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하지만, 맞는 이야기
너무나도 잘 아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이 있습니다. 인내는 쓰나 그 끝은 달다는 말입니다.
사실, 매 순간 케이플레이 날이길 바랄 것입니다. ‘좋다’는 의미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그 ‘케이플레이 날’은 많은 기다림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기간의 길고 짧음을 떠나, 무엇인가 우리가 바라는 것을 득하거나 이루어지기를 기다림에는 케이플레이는 힘이 필요합니다.
어쩌면, 버티는 날이 있었기에 케이플레이 날로 여겨질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매번 즐거움만 찾다가는 결국 중요한 것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괴롭고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 미래의 케이플레이 날을 위한 장치일 것입니다. 다소 낡은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물론, 버틴다고 해서 무조건 케이플레이 날이 온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불안해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케이플레이 날은 그 버팀의 결과입니다.
나름의 사정에 따라 지금 버티고 있다면, 반드시 케이플레이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Episode 1–사법케이플레이 합격
재학 중 사법케이플레이 합격은 꽤 오랜 시간 저 스스로 버틸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저는 사법케이플레이 1차 케이플레이만 연속으로 다섯 번을 봤습니다. 그 말은, 네 번 연속 낙방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제가 네 번 연속으로 낙방하는 기간 놀았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케이플레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4년 연속 낙방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다섯 번째 1차 케이플레이에서 합격했습니다. 정말 오뚜기처럼 일어선 것입니다.
네 번 연속으로 떨어졌던 1차 케이플레이과는 달리 2차 케이플레이은 재시로 붙었습니다. 당시 사법케이플레이의 경우 1차 케이플레이에 합격하면 이듬해 2차 케이플레이까지 치를 수 있는 가격까지 주어졌었는데, 저는 두 번째 2차 케이플레이에서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재시에 합격한 것은 물론 같이 케이플레이을 치른 사람들보다 점수가 그나마 나았기 때문이겠지만, 1차 케이플레이을 네 번씩이나 연속으로 떨어졌던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습니다. 너무 어렵게 1차 케이플레이이 됐기 때문에, 2차 케이플레이을 치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소중했던 것입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 저는 놓치고 싶지 않았고 그 집념 끝에 2차 케이플레이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결과론이긴 하지만, 만일 제가 세 번째 케이플레이에서 낙방하여 포기하였다면, 네 번째 케이플레이에서 낙방하여 포기하였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입니다.
오랜 시절 버팀의 케이플레이 있었기에 법조인이라는 꿈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Episode 2–박사학위 취득
사실 박사과정을 시작하고, 수업을 들으면서 논문을 쓴 것은 취미에 가까웠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쓰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취미에 가깝다는 표현을 한 이유는, 제가 박사를 목표로 한 바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번 해 볼까?”라는 생각에 시작했던 건데, 박사학위까지 취득하게 됐네요. 정말, 시작이 반인 것 같습니다.
박사과정 시작부터 졸업까지 3년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박사학위 논문을 통과시키기까지는 2년 6개월의 시간이 걸렸기 때문입니다.
주제 선정부터 목차를 잡아가고 내용을 채우기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안을 지도교수님께 보여드리고 ‘지금은 안 된다.’라는 말씀을 듣기도 했습니다. 허탈했지만, 저의 부족함을 알고 인정했습니다. 분골쇄신의 심정으로 논문을 뜯어고치고, 보완했습니다.
1년 동안 내용을 채웠다면, 나머지 1년의 시간 동안 수정 및 보완 작업의 연속이었습니다. 2년의 시간이 채워질 때 즈음 드디어 지도 교수님으로부터 심사를 청구해도 되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시 크리스마스 전이었는데, 제게는 지도 교수님의 허락이 값진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습니다.
지도교수님을 포함한 다섯 분의 심사위원님으로부터 논문심사를 받는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습니다. 박사과정을 거치는 모든 분이 그러하겠지만, 매 순간 긴장의 연속이고 교수님들께서 요구한 부분들을 다시 점검하고 보완했습니다.
마지막 심사 때 저는 심사 장소에서 잠시 벗어나 있었고, 교수님들께서는 심사를 통과시켜 주셨습니다. 그날 미리 인준지를 가지고 오는 학생들도 있다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만입니다. 저는 인준지를 들고, 따로따로 교수님들을 찾아뵈었습니다. 그 과정도 쉽지 않았습니다. 저는 전업 학생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한 교수님께서 짓궂게도 파주에서 식사 중이셔서, 그곳까지 가서 인준지에 교수님 도장을 받았지만,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사법케이플레이 이후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논문을 쓰는 기간 동안에는 주말에는 오로지 논문 작업에만 전념했습니다. 그래도, 해놓고 보니 기분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