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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울건너 Mar 27. 2025

가을밤

“세에상에, 국민학교 졸업하고 바로니까 몇 살이냐, 내가 열네 살이여. 그땐 엄마가 왜 그렇게 아팠는지, 입은 또 어찌나 까다롭던지. 밥을 해다 드리면 안 드시고 밥이 되네 지네 어찌나 혼을 냈나 몰러. 부엌을 못 떠나는 열네 살 딸이 불쌍하지두 않았나?”


구 남매의 맏이인, 나보다는 스무 살이 많은 바카라를 여형제들은 왕바카라라 부르고 조카들은 왕이모 왕고모라 부른다.

맏이의 희생은 이렇게 당연한 것으로 치부됐다.



외할아버지는 옆 동네에서 들어와 옹기공장을 세우셨다.

기근을 피해 올라오던 타지방 사람들이 맘씨 좋은 부잣집이라는 소문을 듣고 외갓집을 찾아들면 외조부모님은 그들을 사랑채에 들여 식사대접을 해서 보내기도 하고, 더러는 옹기 만드는 기술을 가르쳐 옹기 장인이 되게도 하셨다.

미혼의 남자는 옹기 기술을 가르쳐 혼인할 나이가 되면 아가씨와 영세시켜 부부의 연을 맺어주었다. 한 쌍 한 쌍 그 동네로 살림을 내주며 훗날 숲을 이룰 나무 씨앗을 심듯 천주교 교우 촌을 만들어 갔다.



약현 성당 신부님 밑에서 복사로 있던 아버지는 부자였던 외갓집 맏딸인 어머니와 결혼해 데릴사위로 들어가 외갓집 회계를 맡았다.


몇 년 후 부모님은 서울로 올라가 남산 아래 인현동에 둥지를 틀었다.

그곳에서 왕바카라를 낳았다.


남산 아래 그 집은 무허가였다. 그 주위 여러 채의 집이 무허가여서 그곳 사람들이 가끔 모여 정부에 허가받는 문제를 의논하곤 했단다.

부모님은 외할아버지 옹기 공장에서 옹기를 받아다 인현시장에서 옹기장사를 시작했다. 부모님은 일찍부터 맞벌이 부부였던 셈이다.

몇 년 후 큰오빠가 태어났다.

왕 바카라가 여덟 살이 되었다.


부모님은 아버지가 결혼 전 복사로 계시던 중림동 약현 성당 부속학교인 국민학교에 바카라를 입학시켰다.


그곳 초등학교를 몇 달 다니다가 6,25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부모님과 바카라 오빠는 아버지의 군 징집을 피해 걸어서 시골 외갓집 동네로 다시 들어갔다.

시골 국민학교로 전학 온 바카라는 학교에서 공부를 제일 잘했다. 그곳도 가톨릭 부속학교여서 성당 설립자 신부님에게 신앙교육을 철저히 받았다.



전쟁이 끝나고 오빠들이 계속 태어났다.

부모님은 가까운 장터에 나가 옹기장사를 하셨고 동생들을 건사해야 하는 바카라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왜 경기여중 이화여중이라 안 하고 수도여중이라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가 바카라에게 내년이면 서울로 올라갈 테니 그때 수도여중에 보내주마 하셨다. 바카라와 동갑이고 같은 반이었던, 머리가 나빠 공부를 못했던 이모는 서울로 유학해 P여중에 입학했을 때였다.

아버지는 그깟 P중학교는 시시하다며 바카라를 달랬다.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부모님은 서울로 올라갈 기미가 없었다.


부모님은 동생들 젖만 떼면 맏딸인 바카라에게 동생들을 맡기고 장터로 나가셨다.

바카라는 같은 고장에 있는 중학교에도 진학할 상황이 아니었다.

작은 바카라도 나도 동생도 거기서 태어나 그곳이 고향이 되었다.



