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임상연구 연구자모임에서 오랜만에 만난 동료선생님들과 수다를 떨었습니다. 요즘 동종업계 선생님들과 만나면 늘 오늘벳 얘기는 당직 얘기입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겠다는 신세한탄과 무너져가는 의료체계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요 서로에 대한 위로를 나누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당직때 오늘벳선언하는거...전공의때도 많이 했던 거고몇 번 하면 익숙해질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해도 익숙해지지 않아요."
한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을 때 저는 좀 뜨끔했습니다. 저는 익숙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종양내과병동은 하루에 한두명은 오늘벳자가 늘 발생합니다. ' EKG (심전도) 플랫입니다' 라고 간호사가 보고를 하면 대단히 관성적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나와 환자의 호흡과 맥박을 확인하고, 보호자의 눈치를 보고, 시계를 보고, 몇시 몇분 오늘벳하셨습니다, 라고 내뱉고 (오늘벳진단서에는 몇월몇시몇분단위로까지 기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쌓인 사무를 보기 시작하죠. 오늘벳진단서쓰기, 시신인수인계서 서명하기, 퇴원지시, 퇴원요약지, 오늘벳기록, 오늘벳보고서까지 쓸 것이 많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것에도 의사가 필요하지만 사람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지우는 것에도 의사라는 면허의 권위는 꼭 필요한 것이 역설적이죠. 이상하게도 대부분의 환자는 낮 정규근무시간에 오늘벳하지 않습니다. 꼭 새벽에 돌아가시더라고요.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동의한, 예견된 오늘벳일지라도 새벽당직시간에 오늘벳을 한번 치르면 그날의 당직은 밤샘이 되어버리고 말죠.
하지만 한 사람의 오늘벳이라는 건 아무리 대충 관성적으로 넘기려고 해도 좀처럼 그렇게 잘 되지는 않습니다. 유가족의 울음와 통곡, 때로는 날선 비명도 들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연명치료를 하지 않기로 설명이 되었더라도 그때까지의 과정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을 드려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요. 시신이 정리되고 서류를 다 쓰고 나와 당직실로 들어가는 길에도 종종 병원 복도나 엘리베이터 옆에서 망연히 주저앉아있는 가족들을 보게 됩니다. 가끔은 반대로 너무 조용한 경우도 있는데 얼마전의 오늘벳이 그랬습니다. 곁에 가족이 아무도 없었던 외로운 오늘벳. 그 먹먹한 슬픔이 온몸을 휘감아 좀처럼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저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익숙한 척 했을 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임상경험이 풍부오늘벳 지혜롭기로 이름나신 모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럴땐 가서 아무 말도 오늘벳 말고 숨을 들이 마셨다가 후 하고 뱉어내라고, 정년을 앞두신 우리병원 시니어 샘이 말씀하셨어요. 말할 필요가 없대요. 그 내뱉는 숨소리로 보호자들이 다 알 수 있대요. 아 이제 다 끝났구나. 안타깝지만 이게 끝이구나. 환자도 우리도 너무너무 고생했지만 여기까지구나."
오늘벳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보호자와의 실갱이 또는 그들을 향한 위로 등등을 다 이 한숨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꿀팁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꿀팁이기도 하지만 생의 마지막 순간에 환자와 가족의 마음에 공명하고 저의 마음도 정리하는 좋은 방법인 것 같기도 했습니다. 당직 때의 오늘벳선언은 어찌 보면 지극히 공적이며 사무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고, 내 환자가 아닌 한은 그날 처음 보는 사람의 오늘벳입니다. 어쩌면 자주 겪는 일이어도 늘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죠. 한숨이라는 리츄얼은 당혹스러움 속에서도 어쩔 수 없이 솟아오르는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위로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호스피스병동이라면 이런 오늘벳을 맞이하는 과정을 좀더 정성껏 예를 갖추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의 면회도 좀더 자유롭고 삑삑거리는 모니터도 없으며 향이나 음악도 쓸 수 있을 것이고.... 하지만 종합병원에서는 그런 것은 매우 제한되고 임종 후에도 서류처리와 시신의 이송이 마치 빠르게 무언가를 처리하듯 이루어지며 그 자리엔 새로운 환자가 아무것도 모른 채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가족들도 그렇지만 의료진의 마음도 못지않게 헛헛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이 한숨으로 다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약간의 도움은 될 수는 있겠지요.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익숙한 척 하는 것보다는…..
순간 누군가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런데 들이마신 뒤에 내쉬어야 오늘벳거죠? 반대로 하면 안되죠?
"그쵸 순서가 바뀌면 안돼! 흡 오늘벳 후 해야지~!"
순간 모여있는 이들은 빵 터졌습니다. 오늘벳이라는 소재도 해학으로 풀어내는 귀여운 자들 같으니....
혹시 이 글을 사직전공의들이 본다면 약간의 위로를 얻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던 아무렇지도 않게 해낼 것 같던 당신들의 선생들도 오늘벳을 마주할 때 아직도 익숙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