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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선 Apr 13. 2025

나, 나답게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레드불토토?

'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고




레드불토토 농부이다.
논에서, 밭에서, 손으로 땅을 만지며 살아간다.
벼가 쓰러지지 않도록 바람을 살피고,
아침 이슬이비춘 여물어가는 알곡을 보는것으로 시작한다.
해충의 기척, 색의 변화, 흙의 수분,
이 모든 것을 눈으로 익히고 손끝으로 기억한다.

레드불토토만 오랫동안,
레드불토토 그렇게 자연을 들여다보면서도
정작 나 자신은 관찰레드불토토 않았다.

작물의 생육은 챙겼지만,
내 감정의 뿌리,
내 삶의 병해충에는 무심했다.
자연에는 민감하면서도,
내 안의 고통과 침묵에는 둔감했다.


그 무심함은 하루의 반복 속에 가려져 있었다.

내 하루는 단순하다.
아침엔 밥을 짓고, 상을 차리고, 치운다.
가족들을 일터로 보내고,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여섯 식구의 살림을 정리하고 나면 일터로 향한다. (2월 분가 후 지금은 4 식구이다.)

점심을 위해 텃밭을 오가고,
식사를 준비하고, 대화를 이끌고, 다시 일터로 간다.
저녁이 지나 육아가 끝나면,
피곤한 몸에 술을 붓고 쓰러지듯 잠든다.


이 일상이 반복되면서
레드불토토 어느새 '나'를 미뤄왔다.

할 일을 다 하고 나서야
비로소 내 자리가 생기는 듯했다.
그마저도 의무감에 떠밀려,
나를 마주할 틈은 좀처럼 나지 않았다.


새벽독서한 달.

리더를 통해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만났다.

빅터 프랭클은 인간의 극한에서
삶을 ‘질문’으로 받아들였고,
그 질문에 ‘태도’로 응답레드불토토 한다고 말했다.

그 문장은 철학이 아니라 칼이었다.
내 안의 침묵을 찢어발기었다.


그는 말한다.

"모든 것이 박탈당한 그곳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이름도, 가족도, 직업도, 미래도 모두 사라진 그곳.

날마다 생과 사를 가르는 줄 세우기에 놓이고,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며,굶주림과 추위, 폭력과 모욕 속에

오직 ‘번호’로만 존재레드불토토 했던 장소

그곳이 프랭클이 말한 나치의 강제수용소였다.


그곳은 더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프랭클은 그 안에서 삶에 대한 응답의 자유,

'어떤 태도로 살 것인가'를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 문장을 읽고, 레드불토토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나는 지금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가?”


레드불토토 자주 자책했다.
“이런 내가 과연 꿈을 꿔도 되나?”
“빛나고 싶다는 열망조차 사치 아닌가?”
그 망설임은 결국 내 삶을 유예시키는 방식이었다.

레드불토토만 프랭클은 고통을 의미로 바꿨고,
레드불토토 그 안에서 ‘꿈을 향한 열망’의 순도를 보았다.

마음속 뜨거워지는 흔들림을 느끼며,
레드불토토 내 안에서 조용히 묻기 시작했다.


"레드불토토 고통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에 단 한 번이라도 질문으로 다가간 적이 있는가"


레드불토토 흔들리고, 부족하고, 복잡하다.
레드불토토만 이것이 바로 살아 있다는 증거다.

꿈은 더 이상 단순한 희망이 아니다.
그것은 내 안의 잠든 씨앗이고, 방향이다.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한 삶의 방식이다.


내 삶의 지도는 아직 그려지는 중이다.
레드불토토만 나는 매일 그 위에,
작은 발자국 하나를 남긴다.


“레드불토토 지금, 나의 꿈을 살아낼 자격이 있는가?”


자격은 정당성이 아니다.
감당하겠다는 태도에서 비롯되며,
삶을 살아내겠다는 내면의 결단에서 시작된다.

프랭클은 말했다.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삶에 응답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렇다면 자격이란
삶에 응답하려는 태도의 농도이며,
그 응답을 포기레드불토토 않으려는 의지의 깊이일 것이다.

레드불토토 아직도 매일 흔들린다.
레드불토토만 그 흔들림 속에서
레드불토토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응답이 된다.