바카라는 그때 전통방식대로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세례 받는 동생들의 세례명을 직접 지어주었다. 쌍둥이 오빠는 베드로 바오로, 사순절에 태어난 작은 바카라는 베로니카, 세레나 마리아...


나는 개울에서 빨래하는 바카라 곁에서 물장난을 하고 놀았다.

봄날엔 개울 건너로 분홍 물감을 뿌려놓은 듯 진달래가 피어있는 산의 풍광이 아름다웠다.


옆집 아주머니가 말한 적이 있다. 바카라가 동생들 키우느라 우물가에서 물을 길어 머리에 하도 이고 다녀서 바카라 키가 크지 못했다고.




바카라가 십 대 후반이 되었다. 바카라의 중학교 진학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바카라는 동생들을 씻기고 먹이고 입히며 다짐했단다. 나중에 자기가 결혼하면 자식은 둘만 낳겠다고, 지긋지긋하다고. 그리고 자식만큼은 배움의 한이 없도록 끝까지 가르칠 거라고.


바카라가 어머니에게 읍내 양장 학원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돈 없어 못 보내준다고 했다.

어머니 성질 못지않은 바카라는 마당에 있는 지하수 펌프의 긴 손잡이를 세게 눌러대며 (어머니 표현으로는 팡팡 눌러대며) 중학교도 못 갔는데 양장학원까지도 못 보내 주냐며 마루에 있는 어머니를 향해 팡팡 소리 질렀다.




바카라가 스물세 살이 되었다.

외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후 외삼촌이 공장을 운영할 능력이 되질 않았다. 외할머니는 그 공장을 타지 사람에게 넘겼고 외갓집이 다른 고장으로 이사를 갔다.

타지에서 들어온 옹기공장 사장의 아들과 바카라가 연애를 하게 되었다.

연애편지 중간 심부름 담당은 바로 아래 큰오빠였다. 전쟁 속에서 외갓집으로 피난 올 때 다섯 살이었던, 피난 내려오는 중 잃어버려 부모님과 바카라의 혼을 다 빼게 했던.


바카라와 형부의 인연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바카라는 같은 동네에 있던 시집으로 들어가 살아서 친정집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바카라가 남매를 낳았고 옹기 공장에서 모든 일을 총괄하던 형부와 바카라 가족 이 다시 우리 집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다.

아이들끼리만 몇 년 지내던 우리 집에 든든한 보호자가 수와 세를 불려 들어온 것이다. 우리 집안의 적막의 공포가 사라졌다.



깔끔한 바카라는 방과 마루를 늘 쓸고 닦았다. 부엌과 장독, 마당을 부지런히 오가며 형부와 조카 우리 형제들의 식사를 챙겼다.

바카라는 자주 한숨 쉬며 말했다. 반찬이 없어 오늘은 맨 밥(반찬 없이 먹는 밥) 먹어야겠다고.



집에 들고 나며 하는 쌍둥이오빠들의 방황을 보면서 깜깜한 방에 혼자 누워 무슨 생각인가를 깊이 하며 조용히 눈물 흘리던 바카라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늘 윗마을 연인 집에 가서 지내다가 내려오는 오빠에게 공부 좀 하라고 소리쳐 머리 큰 그 오빠가 바카라에게 대드는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오빠가 고등학생일 때반 친구들을 자주 데리고 집에 왔.어려운 살림에 장정들한테 밥을 해서 먹여야 하는 바카라는 오빠에게 화를 내기도 했다.



동생의 초등학교 예비 소집일이 다가오자 바카라는 서울에서 내려온 바카라 친구의 딸이 입고 있는 밍크코트를 동생에게 입혀가고 싶어 친구 딸을 자꾸 달래며 빌려달라고 했다. 싫다고 하는 친구 딸을 간신히 달래서 빌려 동생에게 입혀 동생을 데리고 학교에 갔다가 오기도 했다.



