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쉬 - 첫 번째 돌핀슬롯
2000년대 초반은 ‘네이버’, ‘다음’ 같은 포털 사이트에 카페가 생겨나기 시작하던 시기였습니다. ‘싸이월드’라는 자신만의 가상공간을 꾸미고, 온라인상에 자신의 일상과 사진을 공유하며, 사이버 세상에서의 인연을 이어가기 시작한 때였지요. ‘알짠주’는 그 무렵 만들어진 ‘알뜰한 짠순이들의 모임’이라는 이름의 온라인 카페를 줄여 부르는 말입니다. 저는 이 카페를 통해 알게 된 지인들과 무려 20년 넘는 인연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막 결혼생활을 시작한 새색시들이었는데, 어느새 오십이라는 나이를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함께한 세월만큼이나 서로에 대한 많은 것을 나눠왔고, 마음 깊숙한 돌핀슬롯 주고받으며 더 진하게 연결되었습니다. 각자의 삶과 당시의 선택, 수많은 경험들 그리고 그때 내린 모든 결정들이 현재의 그녀들을 만들었습니다.
이 시간 속에는 기쁨도 돌핀슬롯고, 아픔도 많았습니다. 때로는 실패했고, 주저앉기도 했습니다. 삶의 커다란 변곡점과도 같은 결혼이라는 기준점에서 만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돌핀슬롯 살의 철없던 방황, 서른 즈음의 선택과 후회, 마흔의 착각 끝에 얻은 깨달음들을 차곡차곡 쌓아 오늘날의 우리가 되었습니다. 쉰이라는 나이가 완성은 아니지만, 우리가 함께 걸어온 시간 속 이야기를, 결혼 전의 꽃다운 시절부터 결혼 이후, 엄마가 되고, 다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던 시간까지 돌아보며 그 10명의 속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보려 합니다.
이 매거진의 구성은 이렇습니다. 매 장마다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담고, 그 이야기를 마주한 제가 그 시절의 그녀에게 띄우는 위로의 편지를 덧붙였습니다. 훈계가 아닌 다정한 위로. 인생을 조금 더 살아온 사람이, 그녀를 아끼는 친구나 이모의 마음으로 건네는 손수건 같은 글이기를 바라며 썼습니다.
살다 보면, 정말 그러더군요. 혼자인 듯한 세상에서 누군가 조용히 내민 작은 천 조각이, 때로는 가슴을 쓸어내릴 만큼 큰 위로가 되기도 한다는 것을. 지금 이 글을 읽는 누군가에게도 그런 마음이 닿기를 바라며, 첫 번째 돌핀슬롯 시작합니다.
1장. 돌핀슬롯 살, 미쓰김
알짠주의 햇살 같은 미소를 가진 돌핀슬롯, 언제나 밝고 따뜻한 소녀 같았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늘 먼저 도착하고, 늦는 친구에게는 전화해 오는 길이 괜찮은지 묻고, 헤어질 땐 모두가 집에 잘 도착했는지까지 확인하는 친구였지요. ‘살롱쉬’라는 이름의 모임으로 만난 어느 비 오는 토요일 오후, 참석자가 많지 않았던 그날, 우리는 자연스럽게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돌핀슬롯 웃으며 본인의 첫 직장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돌핀슬롯의 1월은 설렘으로 가득했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던 그녀는 아직 ‘학생’이었지만, 이미 대기업에 취업이 결정되어 있었지요.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한 것은 그녀 자신의 선택이었습니다. 돈을 벌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돌핀슬롯에게 있어 취업의 가장 큰 목적은 오직 ‘돈’이었습니다.
서울 외곽, 큰 공장 옆 3층짜리 작은 사무동. 1층은 총무, 노무, 회계팀이, 2층과 3층은 설비와 품질, 기계, 전기를 담당하는 부서들이 있었습니다. 돌핀슬롯 살의 경희는 그곳에서 자신의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사람들은 늘 여의도나 강남 방향으로 출근하기에 버스는 항상 붐볐지만, 경희는 반대 방향의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운이 좋으면 앉을 수 있었지요. 그때 그녀는 깨닫지 못했지만, 경희의 인생 선택은 언제나 사람들과 반대 방향이었습니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것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여직원 휴게실에서 짧은 유니폼 치마로 갈아입고, 립스틱 하나 바를까 망설이던 경희는 아직 모든 것이 어색한 돌핀슬롯 살 소녀였습니다. 출근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걸레를 빨아 직원들의 책상을 닦는 일이었고, 흡연이 가능했던 그 시절, 재떨이를 비우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습니다. 부장님의 책상은 유독 더 정성스럽게 닦아야 했지요. 경희에게 부장님은 감히 눈도 마주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요.
하나둘 유니폼을 입은 남자 직원들이 들어오고, 그들은 컴퓨터 전원을 누른 뒤 회의실에서 담배를 피웠습니다. “아, 회사란 이런 곳이구나.” 경희는 그렇게 조용히 받아들였습니다. 여자와 남자의 일이 분리되어 있던 시절, 경희는 주어진 환경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른스러움이라 여겼습니다.
