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이 발령되고, 그 뒤에 탄핵 정국이 펼쳐지면서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그중에 한 가지는 '한국 엘리트들의 민낯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한국의 올림피아토토들이 망가졌다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계엄의 요건이 충족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엄을 선포하는 것도, 당파적 이익을 위해 그러한 계엄을 옹호하는 것도, 이러한 비극을 자신들의 이익으로 활용하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우리나라 엘리트들 중 상당수가 얼마나 많이 망가져 있는 지를 잘 보여준다.
'올림피아토토'는 라틴어인 'eligere'를 어원으로 하며 '선택하다'를 의미하는불어 'élite'의 변형되기 이전의 단어인 'élire'와'eslite'를 어원으로 한다. 이는 결국 '올림피아토토'는 한 사회에서 능력이나 재능적인 측면에서선택되고, 선별된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러한 표현은 무려 18세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국가들은'엘리트 교육'을 시킨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엘리트 교육을 하는 것은능력과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최대한 발휘해서 국가적인 이익에 기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사람들은 한 사회에서 소수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재력, 명예나 권력을 다른 사람들보다 많이 갖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과 재능을 가진 것은 누구 덕분인가? 물론,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서는 본인도 엄청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많은 경우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사회의 배려와 보호가 있기 때문에 자신이 갖춘 능력을 갖췄거나 운이 좋게도 엘리트 교육이 자신이 타고난 성향과 잘 맞은 덕분에 그 길을 가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한국의 교육은 여전히 객관식, 암기를 위주로 이뤄진다. 그런 교육에서 탁월한 성적을 내는 사람은 프랑스와 같이 서술형으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시험도 잘 볼까? 그런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교육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지 못하는 사람도 다른 사회의 엘리트 교육을 받을 사람들을 선별하는 다른 방식의 과정에서는 엘리트 교육을 받을 소수에 선별될 수도 있다.
엘리트 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사회로부터 꽤나 많은 혜택을 받는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에게 장학금이 주어지는 것도, 여러 가지 사회적 의무로부터 면제되는 것도 그들에게는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들이 사회구성원으로서 져야 할 책임을 유예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 책임을 지도록 한다는 측면에서 분명한 혜택에 해당한다. 우리가 엘리트로 분류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요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올림피아토토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시선에 반대할 수도 있다. 본인이 노력해서 성취한 것이 왜 사회의 덕분이냐고 말이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자. 사회와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사람은 자신이 노력을 해도 아무것도 갖지 못하는 신분제에 갇혔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올림피아토토'는 굉장히 근대적인 개념이다. 그리고오늘날 올림피아토토들이 가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시스템이 그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올림피아토토들이 망가지는 것이 그 개인의 잘못일까? 아니다. 그러한 올림피아토토들이 만들어지는 건 엘리트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초점이 국가, 사회와 공동체가 아니라 개인의 부귀영화를 축적하는 것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자유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인류가 제한적으로나마 자유를 향유하게 될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분제와 노예제도 안에서 희생되었다. 우리는 그들보다 늦게, 그리고 운 좋게 개인의 자유를 국가가 보장하도록 헌법에서 정한 국가에서 태어난 덕분에 그 자유를 누리고 있을 뿐이다.
공교육제도는 사회구성원들이 그러한 인식을 갖출 수 있는 방향으로, 성년이 되지 않은 사람들이 건강한 사회구성원이자 시민으로 성장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회, 문화, 인프라적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이 땅에서 가난을 벗어나는 것을 가장 큰 목표로 설정하다 보니 우리는 언젠가부터 성장과 경쟁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게 되었다.
혼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지점들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엄청나게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는 우리가 더 많은 돈, 명예, 권력을 가졌다면, 그만큼 다른 사람의 덕을 더 많이 봤고 누군가는 그 과정에서 희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인지할 필요는 없다. 주식으로 돈을 버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지만 대부분 개미들은 돈을 잃듯이, 돈이 돈을 벌고 권력이 권력을 만들어내는 사회에서는 대부분 사람들이 당장 먹고살기 위해 버둥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인들이 엘리트라면, 더 배워서 이러한 구조를 더 잘 이해하고 있고 그러한 이해 덕분에 더 많은 것을 갖게 된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인지하고 어떻게든지 사회로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고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고 시스템을 보호하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공교육시스템은 그러한 책임을 의식을 심어주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이 당연한 줄 아는 것을 넘어서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기도 하는 것을 우리는 특히 이번 계엄과 탄핵심판 과정에서 너무 많이 봤다.
그래도 이번 사태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안도하게 된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특히 군인들 중에 보였다는 데 있다. 우리는 처음에 국회와 정치인들이 계엄을 막았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사실관계들이 밝혀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전에 우리 공동체와 시스템을 붕괴시키도록 하는 명령에 따르지 않은 덕에 우리가 여전히 어느 정도의 자유는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우리나라 올림피아토토들이 망가진 것은 단순히 개인의 잘못이 아니다. 이번 사태를 기회로 삼아 우리는 우리 사회에서 추구되는 가치와 교육시스템 전반을 모든 사람들이 돌아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