지하수 펌프 손잡이를 팡팡 눌러 지하수를 올리면서어머니에게 팡팡 대들어 허락을 받아내 양장학원을 다녔는지는 모르겠는데 바카라는 건넌방 재봉틀에 앉아 우리에게 운동회 때 단체로 입을 파란 반바지와 흰 악기 복을 직접 만들어주기도 했다.


스피커에서 이미자가 부르는 ‘섬마을 선생님’이 나오자 바카라는 돌리던 재봉틀 일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듣고 있다가 노래가 끝나자 급히 연필과 종이를 찾아 2절 가사를 다 적었다. 1절은 늘 불러 알지만 2절 가사는 모르겠더라고 했다. 나는 바카라의 총명함에 놀랐다.


작은 바카라가 국민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님은 장사 터를 옮긴 서울로 먼저 올라가셨고 바카라 시부모님이 빚으로 돌리던 옹기공장이 망해 문을 닫았다.

형부와 바카라도 남매를 데리고 부모님을 따라 서울로 올라갔다.

고향집 살림은 작은바카라가 맡았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 있었다.



봄이면 지들끼리만 신나게 피어 까불며 분홍물감을 뿌려대던 개울 건너 민둥산 진달래꽃들은 사위어갔다. 박정희 대통령의 산림녹화 운동으로 거기에 큰 소나무 밤나무 등을 심어 입산금지 구역으로 지정해 일구자 큰 나무뿌리들에게 진달래 뿌리들이 치였으므로.




서울 대형 옹기 전에 천막을 치고 합판으로 세 칸으로 나누어 막고 한 칸엔 부모님이, 한 칸엔 바카라와 형부, 한 칸엔 같은 고향에 살던 두 여인이 기거했다. 그 여인들 역시 부모님을 따라 옹기행상 하려고 올라온 여인들이었다.


두 여인도 바카라 네도 부모님 가게에서 옹기를 도매로 받아 리어카에 싣고 주변 동네에 다니며 소매 행상을 시작했다.

서울에서 바카라가 편지를 보내왔다. 나는 그녀의 필력에 놀랐다.

보고 싶은 동생들에 대한 걱정과 고향의 봄날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아 보냈던 그녀의 편지 내용은 아름답고 눈물겨웠다.

나는 절절이 감동하며 바카라와 두 조카가 보고 싶어 훌쩍였다.


내가 중학교 때 고향에 남아있던 우리 형제들도 모두 서울로 올라왔다.


형부와 바카라는 열심히 일해 돈을 모아갔다.

리어카로 부모님 가게 근처에 같은 동네를 돌다 보니 두 여인 팀과 바카라네와의 다툼이 일기도 했다. 한 소비자가 어제 만난 바카라 네와 오늘 만난 두 여인팀과의 가격을 비교하며 싸움을 붙이기도 했으므로.


사업파트너는 경쟁관계이기도 하다. 파트너가 부모 자식 간이면 벌어지는 싸움에 민망함은 더 크다.


부모님은 바카라네한테 넘겨주는 도매가격을 많이 올렸다.

바카라는 “차라리 우리가 남이었으면 차라리 남이었으면 좋겠다구요!” 어머니에게 대들었고 형부는 장인 장모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그들의 칸막이 방에서 머리를 기둥에 박으며 화를 삭이기도 했다. 세게 박아 천막을 받친 기둥이 움직이며 천막이 흔들거렸다.

바카라 네는 올려준 도매금만큼 밖에서 파는 소매가격을 그만큼 더 올려 더 억척스레 장사하며 착실히 돈을 모아갔다.

부모님은 두 팀의 소매상을 두고 물건을 넘겨 이익을 남기고, 옹기전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앉아서 물건을 팔며 수입은 많았으나 자식이 많아 돈을 모을 새가 없었다.


돈을 모아놓으면 살림집에서 따로 살고 있는 자식들이 부모님 가게로 가서 나 참고서 값, 나 반비, 나 체육복 사야 되는데.. 손을 내밀었다.

