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 파트너사 방송 회의 때 차장님이 새로운 얼굴을 소개했습니다.
"앞으로 홈쇼핑 영업 총괄을 해주실 이 부장님이십니다. 슬롯생각도 아주 화려하시고 홈쇼핑 쪽은 거의 뭐 전문가셔서 저희가 모시고 오느라 아주 힘들었습니다. PD님 잘 부탁드립니다"
깔끔한 인상의 이 슬롯생각은 젠틀하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 뒤 파트너사의 홈쇼핑 영업 파트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기존과 다른 방송 포맷을 제안하기도 했고 색다른 사은품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만날 때마다 이 슬롯생각은 의욕에 가득 찬 표정이었습니다.
확실히 새로운 사람이 오면 새 바람이 분다는 게 실감되었습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시간이 지났습니다.
파트너사의 상품은 여전히 때로는 순조롭게 때로는 부침을 겪으며판매가 되고 있었습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슬롯생각의 무표정이었습니다.
저는 그저 적응을 끝낸 슬롯생각의 덤덤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큰 행사를 끝내고 다 함께 회식을 했습니다.
이 슬롯생각과는 처음으로 하는 술자리라 어떤 스타일일지 궁금했습니다.
모두가 시끌벅적하게 대화를 하며 주거니 받거니 거나해지는 상황에서도 이 슬롯생각은 말없이 술을 들이켰습니다.
생각보다 조용하신 분이다 생각하며 저는 나머지 일행들과 일적으로, 사적으로 하지 못했던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렇게 2차까지 끝난 새벽, 모두가 돌아가려는데 이 슬롯생각이 조용히 저를 붙잡았습니다.
"PD님. 실례가 안 되면 조용히 한잔만 더 가능하실까요?"
"네? 너무 늦었는데.."
"딱 한잔만 더 하시죠. 제가 긴히 드릴 말씀도 있고.."
그렇게 이 슬롯생각과 저는 가까운 포장마차에 들어갔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잔치국수와 소주가 테이블에 놓이자 이 슬롯생각은 조용히 술을 따랐습니다. 딱히 할 말이 없던 저는 괜히 슬롯생각을 생각하는 척 말했습니다.
"슬롯생각 무슨 일 있으세요? 오늘 조용하시길래.. 원래 그런 스타일이신가 싶기도 하고"
"처음 이 회사 왔을 때 기대가 컸어요. 나름 홈쇼핑 잔뼈도 굵고 쌓아온 성공 노하우도 있고"
뜬금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는데 이 슬롯생각은 아랑곳 않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처음 3개월은 수습이라 적응하고 이것저것 새로운 것도 시도했어요. 그렇게 좀 파악이 되면 제 나름의 방식으로 조직을 이끌고 성과를 내보려고 했지요"
"네 기억납니다. 방송 포맷이라든지 사은품 같은 게 바뀌고 저는 나름 신선했어요"
"저도 나름 합류한지 얼마 안 되었지만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제가 입사하고 두 달쯤 되었을 때 대표님이 대뜸 저에게 이제 적응은 끝났을 텐데 뚜렷한 성과가 없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아.."
"저는 나름 3개월은 허니문 기간으로 적응하고 파악할 시간을 충분히 주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나니 갑자기 조급해지고 정상적인 사고가 안되더라고요. 그래서인지 제가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던 일의 방식이라든지 이런 게 하나도 안 먹혔죠. 그러다 보니 조직에 적응도 힘들었어요. 대표는 압박하지 조직원들은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일 진행하던 팀장님이 허둥지둥하니 반감들지. 가뜩이나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회사에서 철저히 혼자인 느낌이었어요"
이 슬롯생각은 연거푸 술을 들이켜더니 말을 이어갔습니다.
"뭔가 회사랑 안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어서 두 달 전에 이력서를 다시 오픈했어요. 근데 무서운 게 뭔 줄 아세요? 제가 이제 마흔둘인데 이직 제의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도 30 후반 때까지는 한 달에 한두 건은 제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몇 달째 제 이력서를 오픈해 보는 사람도 없어요"
지금의 제가 그때의 이 부장님과 술자리를 가졌으면 아마 밤이 새도록 이 주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직 한번 안 해본 당시의 저로서는 뭐라고 더할 말이 없어 그저 조용히 술을 따르는 것만 반복했습니다.
"갑자기 이 나이에 이직을 생각하려니 갈 데가 없어요. 요즘은 뭐 도살장 가듯 출근합니다. 처자식 있는데 그냥 그만둘 수도 없고 회사에서 대표가 고개만 갸우뚱해도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한두 달 치 월급 주고 나가라 그러면 대체 저는 뭘로 먹고 사나요. 입사 때는 목표도 있었고 의욕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저 사형 날짜 기다리는 사형수 같아요"
그렇게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가던 슬롯생각은 술을 털어 넣기 위해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쓴 표정으로 술을 삼키는 슬롯생각 눈이 촉촉해진 것 같기도 했습니다.
"슬롯생각. 제가 뭐 드릴 말씀은 없지만.. 반년정도 슬롯생각과 일하면서 크게 불편했던 것도 없고 오히려 일처리가 깔끔하시던데요"
"저도 처음에 이것저것 시도해 본 뒤로 일단 홈쇼핑 영업 잘하고 매출 최대한 내고 그게 최선이라 생각하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고연차 슬롯생각직에게 회사가 바라는 건 늘 그 이상인 것 같아요"
솟구치는 감정을 정리하기 위해 한동안 침묵하던 슬롯생각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습니다.
"나름 능력 있는 전문가라고 자부했는데.. 지금 회사에서 제 슬롯생각은 말 그대로 실패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또 연거푸 술을 마시던 슬롯생각은 이제 들어가자며 일어섰습니다.
휘청거리며 택시를 잡고 떠나는 슬롯생각의 뒷모습을 보며 미혼의 삼십 대 초중반이었던 저는 그저 많이 피곤하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몇 달 뒤 차장님이 다시 방송 회의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이 슬롯생각에 대해 여쭤보자 차장님은 난감한 목소리로 슬롯생각이 퇴사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자의인지 타의인지 모르겠지만 결국 슬롯생각이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을 끝으로 슬롯생각에 대한 생각은 제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사라졌습니다.
당시 슬롯생각과 같은 나이가 된 요즘이 되어서야 저는 그때 슬롯생각의 상황과 심정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쌓여버린 연차, 많아져버린 나이, 이 산업을 흔들만한 능력과 경험이 있어야만 하는 그런 위치.
저도 최근 유독 직장인의 한계를 깨닫고 답답함과 막막함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그날 유독 작게 느껴지던 이 슬롯생각의 뒷모습이 남일 같지 않은 요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