회의 시간, 그녀는 조심스럽게 달달한 커피를 타서 회의실 테이블에 놓습니다. 이제부터는 ‘돌핀슬롯’가 아닌 ‘미쓰김’으로 불리는 시간입니다. 김 씨이고, 미혼이기 때문이었지요. 어제까지는 ‘돌핀슬롯’였지만, 오늘부터는 ‘미쓰김’. 이름을 잃었다는 생각보다, 이것은 그저 어른이 되는 거라 과정 중 하나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첫 월급날. 제조업의 월급은 많지 않았지만, 돌핀슬롯 행복했습니다. 처음 번 돈이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 입사한 친구들과 자취방에 모여 조촐한 파티를 열었습니다. 누군가는 피자를, 누군가는 치킨과 떡볶이를 사 왔고, 유니폼 치마 탓에 점심도 마음 놓고 먹지 못했던 돌핀슬롯 그날 배가 터지도록 먹고 바닥에 드러누웠습니다.
“아, 남의 돈 벌기 참 어렵네.”
그녀의 사치는 고작 피자 한 판. 예쁜 가방도, 새 화장품도 아니었습니다. 어릴 적 피자 한 번 사달라고 졸라보지도 못했던 기억, 시장에서 엄마 따라가 얻어먹던 샐러드빵이 최고였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그마저도 자주 먹지 못했던 간식들. 돌핀슬롯 그 시절의 ‘한’을 피자 한 조각에 녹여 풀었습니다.
그런데, 괜히 슬퍼졌습니다. 교통비와 점심값만 계산해도 월급의 절반이 사라졌습니다. “이러다간 피자는 월급날 아니면 못 먹겠네…” 그 순간, 피자를 못 사줘서 미안해하던 부모님이 떠올랐습니다. ‘얼마나 사주고 싶었을까. 못 사주는 마음은 또 얼마나 아팠을까.’ 이해가 되면서도 원망스러웠고, 그 원망이 너무 미안해서 또 불쌍해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래서 돈을 벌고 싶었지만, 막상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었습니다. 벌 수 있는 돈도 이 정도뿐이었습니다. 그렇게 돌핀슬롯의 겨울은, 도무지 봄이 올 것 같지 않게 추웠습니다.
처음 경희를 만났을 때, 밝고 고운 모습에 그녀는 유복하게 자란 친구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나는 알았습니다. 가난이라는 것이, 돈이라는 것이, 사람의 삶 전체를 어떻게 흔드는지. 그리고 20살 경희에게, 그리고 어딘가에 또 있을 또 다른 ‘경희’에게, 어른으로서 해줄 수 있는 말을 곱씹어보게 되었습니다.
돌핀슬롯에게 보내는 편지
하얀 배꽃처럼 맑고 순수한 아이, 돌핀슬롯야.
네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숨을 고르게 되더구나. 돌핀슬롯 살의 너는 참으로 단단했구나. 입술을 꾹 다물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으며 하루하루를 견뎌낸 너. 누군가는 그저 어린 나이에 일찍 사회에 나왔다고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안다. 네가 감당했던 무게가, 네가 흘렸던 눈물이 얼마나 조용히 깊었는지를.
밤이 있어야 아침이 오는 거라는 말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가로등 불빛과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가득한 도시의 밤하늘에선 별빛이 잘 보이지 않는단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도 은하수는 여전히 흐르고 있어. 네가 처한 그 시절의 어둠은, 어쩌면 은하수를 바라볼 수 있는 드문 기회였는지도 몰라.
사람들은 말하지. 꽃은 피고 지는 거라고. 하지만 나는 믿는다. 넌 꽃이 아니야. 넌 배나무 위에서 조용히 울던 작은 새였을지도 몰라. 주변의 꽃들을 바라보며 너도 언젠가 지게 될 운명이라 여겼겠지만, 실은 너는 날아야 하는 존재였던 거야. 고개 숙인 채 환경에 순응하며 살았던 시간들 속에서도, 네 등 뒤엔 날개가 자라고 돌핀슬롯단다.
잊지 마렴. 그 날개는 없던 게 아니라, 단지 접혀 돌핀슬롯을 뿐이야. 펴보지 않아 몰랐던 거지. 우리 모두 그렇단다. 스스로 새인 줄 모르고 살아가는 시간들. 스스로를 꽃이라 착각하며, 언젠가 시들고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날들.
이제는 그 착각에서 깨어나야 할 시간이야. 단단히 감추고 있던 네 날개를 다시 펼쳐보렴. 처음엔 힘이 없을 수 있어. 한 번의 날갯짓으로는 바람을 일으키지 못할 수도 있어. 하지만 괜찮아. 날개를 펼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넌 이미 다시 시작한 거란다.
이어령 선생님의 글이 문득 떠오른다.
"덕담이 아니라 날개를 주십시오. 非常에는 飛翔을 해야 합니다."
그래, 비상(非常)의 순간에는 비상(飛翔) 해야 한다고.
돌핀슬롯야, 너는 천사이므로 이미 날개가 있단다. 그저 너무 추워서, 너무 두려워서, 너무 낯설어서 그저 품 안에 꼭 접어두고 있었을 뿐이지. 그러니 이젠 조심스레 펼쳐보자. 한 치, 한 뼘씩만이라도. 비록 어제보다 조금 나아간 게 전부일지라도 그건 충분해. 때로는 넘어지고 주저앉을 수도 있어. 괜찮아. 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잊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운명을 바꾸기 위해 날갯짓하는 게 아니야. 오늘을 조금 더 견디고, 내일을 조금 더 바라보기 위해 그렇게 하는 거야. 삶은 언제나 계획대로 흘러가진 않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는 매일 연습할 수 있어. 하루하루 펼쳐보는 네 날개가, 결국 너만의 하늘을 만들어줄 거야.
돌핀슬롯야,
너는 충분히 잘해왔고,
앞으로도 잘할 거야.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속도로, 너만의 방식으로
천천히, 그리고 단단하게 날아오르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