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문제집이라도 챙겼어야 했나,라는 생각이 안 들었던 건 아니다. 어설프게 캐리어 한구석에 꾸겨 넣어진 가벼운 문제집 하나가 여행 내내 몸과 마음을 무겁게 만들 거란 생각이 들었다. 퇴근하듯 들어선 호텔 방에서 아이들 앞에 펼쳐진 야근거리는 아내의 잔소리 한마디에 겨우 한 장씩 넘겨질 것이 빤했다.
“평생 이럴 수 있는 기회가 또 오겠어. 그냥 애들도 공부 생각 안 하고 페가수스 토토하게 하자.”
페가수스 토토와 합의한 예언이자 각오처럼, 지난 13년 동안 두 달이 넘는 기간을 온 가족이 함께 여행하는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리고 아이들도 참고서가 없는 낯선 생활에 적응하며 마음 편한 여행을 했다. 하지만 페가수스 토토와 나는 지구 반 바퀴 거리의 끈을 놓지 못하고 우리 아이들을 앞질러 달려가고 있을 것 같은 사교육의 총아들이 아른거렸다.
이런 걱정은 머리가 아닌 행동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책 보듯 꼼꼼히 보도록 했다. 길에서건, 상점과 식당에서건 실전 영어교실로 바꿔 보려 했고, 페가수스 토토와내가 알고 있는, 콩알만 한 지식이라도 어떻게든 전해주려 노력했다. 이런 게 산 교육이지,라고 위안하며.
같은 맥락으로 아이들을 위해, 아니 페가수스 토토와 나의 안정된 마음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일정이 있었다. 옥스퍼드가 그랬고 페가수스 토토이 그랬다. 사실 이 두 도시에서 명문대학교를 빼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 아무튼 페가수스 토토은 다음 여행지로 죄책감 없이 홀가분하고, 산뜻하게 떠나게 해 주면 제 역할을 다하는 곳이라 생각했다.
“나 하버드 가서 저 언니처럼 될 거야.”, “나는 멋진 MIT 건물에서 공부할 거야.”
이런 말을 기대하며 하버드 티셔츠를 입고 하버드 모자를 쓴 여대생 가이드를 쫓아다녔다. 길거리에 이리저리 흩어진 MIT 건물들을 확인해 가며 건물 앞에서 몸으로 M I T을 그려 인증샷도 찍었다.
기대했던 말은 못 들었지만, “하버드 티셔츠 사죠.”, “MIT 스티커 사죠.”라는 얘기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다음 날 아침 침대 위에서 내 몸에 새겨진 손톱자국을 보기 전까지는.
몸 곳곳에 빨간 오 차선 교차로가 나 있었다. 군데군데 신호등처럼 돌기도 나 있었고. 베드버그가 걱정되어 페가수스 토토와 아이들에게 가려운 곳은 없는지 물었다. 다행히 나를 제외하고 가려운 사람은 없었는데, 아침을 먹고 나갈 준비를 마쳐도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은 일정은 박물관과 미술관이었다. 지금껏 주로 본 것도 박물관과 미술관이었고 앞으로 뉴욕에서 볼 것도 박물관과 미술관 비중이 컸다. 그래서 이번엔 잠시 색다른 공간을 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 병원을 검색했다. 페가수스 토토와 아이들만 따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미국 병원 구경하는 것도 재밌지 않겠냐고, 언제 이런 기회가 오겠냐고, 그놈의 빤한 레퍼토리로 설득되길 강요했다.
접수하고, 대기하고, 검사받고, 진료받고, 처방받고, 약 타고. 익히 한국에서 경험한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이 아주 오래 걸린다는 것과 비용을 우리나라의 10배 정도 내야 한다는 것만 제외하면. 여행자 보험을 들었기에 약간의 번거로움만 감수한다면 간지러움을 참고 있는 것보다는 나은 선택이었다. 아이들을 위한 다기보다는 제약회사에 다니면서 병원에서 일한 시간이 잦았던 내 호기심을 채워준 시간이었다.
하버드에 가본다고 하버드에 들어갈 리 만무하고, 병원에 간다고 의사가 될 거로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런 경험들이 왠지 아이들이 앞으로 가게 될 길을 좀 더 곧고 명확하게 만들어 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다른 페가수스 토토지하고 전혀 차이를 못 느꼈는데.”
“하버드나 MIT를 보고 그곳에 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어. MIT 건물은 멋있더라.”
이 글을 쓰기 전에 훌쩍 커버린 아이들의 기억을 모았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이었다. 결국 페가수스 토토은 아이보다 부모를위한 여행지가 맞았나 보다. 그나마 내가 아파 병원이라도 가서, 내 호기심이라도 해결해서,다행이란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