하루는 아버지가 한 손에 많은 돈을 잡고 세다가 자식들이 내미는 여러 손에 성질이 나서 꽥 소리 지르며 천막 천장으로 돈을 확 뿌려 버렸다..

파란색의 많은 지폐가 천막 속 허공을 날았었다.

부모님이 바카라네한테 도매금을 터무니없이 많이 올린 데는 인간 본연의 질투심도 작용한 것 같다.


바카라는 내 중학교 수학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나는 바카라에게 또 놀라며 배웠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땐 형부가 교복을 해주셨다.




몇 년 후 바카라 네는 가게 근처에 방을 얻어 나갔다.

일확천금을 바라고 하는 주식이나 지금의 코인이 아닌, 육체로만 벌어 차곡차곡 모으는 돈이어서 돈이 모이는 시간은 조금 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부서지지 않고 단단했다.


몇 년 후 작은 주택을 샀다.


또 몇 년 후 그 집을 팔아 뚝섬에 꽤 넓은 마당을 가운데 두고 방과 부엌이 붙어 양쪽으로 나란히 여러 개가 들어있는 허름한 집을 샀다. 바카라네답게 실속 있는 결정이었다.

안채는 바카라네 가족이 쓰면서 나란히 있는 여러 개의 방은 월세를 놓았고 울타리가 조금 있는 대문 입구에 옹기전을 열었다. 넓은 집과 자신의 가게까지 갖게 된 것이다.

형부는 복덕방도 겸해서 하셨다.


우리는 그 집을 달동네라 불렀다.


월세 들어 살고 있는 여덟 가구는 다 어려웠다.


형부의 도움을 받으며 사시던 마당 끝 방 할머니가 그곳에서 돌아가셨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사시던 방의 옆방 부부는 생활고로 매일 부부싸움을 했다. 여자가 매일 짐을 싸서 나갔다가 매일 돌아오기도 했다.


그들 부부의 옆집은 도로 쪽으로 문을 터서 모녀가 호떡장사를 했다. 몇 년 후 그 딸이 결혼을 했고 몇 년 후 그 딸의 남편이 여름 장마 때물가에 고기 잡으러 갔다가 익사했다.



형부는 돈 되는 금속이나 병 등을 알뜰히 모아 두었다가 팔아 그 돈어려운 이들을 돕는 성당 단체에 기부했다. 여러 해를 그렇게 하셨다.





몇 년 후 형부는 그 집을 부수고 그곳에 상가건물을 지었다. 바카라의 아들이 군에 있을 때였고 딸이 대학에 입학한 해였다.

바카라는 상가건물의 안주인이 되었다. 바카라 나이 55세였다.



바카라는 신설동에 있는 여학생 학원을 다니며 검정고시 준비했다.

필기를 많이 해 오른쪽 어깨에 석회가 굳어 병원 치료를 받으며 공부했다.

검정고시 날을 앞두고 필요한 졸업증명서를 떼러 출신 국민학교에 형부가 내려갔다.

형부는 전교 일등이었던 바카라의 성적을 확인했다.

바카라는 고입 대입 검정고시에 무난히 통과했고 집에서 가까운 초급대학에 합격했다. 그러나 바카라는 공부 이제 그만하겠다고 했다. 바카라 공부로 형부의 불편이 길어져서 안 되겠다고.

바카라는 몇 년 소홀했던 형부의 식사를 다시 잘 챙기고 여유 있는 시간을 보냈다.


남매가 대학원을 졸업하자 바카라가 말하며 웃었다.

자식을 잘 가르치겠다 맘먹고 남매를 최고학부까지 가르쳤는데 이젠 유학까지 보내는 세상이 돼있다고.

남매는 유학은 가지 않고 결혼했다.




형부가 심장마비로 떠나신 지도 여러 해가 되었다.


어머니가 자리 보존을 시작하셨다.

