고기는 안 사? 한우 세일하던데. 사람이 말이야 소고기도 좀 먹고살아야지, 어떻게 맨날 치킨으로 단백질을 보충해? 인류는 반성해야 해. 바카라 게임가 닭 하고 무슨 원수 졌나? 왜 맨날 닭만 죽이는지.”
“한우 같은 소리 한다. 아, 두루마리 휴지 안 샀다. 에이, 다시 들어가야 하나? 바카라 게임, 가서 휴지 하나 사와. 난 차 빼고 있을게.”
“나 돈 없는데?”
“뭔 인간이 휴지 하나 살 돈이 없어? 집에 휴지는 혼자 다 쓰는 인간이.”
“내가 뭘?”
아무리 봐도 적응되지 않는 바카라 게임의 뻔뻔한 표정. 김동훈 씨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3초 간의 여유를 가졌습니다. 충동적인 행위가 불러일으킬 불상사를 예방하기 위해.
“당신, 화장실 일 보고 나서 휴지 몇 칸씩 써?”
“6칸?”
“미친, 그거 세 겹이니까 3칸이면 충분하고, 아무리 넓은 구멍이라도 4칸이면 땜질도 할 수 있는 양인데, 6칸? 어째 닳아 없어지는 속도가 유난하더니.”
“치사하게 화장실 휴지 많이 쓴다고 그러냐?”
“치사? 당신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당장 들어가서 휴지를 사 오든가, 그것도 못하면 훔쳐라도 와!”
실수였습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바카라 게임 씨는 그런 말을 하면 안 되는 것이었죠.
김동훈 씨의 서늘한 기세에 터벅터벅 마트로 돌아 들어가던 바카라 게임이 어느새 두루마리 휴지 한 박스를 가슴에 안고 뛰어 오는 것입니다.
“뭐야? 정말 훔쳤어?”
“사람을 뭘로 보고. 난 강탈은 해도 훔치지는 않아!”
“자랑이다.”
그래도 궁금합니다. 시간 상 마트에 들어가서 사 왔을 리는 없고, 뭘까요?
“저기 가는데 어떤 모자란 인간이 이걸 차에 안 싣고 그냥 가더라. 큭큭. 이런 걸 전문용어로 득템이라고 한다며?”
“그걸 가져왔어? 다시 찾으러 오면 어쩌려고?”
“안 와. 안 와. 차가 마세라티야. 마세라티 타는 인간이 고작 두루마리 휴지 놓고 갔다고 빽해서 오겠어? 아무 문제없어. 어서 집에 가.”
그러면서도 바카라 게임은 주변을 둘러보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휴지주인이 다시 돌아오기 전에 출발하자는 것이었죠.
김동훈 씨는 뭔가 찜찜했지만 그냥 차에 올랐습니다. 혹시라도 문제 생기면 바카라 게임의 잘못으로 미루면 되니까요.
실제 훔친 것도 바카라 게임이고. 그러나 그것이 김동훈 씨의 두 번째 실수였습니다.
게다가 한 번이면 몰라도 두 번의 실수를 용납해 줄 만큼 이 사회는 녹록지 않습니다.
집에 돌아온 지 2시간 만에 오피스텔의 초인종 소리가 울렸습니다. 배달을 시킨 것도 아니고, 택배 올 것도 없는데 그 시간에 초인종이 울리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니었죠.
아니다. 조안나가 왔다면 좋은 일일 수도.. 그러나 조안나가 아니었습니다. 정복을 입은 경찰이었습니다.
“59다 77◯◯ 차주 맞으시죠?”
“그런데요? 무슨 일로…?”
“오늘 ✩✩마트 주차장에서 두루마리 휴지 가져가셨죠? 점유물이탈횡령죄로 고소당하셨습니다. 지금 같이 서에 가주시죠.”
난리 났습니다. 경찰서라고는 유치원 견학으로도 가 본 적 없는 바카라 게임 씨가 졸지에 정복 입은 경찰에게 연행되는 신세라니요.
“그건 제가 아니고, 친구, 아니 친구는 절대 아니고, 동거인이..”
“동거요?”
“아니, 그런 동거가 아니라. 홈셰어링 있잖아요. 아니 그것도 아니다. 세입자. 바카라 게임 집 세입자가 하지 마라고 했는데 휴지를 주워 와서는..”
“그게 누군데요?”
