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메모와 노트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글을 쓰고 남 앞에 서는 일이 업이라서 가능한 여건이 되면 케이플레이을 하려고 듭니다. 서재에도 한 백여 권 되는 수첩과 노트가 케이플레이. 이 노트와 수첩 중에서 가장 애지중지하는 게 케이플레이. 설교 말씀을 담은 노트입니다. 노트를 할 때는 목사님 말씀을 거의 빼놓지 않고 담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실 기록할 땐 손목이 아프기도 하지만 손으로 담아가는 말씀 안에서 금맥(?)을 만나기 때문에 그 아픔은 이내 기쁨이 됩니다.
꼭 기쁨만이 있는 건 아닙니다. 저희 부부는 9년 동안 같은 자리에 앉습니다. 둘이 똑같이 부창부수로 케이플레이합니다. 마치 속기사처럼 말입니다. 제가 세례를 받은 하림교회에 나갈 때 일입니다. 교회 등록을 하고 설교를 듣는데 우리 부부가 똑같이 케이플레이을 해가자 담임 목사님이 우리 부부를 이상하게 여겼습니다. 직업도 직업이지만 왜 기록을 하는 걸까? 그래서 저희 부부를 이단(異端)으로 생각한 것이지요. 나중에 목사님이 말씀을 하시는데 여간 고민이 아니었다고 했습니다. 혹시나 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케이플레이해 가는 것일까요? 설교 말씀을 케이플레이하는 이점이 있습니다. 우선 말씀에 집중하게 되고 기록이 남아 있어서 리뷰하기도 좋고 또 기록해 가면서 소통도 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 등을 끄집어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설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는 최소한의 에티켓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학창 시절을 보면 대개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은 수업시간에 열중합니다. 왜 이들은 수업시간에 집중하는 것일까요? 학교 시험 출제 위원이 학원 강사가 아니라 수업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케이플레이. 천국으로 가는 길은 바로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집중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이유가 케이플레이.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케이플레이. 우리 민족은 케이플레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일본인들은 케이플레이문화가 아주 발달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앙생활 역사를 남긴다는 점에서 케이플레이을 하는 것입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이지만 그 기록물을 남겨놓을 수도 있지만 제 마음과 정성 그리고 손 때가 묻은 노트 등을 관속에 넣기 위한 것도 있습니다. 그만큼 말씀이 좋고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곡 그렇게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그 생각이 변하지 않고 케이플레이.
보람 중의 가장 큰 보람이 케이플레이. 록한 노트를 보면 마치 예전에 내 집 장만을 위해 청약저축 또는 정기 예금 통장 같아서 뿌듯하기도 합니다. 저는 일상이 모여서 인생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신앙생활을 담은 케이플레이이 내 인생 신앙생활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올해도 새해 들어 두툼한 노트를 하나 장만했습니다. 가격은 5천 원입니다.그런데 이것을 장만할 땐 나름 떨림이 케이플레이. 이왕이면 필기하기 편하고 글이 잘 써지는 노트면 금상첨화입니다. 5천 원짜리지만 그건 5천만 원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 아끼는 <남자의 물건이 되는 셈입니다. 가끔 저는 이 <남자의 물건을 잘 간수하라고 아내에게 말합니다. 그리고 가끔 상기시킵니다.
“여보! 내 관속에 이 노트도 함께 넣어주라!”
나는 오늘도 <남자의 물건을 들고 성전에 들어갑니다. 할렐루야!
☞성경말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한 15:5)