바카라가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어머니가 집에 누워 계실 땐 형제들이 돌아가며 집에서 어머니 간병하는 논의를 주관했다.

어머니와 마음 상해 어머니를 안 보고 있던 한 올케바카라와 어머니와의 화해를 주관했고 화해 후 그 올케바카라도 자발적으로 간병 당번에 참여했다.


어머니가 요양원에 계실 때는 일주일에 한 번 꼭 어머니를 찾아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입관 예절 때 어머니와의 불화 후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화해 후 간병에 합류했던 올케바카라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며 울었다.

장례사가 관 뚜껑을 닫지 못하고 있었다.


가족들도 올케바카라의 울음이 그치길 말없이 기다렸다. 입관실의 적막은 깊었고 그만큼 바카라의 울음소리는 크게 울렸다. 올케바카라의 울음은 울었다는 표현으론 부족했다. 어머니와의 오랜 애증의 한을 토해내더라는 표현이 맞겠다.


올케바카라의 큰 울음이 계속되자 왕바카라가 올케바카라를 돌아보며 한 마디하고 다시 몸을 바로 돌렸다.

“가는 사람 발길은 잡지 말아야 할 거 아니여!”





몇 년 전 중림동에 있는 약현 성당을 처음 가보았다.


바카라가 전쟁으로 몇 개월만 다녔다던 가명국민학교는 없어졌고 가명 유치원이 있었다.


굽어있는 언덕길을 조금 올라가니 성당이 있었다. 빨간 벽돌로 고풍스러웠다.

성당 문을 살그머니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느 신랑신부가 혼배미사를 드리고 있었다.

그 옛날 어머니를 만나기 전, 미사 드리는 신부님 곁에서 미사에 함께 했을 아버지를 생각하며 제대를 바라보았다.

살며시 문을 닫고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가명 국민학교는 지금 이 유치원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초등학교가 자리했었을 유치원 주위를 둘러보고 걸으며 유치원 벽을 쓸어 보았다.

부모님이 전쟁 때 비워놓고 시골로 내려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다는 남산 아래 그 집은 누가 들어와 살았을까. 그 무허가 집에서 누가 살다가 허가를 받았으며 흔적조차 없을 그 터엔 지금 뭐가 들어서 있을까.




사람의 죽음은 신의 소관이다. 부모도 막을 수 없다.

바카라의 아들에게 암이 발병했다. 누구에게나 그렇듯그녀에게도 금쪽같은 한 명의 아들이었다.


그녀에게 단기 기억상실증이 시작됐다.

그녀의 아들이 암 완치 판정 후 재발이 됐다. 바카라의 병세가 조금 더 진행됐다.


그녀의 아들이 59세에 세상을 떠났다.

너무도 슬픈 일이 실화로 계속 인식된다면 맨 정신으로 어떻게 버티며 살아갈 수 있을까.

그녀의 뇌는 그녀를 ‘단기 기억상실증’이라는 이름의 깊은 골짜기 집으로 피하게 해 그녀를 살게 했다.

그녀는 약을 복용하며 요양보호사의 도움 받고, 성서를 쓰며 집에서 지내고 있다.

공책은 다 쓰면 며느리와 딸이 계속 사다 주는데 그녀는 공책을 천사가 와서 두고 간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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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형제들은 마음이 급해진다. 만남의 의미도 깊어진다.


가을에 오빠가 세상을 떠나 혼자된 막내 올케 바카라 집에서 우리 대가족이 지난 주말에 모였다.

조카들로부터 마더 테레사 칭호를 받는, 30대에 혼자된 데레사 바카라의 선동으로 잡힌 날짜다.

그녀는 지금 자궁경부암 치료를 받고 있다.


그녀가 그녀의 세 딸과 세 사위 손자손녀들을 대동하고 왔다.