“지금 안에 있어요. 바카라 게임! 어서 나와봐. 바카라 게임!”
김동훈 씨는 다급하게 바카라 게임을 찾았어요. 그런데 바카라 게임은? 당연히 없죠. 달아났어요. 그런데 어떻게 없죠?
오피스텔 11층인데 제아무리 날고 기는 바카라 게임이라도 뛰어내릴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김동훈 씨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자 안으로 들어가 바카라 게임을 찾았지만 그는 정말 깜쪽같이 사라졌어요. 화장실에도 없고요.
바카라 게임 씨를 따라 들어온 경찰관 2명은 바카라 게임 씨를 의심했어요.
“아무도 없는 것 같은데요. 일단 같이 서에 가시죠.”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도 같이 있었는데. 제가 왜 경찰서를. 훔친 건 그놈인데. 이 인간이 어디 갔지?”
김동훈 씨는 화장실 변기 속까지 들여다보며 바카라 게임을 찾았어요. (거긴 왜 들여다봐?)
허둥지둥하는 바카라 게임 씨를 보다 못한 경찰관들은 저항하는 바카라 게임 씨의 양쪽 팔을 하나씩 잡고 경찰서로 연행했습니다. 겨우 두루마리 휴지 때문에.
그 시간, 바카라 게임은 오피스텔 창틀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고도의 인내력을 발휘하며 경찰을 피한 것이죠.
그리고 무사히(?) 바카라 게임 씨가끌려나가는 것을 확인하고 기어올라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휴우, 무서운 나라네. 휴지 때문에 사람을 잡아가다니.. 북한 보다 더 해.”
경찰서에 끌려온 바카라 게임 씨는 ✩✩마트 주차장 cctv를 돌려보며 성질을 내고 있었어요.
“이거 봐요! 나 아니라고 했죠? 내가 아니라 이 인간이 휴지를 들고 왔잖아요! 난 이제 가면 되죠?”
그러나 경찰서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큰 소리를 치면 안 되는 거였어요. 경찰도 성질이 있거든요.
잠자코 바카라 게임 씨가 하는 것을 지켜보던 형사반장 같은 사람이 곁에 다가오더니 cctv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어요.
“그럼 여기 이 사람이 본인이라는 건 인정하는 거죠?”
“네, 이 인간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이 나예요.”
“화면으로 보니 뭔가 얘기하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말했습니까?”
“안되니까 다시 돌려놓고 오라고 했죠.”
“남의 물건을 무단으로 횡령한 것을 인지했다는 말이군요.”
“당연하죠.”
“그런데 왜 휴지를 차에 싣게 허락했습니까?”
“그건.. 그게 왜요? 그게 내 잘못인가요? 저 인간이 마음대로 싣고 온 것인데..”
“범죄행위를 방관했으니 공범죄에 해당합니다. 이순경, 이분 진술서 받고 여기 이 사람도 수배해.”
세상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나요? 옆사람이 주워 온 휴지를 차에 실었다는 이유로 점유물이탈횡령죄 공범이라니.. 바카라 게임 씨는 격렬하게 이 사회의 부조리한 시스템에 저항했습니다.
이 사회의 엘리트로서, 개원한 치과전문의로서 나름 지역사회에 헌신한 엘리트로서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였죠.
그러나 그 대가는 처참했습니다. 유치장에 갇힌 거죠.
원래 경찰서에서 소동을 부리면 자기만 손해입니다. 주변에 경찰 쫘악 깔렸는데 그깟 진상 좀 친다고 풀어주나요?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였습니다.
진범이 잡혀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범이 아닌 것을 증명하고 풀려나거나, 변호사를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저기요. 여기 식사 안 시켜주나요? 라면이나 짜장면 시켜준다고 하던데.”
김동훈 씨는 유치장 철창을 양손으로 붙잡고 사정했어요. 마트 다녀와서 바카라 게임과 입씨름하느라 저녁도 못 챙겨 먹었거든요.
“저 양반이 언제 때 얘기를.. 배고프면 배달앱으로 시켜 드시든가.”
집 나온 북극곰처럼 잡혀서 철창을 붙잡고 서있는 바카라 게임 씨를 모두 비웃었어요.
바카라 게임 씨는 서러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억울하게 잡혀온 것도 환장하겠는데 배까지 고프니, 이러려고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치과의사가 됐는지 자괴감이 밀려온 거죠.
16화에 깨속~ 총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