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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선 Apr 11. 2025

삽질 5. 봄날의 햇살 같은 크보벳.

져주는 게 이기는 것. 그 넉넉함을 배우는 하루.

아들을 키우며 장애육아를 통해 나름 하드코어육아에 달련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더 많이 참고 더 많이 가르치고 더 많이 돌발상황이 생기는 육아를 하며 나름대로 보통의(?) 육아보다는 내가 레벨이 더 높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육아는 나에게 말 그대로 착각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제 4학년이 된 딸내미. 그전까지는 오빠로 인해 지친 엄마의 비타민이자 없어서는 안 될 충전기 크보벳 아이였다. 그러던 아이가 머리가 좀 크더니 어쩐지 일목요연하지만 무논리로 무장한 말대답으로 나의 혈압을 상승시키다 못해 폭발시켜 버리고 있었다.

아들육아는 육체적 정신적 소비가 비슷하게 소진됐다면 딸아이의 육아는 감정소비가 너무나도 컸다. '나는 태생이 엄마가 될 자질이 없는 사람이었나 보다 크보벳이 너무 부족한 사람인 것만 같아'..라는 자책에 빠져있을 때 아들의 미술선생님이자 나의 멘토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지금 애랑 싸우는 것 같지? 아니야.. 자신과의 싸움이야


한 사람의 독립된 인격체로 크보벳를 키우려면 내 생각과 뜻, 고집을 계속해서 꺾어야 하는 일이 생긴다. 그리해야만 크보벳는 비로소 나를 떠나 훨훨 날아갈 준비를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쯤에서 우리 크보벳도 그랬을까? 하며 과거를 되돌아본다. 내가 조금씩 머리가 크던 시기. 크보벳에게 따박따박 말대꾸를 할 때부터였던 것 같다. '우리 크보벳는 내가 이기지'라는 교만한 생각을 했던 게 말이다.

아마 그때부터 크보벳는 나에게 져주는 연습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해주는 연습을 하셨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급식비를 받아 밥은 먹지 않고 학교 앞 500원짜리 햄버거로 점심을 때우며 그 돈을 모아 좋아하는 가수의 CD를 사서 모았었다. 중식과 석식 두 끼의 급식비였기에 금액이 어느 정도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부실한 점심을 먹고 야자까지 마치고는 집에 가서 야식으로 허겁지겁 배를 채웠던 기억이 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부터 크보벳가 한 끼는 도시락을 싸주시겠다고 하셨다.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며 점심 겸 저녁을 해결했었다. 그리고 남은 한 끼의 급식비로 여전히 나는 CD를 사서 모았었다.

그때 크보벳가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결혼 후 크보벳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알게 되었다.

크보벳는 이미 내가 급식비를 다른 곳에 쓴다는 것을 알고 계셨고, 안 그래도 키가 작은 아이가 굶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리셔서 도시락을 싸주신 거였다고 했다. 그 당시 크보벳가 맞벌이를 시작하셨던 터라 아침마다 도시락 싸는 게 힘드셨지만 나를 계속 굶길 수는 없다고 하셨다. 왜 혼내지 않았냐고 여쭤보니 돈을 이상한데 쓰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고 하셨다. 크보벳가 생각하는 이상한데 라는 건 음주가무라는 말도 덧붙이셨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마음. 져주는 마음. 그 마음은 얼마나 넉넉한 크보벳에서 나오는 것일까?

나는 아직 넉넉한 크보벳이 채워지지 않았나 보다. 아직 아이가 초등학생이기에 나도 덜 큰 것일 거라고 스스로 위로해 본다. 아이가 클수록 나도 크길. 나도 넉넉해지길. 크보벳의 햇살 같은 크보벳으로 아이를 보듬어주는 엄마가 되길 오늘도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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