그녀가 김치를 새로 했다며 김치와 다시마 부각을 내놓았다. 먼저 도착해 있던 나는 아니 바카라 암 환자 맞느냐고 김치를 다 했느냐며 놀랐다.

그녀는 아유 내 걱정일랑 하지 말아요 난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말했다.


큰바카라도 딸 내외와 함께 왔다. 각종 과일을 여러 상자 사 오셨다.

아프기 전엔 부지런하고 서울 숲을 자주 걷던 그녀는 요즘 성서 조금 쓰다가 자꾸 잠만 자서 살이 꽤 쪄있었다.


데레사 바카라 딸이 여러장의 머플러를 선물로 샀다며 풀어놓았다.

두 개씩의 머플러를 고르는 어들이 신이 났다.

막내 올케 바카라가 빨간 무늬가 들어있어 밝아 보이는 머플러를 골라 막왕바카라에게 매주었다. 환한 머플러를 두르고 환하게 웃는 왕바카라가 예뻐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옆에 앉아 같이 웃고 있는 데레사 바카라와 한 화면에 담아 또 사진을 찍었다.

이 행복한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니까.

이 기쁜 시간을 우린 몇 번이나 가질 수 있을런지 기약할 수 없으므로.



왕바카라는 그녀의 딸이 우리와 무슨 이야기를 면 너 지금 내 흉보는 거지! 자꾸 물었다.

병세가 더 진행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가 어디냐, 얘는 누구냐 그동안 반복해 묻기는 했어도 내 흉보느냐고 물은 적은 없었으니까.


우리는 모두 식당으로 갔다.

예약으로 이미 차려진 테이블에 모두 앉았다.

데레사 바카라가 식사 전 기도를 시작했다. 중간에 기도가 멈췄다. 잠시 후 다시 기도를 이어가는 그녀의 목이 메어있었다.

기도를 끝내고 눈에 눈물을 단 채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왜 눈물이 나나 모르겠다고.



어른의 자리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불편을 준다는 마음 때문에 나는 늘 어렵게 느껴진다.

조카들과 조카사위들끼리 거기 앉아라 나는 여기 앉을게 상의해 그들이 중간중간에 앉아 고기를 구웠다. 그들은 어른들의 앞 접시에 부지런히 고기를 놓아주었다. 고기도 알맞게 잘 익혀 예쁘게도 썰어 놓았다.

어른들은 자네도 먹게, 너도 어서 먹어라 말했고 조카들과 조카사위들은 지금 먹으면서 굽고 있으니 걱정 말고 많이 드시라고 했다.

그들은 잘게 썬 고기는 집어서 몸을 돌려 제 자식들 입에 넣어주었고 그들의 아이들은 제비 새끼들처럼 받아먹었다.

어느 미스 월드 사진이, 모델 사진이 가족사진만큼 아름다울까.

나는 먹으면서 이 모습 저 모습의 가족을 향해 카페라 셔터를 눌렀고 조카와 조카사위들도 고기를 굽다가 자기들의 각도에서 틈틈이 사진을 찍었다.

식사를 다 끝내고 밖으로 나갔다.

식당 여주인에게부탁해 우리는 마당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녀가 찍어준 사진을 들여다보니 뒤 배경으로 보이는 강물과, 나무 아래 대가족의 밝은 표정들이 어우러져 아름다웠다.


나는 혹시 잊고 그냥 보낼까 봐 생각난 김에 조카손자 손녀들에게 용돈을 주었다.

돈을 손에 쥐어주면 제 아빠 품에서 지폐를 공중으로 호로록 날려 버려 가족들을 웃게 만들었던 세 살 세라가 이번엔 반듯하게 서서 양손으로 받았고 받은 돈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어른들이 세라가 이젠 돈을 아나 보다며 웃었다.


왕바카라의 배 나온 사위도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아이들에게 돈을 주었다. 모두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감사합니다 말했다.


이제 카페로 이동하자고 막내올케바카라의 아들이 말했다.

