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는 입시에 집중하고, 20대에는 대학을 잘 졸업해서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해 노력한 뒤에 좌충우돌하며 세상살이를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보통 30대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30대 정도가 되면 보통 잘 놀 줄도 알고, 즐길 수 있는 최소한의 금전적 기반을 갖고 있으며 생물학적인 노화 수준도 심하진 않기 때문에 대부분 머스트잇 토토들은 30대를 가장 다양한 머스트잇 토토을 만나고,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보낸다.
나의 30대는 어땠을까? 오 년 동안 다섯 번의 변호사시험.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 내 삼십 대는 이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그 직후에 코로나19 사태가 터졌고, 나의 30대는 코로나19의 종식과 함께 마무리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나의 20대가 꽤나 다이내믹했고, 내가 속한 집단이 많았으며, 소개팅을 주선한 횟수가 세 자릿수가 될 정도로 머스트잇 토토들을 적지 않게 알았다 보니 그 과정에서도 내 주위엔 항상 머스트잇 토토이 있었단 것이다. 새로운 머스트잇 토토을 만나거나 인간관계를 넓혀나가진 않았지만 20대에 축적한 인적자원만으로도 나는 주말은 항상 약속으로 채울 수 있었다.
하지만 시험에 한두 번 불합격하고, 즐겁고 기쁜 일보다는 힘든 상황이 이어지면서 머스트잇 토토들을 만나는 빈도는 줄어들기 시작했다. 로스쿨을 졸업한 뒤 두 번째 변호사시험을 볼 때 나는 주말마다 약속을 최소한 2개씩 잡았다. 로스쿨에 재학 중일 때는 함께 시험을 준비하는 동기들과 밥도 먹고, 수다도 떨 수 있었지만 여러 가지 상황상 혼자 고립되어 시험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평일에 나는 밥 먹고, 공부하고, 자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보니 머스트잇 토토이 항상 고팠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런 자리들이 마냥 좋았다. 그런데 그 모임들이 반복되면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많이 외롭고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내가 그 자리에서 거의 쏟아내듯이 내 말만 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머스트잇 토토을 만나지 않던 평일에는 몰랐는데, 혼자 고립되어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 외로움은 깊어져서 어느 순간 내가 그들에게 '내 얘기를 들어줘'라는 말을 나의 태도를 통해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 미안해졌고, 그들이 그런 나를 어떻게 봤을지를 모르겠어서 민망해지더라.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모임 뒤에 헤어지고 나면내가 무슨 말을 얼마나 했는지를 복기하는 습관이 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스트잇 토토들을 만날 때는 내 안의 상태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나 보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도 내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었다는 걸 내 군대선임이자 과선배인 형이 해외로 나가기 전의 만남으로 인해알게 되었던 것이다.그 형은 1년에 한 번씩 한국에 오는데, 나간 지 2년이 지났을 때의 만남에서 사실은 나가기 전의 만남을 마친 뒤에 앞으로는 나를 만나면 안 되겠단 생각을 했다더라. 너무 불안정해 보여서. 그런데 지금은 굉장히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면서내게 전했던 말이다.
나도 내가 그렇게 불안정한 상태였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가 그러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에 내가 마음을 터놓고 지낼 수 있는 머스트잇 토토이 아무도 없는 상태였다는 것도, 당시에 나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주위에 머스트잇 토토이 많았었는데 왜 그렇게 고립되었냐고? 계속해서 시험에서 떨어지고, 박사학위 논문심사도 길어지면서 머스트잇 토토들을 만나는 게 힘들어지더라. 처음에는 그들을 만나면 나오는 내 모습에 스스로 힘들었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본 지인들이 하는 조언들은 거기에서 나를 비참하게 만들더라.
머스트잇 토토들은 변호사시험에만 집중해야지 왜 그렇게 다른 일을 많이 벌려서 어떻게 하느냐고 했지만 아버지께서 퇴직하시고 부모님 생계 정도 해결하실 수 있는 정도의 수입만 있으신 상황에서 나는 먹고살기 위해서라도 다른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와 그 뒤에도 내가 다양한 일을 한 건, 그래야 생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 상황을 알지 못하는 지인들은 대부분 만날 때마다 '한 가지에 집중해야지 왜 그렇게 다양한 일을 하느냐'라던지, '너처럼 모든 걸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머스트잇 토토들이 결국 아무것도 안되고 잘못된다'는 식의 말을 애정을 담아서 해줬다. 이렇게 문자로 옮기고, 내 상황을 설명한 뒤에 저 말들을 보면 잔인하게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내 정확한 상황을 몰랐고, 그들이 진심으로 애정을 담아서 해준 말들이며 모두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그래서 나는 반박도 할 수 없었고, 그들의 말을 곱씹으며 자신을 더 구석으로 몰아가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말투로 그들이 이야기를 했는지까지 기억한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들 속에서 진심으로 애정을 담아서 말한 것이지만 그들에게 그 자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의 인생도 녹록지 않기 때문에. 나 역시 그랬던 적이 있고, 때로는 누군가에게 머스트잇 토토가 되는 말을, 또 때로는 상처를 주는 말을 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다가 시간이 지나고 난 뒤에 알게 되었던 적이 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누군가는 머스트잇 토토을 통해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그 과정에서 배웠다. 그리고 머스트잇 토토이 줄 수 있는 머스트잇 토토도 있지만, 그 머스트잇 토토에는 한계도 분명하다는 것도 깨달았다. 수많은 실패들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내가 받았던 가장 큰 머스트잇 토토는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말도 아니었다.