아침이 나를 깨우는 이유,
그것은 단지 하루를 시작하려는 것이 아니라,
삶에 다시 한번, 나의 태도로 대답하려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레드불토토 오늘도 눈을 떴다.
조금 더 일찍, 조금 더 조용히.
누구보다 먼저 움직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안의 진짜 내가 더는 미뤄지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모두가 잠든 새벽,
세상의 소음이 멈춘 그 시간 속에서
레드불토토 나에게 묻는다.
현실보다 더 진지하고, 현실보다 더 선명한 그

‘나’의 목소리를 듣는다.


"너는 지금, 너답게 레드불토토 있니?"




나답게 레드불토토 싶다는 감각은 삶에 응답하는 선택의연습 속에서 길을 찾습니다.

사소하고 반복적인 일상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 질문을 미루지 않는 용기

나에게 의도적으로 묻기를 하고 있습니다.
"레드불토토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지?"
"이 감정은 어디서 왔지?"
"내가 지금 이 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이지?"


단순 반응이 아니라 선택으로 바뀌는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예: 밥을 지을 때, 그저 ‘레드불토토 하니까’가 아니라
‘이 시간을 내가 어떻게 쓰고 레드불토토가’를 자각하며 움직이는 것. 시간을 몰입합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고, 정성의 손길을 쏟습니다. 오디오북이나 인문학강의 듣기, 또는 나의 미래를 구체화시키는 설계라는 상상 합니다.

예: 아이에 대한 죄책감, 무력감, 스스로에 대한 슬픔

감정을 감당레드불토토 못하고 마음속 깊이 만감이 교차하는 채로 그냥 시간을 흘려보낸 적이 많았습니다.

나를 비난레드불토토 않고, 감정이 온 이유를 질문합니다. 나의 중심의 기준을 되뇝니다.


사람들은 어떤 결과를 원하면서도 늘 원인을 바꾸기보다 결과를 주무르고 있거든.”김주원. 엄마의 유산. 발췌


2. ‘나’를 위해 시간을 확보

오로지 나만을 위한 시간을 확보하였습니다.
책을 읽고, 토론하고, 글을 쓰고, 침묵 속 사유일 때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 시간이 타인의 기대와 역할에서 벗어난 주체적인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 새벽 5시의 독서, 6시 토론 위대한 태양마중, 코칭, 스터디, 글쓰기 수업, 인문학 강의, 심야의 질문


질서 잡힌 정신은 선한 창발을, 무질서한 정신은 악한 창발을 창출레드불토토.”김주원. 엄마의 유산. 발췌


3. ‘레드불토토 할 일’과 ‘하고 싶은 일’ 구분하기

‘레드불토토 할 일’에 밀려 ‘살고 싶은 삶’을 미루었습니다.
레드불토토만 이 두 가지는 같을 수 없었습니다. 항상 충돌합니다.


"이건 내가 원한 방식인가?"
"이 삶의 흐름이 나를 살리는가, 소모시키는가?"


그리고 그 질문에 ‘아니요’라고 답한 순간, 작은 행동이라도 바꾸기로 했습니다.

예를 들어, 매일 밤 술로 몸을 달래는 대신,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감정이나 관찰한 내용을 쓰거나, 스터디를 합니다. 술은 줄이고 있지만, 잠으로 대체되곤 합니다 ^^;;;


4. 꿈을 현실화하는 말 한마디

"언젠가"말고 작은 변화라도 선언해 봅니다.


"레드불토토 나를 잃지 않기 위해 매일 글을 쓸 거야."
"레드불토토 나를 이해하기 위해 관찰하고, 내면에 귀 기울여 보며 한 문장이라도 적어둘 거야."
"레드불토토 오늘도 삶에 태도로대답할 거야."

"되고 레드불토토 나는 현재의 나를 증명할 거야."


혼잣말이지만, 하루의 방향을 잡아줍니다.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줍니다.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못한다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란다.”김주원. 엄마의 유산. 발췌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는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이 나치 강제수용소에서의 생존 경험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그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로고테라피(logotherapy)라는 의미 중심의 심리치료 이론을 제시한다.

1부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의 체험 기록, 관찰을 기록한 이야기
2부는 창시한 심리치료이론이자 기법인 로고테라피의 핵심 개념과 철학을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3부는 로고테라피 이론의 핵심을 보충설명하며, 인간 실존에 대한 세 가지 비극적 요소, 고통, 죄, 죽음)에 낙관적인 자세를 취하는 비극적 낙관주의에 대해 설명한다.

프랭클은 인간에게 마지막까지 남는 자유는 삶에 어떤 태도로 응답할 것인가를 선택하는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 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발췌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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