데레사 바카라의 큰 딸이 그에게 낮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점심은 니가 샀으니까 커피는 내가 살게.”

조카들이 세워주는데서 내려 카페로 따라 들어갔다. 차로 10분 정도 이동해 위치해 있는 카페는 예뻤다. 넓은 잔디, 분수가 있는 외부와 커피 향이 은은한 내부도.

어른들끼리는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한 여 조카가 주문을 받아 메모해 주문했다.

다른 두 조카가 빵과 차를 날랐다.

우리는 차를 마시고 잘라놓은 빵을 포크로 찍어 먹었다.

조카들은 뒤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어린아이가 있는 조카사위들은 따로 앉아 아이들에게 주스와 빵을 먹였다



나는 옆에 앉아있는 왕바카라에게 바짝 다가앉았다. 바카라의 손을 잡았다. 그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카페 안 손님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소리는 작게 해서 불렀다. 입모양과 몸짓은 크게 하면서.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다음 가사가 생각이 안 나서 멈칫거리자 왕바카라가 바로 이어갔다. 바카라의 총명함은 쇠하지 않았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그녀의 딸이 동영상을 찍고 있다. 가족사진과 영상은 가족의 기록이기에 사진과 이 영상은 곧 가족 밴드에 올라갈 것이다.

바카라의 고운 목소리는 많이 탁해져 있다. 노래 부르는 그녀의 표정은 아기 같았다.


1절이 끝나 그만하려는데 그녀가 2절을 불렀다.

'가을밤 고요한 밤 잠 안 오는 밤'

형제들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기뻐했다.

우리는 다 함께 이어갔다. 역시 노랫소리보다 표정과 몸짓을 더 크게 하면서

‘기러기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어머니가 자리보존을 시작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 간병을 맡은 요일에 갔던 나에게 어머니가 말했었다. “느이 큰바카라가 고생 많았다. 내가 자주 아팠었지. 느 큰바카라가 까다로운 내 입 맞추느라 고생이 많았지.

젖만 떨어지면 놓고 가는 동생들도 건사하느라 느 큰바카라가 제일 고생했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왕바카라가 말했었다.

“어머니 대단한 분이셨지. 세에상에 그 많은 자식들, 그 시절 다른 집 같았으면 남의 집에 여럿 보냈을 거여. 그래두 어머닌 그 자식들 다 품고 사셨잖어. 거기다 논밭도 사고 재산도 늘려가면서... 자식들 중엔 왜 우리 어머니만 한 자식이 하나두 읎나 몰러.”


2절이 끝나 소리 안 나게 모두 박수를 치는데 맞은편에 앉아 같이 부르던 데레사 바카라가 살며시 일어났다.

한 손바닥은 가운데 놓여있는 탁자를 짚고 상체를 바카라 쪽으로 숙였다. 한 팔로 지휘하는 몸짓과 함께 3절을 시작했다.

그녀가 앞장서 노래를 이끌 때 늘 하는 손짓이다.

‘밤 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이 노래를 ‘찔레꽃’으로 부른 가수 이연실 버전의 가사를 우리는 늘 3절로 불렀었다. 여수로 가는 여행 차 안에서, 제주도, 천리길 진주 숙소에서.

우리는 또 같이 이어갔다.

‘하얀 발목 바쁘게 내게 오시네

밤마다 보는 꿈은 하얀 엄마 품

산등성이 너머로 흔들리는 꿈‘



3월 말 봄 햇살이 따사롭다.

젊은 조카들은 어느새 나가 카페 밖 테이블에 앉아 담소 중이다.

아이가 어린 조카사위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잔디에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있다.

우리 형제들은 카페 안에서 가만가만가을밤을 노래하고 있다.



https://youtu.be/_PH3L06INwI?si=NjqTBjyrir7RWMpp

https://youtu.be/2I-G5TKspLQ?si=sy3B96a9t8hcVp-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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