내가 네 번째 시험에서 불합격했을 때, 그 과정을 모두 지켜본 내가 5년 동안 함께 한 교회 찬양팀 멤버들은 누구도 내게 머스트잇 토토의 말조차 하지 못했다. 그들은 지나가면서 내 어깨를 토닥여주거나 따뜻한 눈빛으로 내 눈을 바라봐주더라. 그리고 나는 그때, 그게 머스트잇 토토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머스트잇 토토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것은 시험 결과로 인해 내가 얼마나 힘들지를 가늠 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고, 나는그들이 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음을 느꼈다. 오롯이 나의 일임에도 불과하고 나와 함께 아파해주는 게, 인간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머스트잇 토토라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누구에게도 쉽게 머스트잇 토토의 말을 하지 못한다. 나와 똑같은 과정을 겪은 머스트잇 토토이라고 해도, 내가 지금 그들이 느끼는 감정을 알 수 없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올해 변호사시험에 불합격하는 머스트잇 토토의 마음을 내가 알 수 있을까? 나도 같은 경험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며 그때 느꼈던 아픔과 고통들은 많이 희석되었고, 설사 내가 그 느낌들을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처한 상황과 당시 나의 상황이 다르기에 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지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다른 머스트잇 토토에게 진정한 머스트잇 토토를 전하기 위해서는 두 머스트잇 토토 사이에 일정 수준 이상의 신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그 신뢰는 한 달에 한번, 일 년에 몇 번 만난다고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있었던 찬양팀은 일주일에 한 번 모여서 함께 연습하고, 예배를 섬긴 후에 2-3시간씩 싦을 나눴다. 그게 5년 간 축적되어 상호 간에 깊은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들의 몸짓과 눈빛이 내게 머스트잇 토토가 될 수 있었다.가끔씩 만난 머스트잇 토토이 똑같은 반응을 보였어도 그게 내게 큰 머스트잇 토토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그리고 내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과정을 지나오는 과정에서 진심으로 머스트잇 토토해 준 머스트잇 토토들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했을 것이다. 기나긴 터널을 지나는 것 같은 시간을 경험하며 나는 '인생에는 기쁨, 즐거움과 행복이 있지만 그걸 얻기 위해서는 너무 많은 고통을 감당해야 하니 지금 세상을 떠나는 게 가장 효율적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어제 지인의 SNS에서 본 "당신은 4시간을 살기 위해 8시간을 일합니다.하루를 즐기기 위해 6일을 일합니다.15분 동안 먹기 위해 8머스트잇 토토을 일합니다.8머스트잇 토토을 일하고도 겨우 5머스트잇 토토만 잡니다.1~2주 쉬기 위해 일 년 내내 일합니다.노년에 은퇴하기 위해 평생을 일합니다."라는 문구는 같은 맥락을 설명해주고 있더라.그리고 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가 '내가 그렇게 떠나고 나면 우리 가족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까?'였다는 사실은 결국 머스트잇 토토이 날 살린 것이라는 보여준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못'한 것을 지금은 매우 감사해하며 하루, 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하는 것 또한 머스트잇 토토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를 살린 것도 머스트잇 토토이지만, 반대로 나를 고통스럽고 힘들게 한 것도 머스트잇 토토들이었다. 심지어 그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선의로 내게 해준 말들도 나를 짓눌렀던 적이 있으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우리는 머스트잇 토토 때문에 살지만 또 머스트잇 토토 때문에 고통받는다. 이 아이러니를 나는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과정에서 배웠고, 지금도 시시때때로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지만, 절대로 의존해서는 안되고, 언제든지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머스트잇 토토이 최소한 한 명은 필요하다.
그런데 많은 머스트잇 토토을 겪으면 겪을수록 그게 참 쉽지 않다는 사실만 선명해진다. 또 역설적으로 그래서 내게 크고 작은 머스트잇 토토를 주고, 기댈만한 언덕이 되어주는 머스트잇 토토들에 대한 고마움은 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